버리지 못한 것은 티셔츠가 아니었다

2026.07.20 15:49:51

이한솔

프로덕트스토리지 대표

옷장을 정리하다 보면 이상한 티셔츠 하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목은 늘어났고, 프린트는 갈라졌으며, 어디에 입고 나가기엔 조금 민망한 옷이다. 그런데도 선뜻 버리지 못한다. 다시 개어 서랍 가장 안쪽에 넣어둔다.

생각해 보면 그 티셔츠가 특별히 비싸거나 좋은 옷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래 입어서 남은 것은 원단이 아니라 시간이다. 나에게도 그런 티셔츠가 한 장 있다. 잠이 오지 않던 어느 여름 새벽, 그 티셔츠를 대충 걸치고 집 앞 편의점으로 맥주를 사러 나간 적이 있다. 아무도 없는 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캔맥주 하나를 마셨던 그 시간은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티셔츠를 입고 작업실 바닥에 앉아 밤을 새워 옷을 만들기도 했고, 비 오는 날 아무 생각 없이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더 오래 기억되는 순간들이었다. 그래서 그 티셔츠를 볼 때마다 나는 옷이 아니라 시간을 꺼내 입는 기분이 든다.

누군가와 함께 웃었던 하루, 낯선 도시를 걸었던 여행, 첫 직장에서 흘렸던 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체온. 티셔츠 한 장은 그렇게 한 사람의 시간을 품는다. 그래서 우리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쉽게 놓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은 무엇이든 쉽게 사고 쉽게 바꾸는 시대다. 계절이 바뀌기도 전에 새로운 유행이 찾아오고, 아직 멀쩡한 옷도 금세 오래된 것이 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유행을 따른 옷이 아니라,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옷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의 삶도 누군가에게는 오래된 티셔츠 한 장처럼 기억될 수 있을까. 비록 낡고 빛이 바랬더라도 함께했던 시간이 선명해서 쉽게 잊히지 않는 사람. 문득 꺼내 보면 웃음이 나는 기억. 좋은 물건은 오래 쓰는 물건이지만, 더 좋은 물건은 오래 기억되는 물건이다. 옷도 사람도 결국 같은 이유로 곁에 남는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함께한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티셔츠와 달리, 누군가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순간 그 옷의 시간은 갑자기 멈춘다. 옷장 밖으로 나온 티셔츠는 대부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한다.

버려진 옷은 수거함에 담겨 선별장으로 이동한다. 누군가에게 다시 입을 수 있는 상태인지, 재활용이 가능한 소재인지, 혹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옷인지 분류되는 과정을 거친다. 상태가 좋은 옷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거나 새로운 주인을 만나지만, 그렇지 못한 옷들은 폐기물이라는 이름으로 남겨진다.

특히 티셔츠처럼 면과 합성섬유가 혼합된 의류는 다시 원래의 섬유로 되돌리는 과정이 쉽지 않다. 재활용 기술이 발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옷은 소각되거나 매립된다. 한 사람이 수년 동안 입으며 수많은 기억을 담았던 옷이, 마지막 순간에는 단순한 쓰레기로 취급되는 것이다.

우리가 옷을 버리는 순간은 단순히 물건 하나를 정리하는 일이 아니다. 그 옷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원단, 물, 에너지, 그리고 누군가의 노동까지 함께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한 장의 티셔츠가 오래 기억되는 물건이 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완벽한 옷일 필요는 없다. 좋은 소재로 만들어지고, 오래 입을 수 있도록 설계되고, 필요하다면 수선되어 다시 사용될 수 있는 옷이면 충분하다.

옷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버려지는 순간까지 하나의 긴 여행을 한다. 우리는 그 여행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옷을 오래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비를 줄이는 행동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간과 누군가의 노력을 존중하는 가장 작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옷장 한쪽에 걸린 버리지 못하는 티셔츠가 조용히 자신의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그 티셔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내가 지나온 계절들을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옷을 쉽게 버리지 않는다면, 그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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