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보다 사람이 먼저…91년 철물점의 기적 '분메이'

디지털보다 사람이 먼저…91년 철물점의 기적 '분메이'
커피·도시락·수다 사이 스마트폰 배우는 '분메이'…교육장 아닌 마을 사랑방
1층은 주민 지원, 2층은 정책 기획…젊은 직원들이 손자·손녀처럼 반복 교육

2026.07.19 15:26:04

편집자

AI가 일상이 된 시대. 병원 예약도, 은행 업무도, 행정 민원도 스마트폰으로 해결하는 시대가 됐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속도로 디지털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인구감소지역인 충북 영동·옥천·보은은 고령화와 디지털 전환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새로운 격차 앞에 서 있다. 충북일보는 일본 미야자키현 츠노초를 직접 찾아 농촌형 디지털 전환 모델을 취재했다. 남부 3군의 현실과 일본의 실험을 통해 '농촌은 디지털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본다.

<글 싣는 순서>

①디지털에서 밀려난 농촌

②남부3군도 디지털 장벽

③츠노초의 디지털 실험

④사람을 품은 디지털 현장

⑤디지털은 생존이었다

⑥남부 3군의 디지털 해법

분메이를 찾은 주민들이 스마트폰 이야기와 일상을 나누며 웃고 있다. 주민들은 "또 잊어버리면 다시 오면 된다"며 디지털을 일상 속에서 익혀가고 있다.

ⓒ이진경기자
[충북일보] "또 잊어버렸어." 창가에 둘러앉은 할머니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또 오면 되지." 누군가 말을 받자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일본 미야자키현 츠노초 나카마치 상점가에 자리한 다세대 교류공간 '분메이(BUNMEI)'. 노란 외벽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스마트폰 교육장의 엄숙함 대신 커피 향과 주민들의 수다가 먼저 취재진을 맞았다.

창가에는 평균 연령 70대 후반의 주민 6명이 커피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한쪽에서는 젊은 직원이 고령 주민과 나란히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주민이 "이 메시지를 열어도 괜찮으냐"고 묻자 직원은 휴대전화를 대신 조작하지 않고, 어느 부분을 눌러야 하는지 손가락으로 천천히 가리켰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지역 식재료로 만든 도시락을 사려는 주민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도시락을 고르던 주민은 직원에게 휴대전화를 내밀었고, 커피를 마시던 이들은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91년 된 철물점을 리모델링해 만든 일본 미야자키현 츠노초의 다세대 교류공간 '분메이(BUNMEI)'. 디지털 교육과 주민 교류, 지역 먹거리, 청년 창업이 한 공간에서 이뤄진다.

ⓒ이진경기자
분메이에서 디지털은 별도의 수업이 아니었다. 주민들이 만나고 머무는 일상 속에 섞여 있었다.

분메이는 2021년 3월 13일 문을 열었다. 91년 동안 건축자재와 철물을 팔던 상점을 리모델링한 공간이다. 한때 번성했던 나카마치 상점가는 인구 감소와 점포 폐업이 이어지며 사람의 발길이 뜸해졌다. 츠노미래재단은 비어가던 상점가에 다시 주민을 불러들이기 위해 옛 철물점을 '음식과 미래를 함께 생각하는 공간'으로 바꿨다.

건물 외벽과 실내 곳곳에 사용한 밝은 노란색도 우연히 고른 색이 아니다. 관공서를 방문하는 긴장감 대신 누구나 이웃집에 들르듯 가볍게 들어오라는 뜻을 담았다. 세대가 만나고 쇠퇴한 상점가에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이름도 '문명'을 뜻하는 분메이로 정했다.

분메이는 단순한 디지털 교육장이 아니다.

어린이부터 고령층까지 머무는 다세대 교류 살롱, 요리와 창업을 시험하는 키친랩, 주민들의 스마트폰과 태블릿 문제를 해결하는 IT 헬프데스크, 사진과 영상을 제작하는 촬영 스튜디오, 청소년 진로교육과 지역사업을 기획하는 사무공간 등 다섯 가지 기능이 한 건물에 담겨 있다.

무료 와이파이와 전원시설을 갖춘 코워킹·학습공간도 주민들에게 개방한다. 회의나 동아리 활동을 위해 공간을 빌릴 수 있고, 차와 간식을 구입해 오래 머물러도 된다. 청년이 음식점을 열기 전 키친랩에서 제품을 만들어 주민 반응을 확인하고, 가능성을 검증한 뒤 실제 창업에 나서는 실험도 이곳에서 이뤄진다.

분메이 2층에 마련된 츠노미래재단 사무실. 직원들은 이곳에서 디지털 정책과 청년 정착, 지역 활성화 사업 등을 기획하며 마을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이진경기자
현장 취재 당시 츠노미래재단 직원은 10명. 6명은 분메이 2층 사무실에서 디지털 정책과 지역산업, 청년 정착, 교육·의료 협력사업 등을 기획하고 나머지 4명은 1층을 오가며 헬프데스크 운영과 주민 상담을 맡는다.

이 가운데 2명은 점심시간이면 앞치마를 두른다.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로 도시락과 조리식품을 만들어 판매하기 위해서다. 스마트폰 사용법을 알려주던 직원이 잠시 뒤 주방에서 도시락을 포장하고, 도시락을 사러 온 주민에게 다시 디지털 상담을 해주는 풍경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2층에서는 마을의 미래를 설계하고, 1층에서는 주민의 오늘을 돕는 구조다.

분메이를 지키는 직원 상당수는 20~30대 젊은 층이다. 츠노초에서 태어난 청년뿐 아니라 요코하마와 사이타마, 구마모토 등 외지에서 이주한 이들도 함께 일한다. 유치원과 호텔, 치과, 자동차 영업, 건축·상업시설 운영 등 경력도 다양하다. 지역 축구단 선수로 뛰면서 디지털 지원 업무를 맡는 지역활성화협력대원도 있다.

이들이 모두 IT 전문가인 것은 아니다. 츠노미래재단이 우선한 것은 기술 경력보다 주민과 눈을 맞추고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들어줄 수 있는 태도였다.

고령 주민들에게 젊은 직원은 강사이기 전에 자식이나 손자·손녀 같은 존재다. 비슷한 연배에게 모르는 것을 드러내기는 민망해도 손자뻘 직원에게는 비교적 편하게 묻는다. 직원 역시 설명에 앞서 안부부터 묻는다. 스마트폰을 배우는 시간보다 서로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더 길어질 때도 있다.

하라시마 유지(33) 츠노미래재단 사무국장은 "젊은 사람이 많지 않은 농촌에서 어르신들은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를 즐거워한다"며 "친절하게 반복해서 대응하는 과정에서 디지털보다 먼저 신뢰가 쌓였다"고 설명했다.

16년 전 츠노초로 이주한 모세 다카코 씨 부부가 분메이에서 디지털 프렌들리 사업과 태블릿 사용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진경기자
분메이에서 만난 모세 다카코 씨 부부는 그 변화를 보여주는 주민이다.

아내 다카코(81) 씨는 디지털 프렌들리 사업을 통해 태블릿을 처음 접했다. 대여 기간에는 새로운 기능이 생길 때마다 분메이를 찾아 사용법을 배웠고, 태블릿을 반납한 뒤에는 자신의 돈으로 새 제품을 구입했다.

"이제는 없으면 못 살아요."(웃음)

그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바로 검색한다. 요즘 취미인 한복 만드는 방법과 태국 요리를 찾아 직접 따라 해보고, 자녀와는 LINE으로 사진과 안부를 주고받는다. 영화관에서 놓친 영화를 보고 싶다고 자녀에게 묻자 OTT 접속 방법을 알려줬고, 이제는 직접 TV에 연결해 영화를 본다.

"예전에는 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라 포기했어요. 지금은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게 돼요."

남편(84)은 스포츠 영상을 즐겨 본다. 젊은 시절 직접 야구를 했던 그는 더는 운동하기 어렵지만 태블릿을 통해 경기를 보는 새로운 취미를 얻었다.

이 부부에게 태블릿은 무료로 받은 물건이 아니었다. 삶의 선택지를 넓힌 도구였다.

츠노초가 주민들에게 대여한 태블릿은 처음부터 영구 지급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기기 보증과 사용 가능 기간을 고려해 5년간 무상 대여하고, 주민들이 충분히 사용법을 익힌 뒤 필요하면 자신의 기기를 구입하도록 설계했다.

"태블릿을 나눠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민이 스스로 기기를 선택해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기간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게 재단 측 설명이다.

분메이에서 판매하는 도시락. 지역 농산물로 만든 점심 메뉴를 주민들에게 제공하며 디지털 교육과 먹거리, 주민 교류가 한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진경기자
창가에 모인 주민들에게 분메이의 의미를 묻자 대답은 훨씬 소박했다.

카테야마 하쓰에(79) 씨는 "예전에는 스마트폰 사용법을 물으려고 먼 시내 휴대전화 판매점까지 찾아갔다"며 "직원이 알려줘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다 잊어버렸다"고 말했다.

옆에 앉은 주민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맞아. 오는 길에 잊어버려." "그래서 여기로 또 오는 거야."

한 주민은 "여기서는 같은 질문을 몇 번 해도 다시 친절하게 설명해준다"며 "배우고 잊어버리면 또 오고, 또 배우고 또 잊어버리면서 조금씩 스마트폰과 친해지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거의 매일 분메이를 찾는다. 커피를 마시고, 도시락을 사고, 친구들과 수다를 떤다. 휴대전화를 사용하다 막힌 것이 있으면 온 김에 묻는다.

인터뷰 도중 "다들 연세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고 하자 한 주민이 곧바로 받아쳤다.

"심심해서 오는 거야."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그 짧은 농담 안에는 분메이가 성공한 이유가 담겨 있었다. 주민들이 디지털 교육을 받기 위해 의무적으로 찾는 곳이 아니라, 심심할 때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아오는 공간이 됐기 때문이다.

일본 미야자키현 츠노초 '분메이(BUNMEI)'에서 고령 주민들이 젊은 직원과 함께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우고 있다(왼쪽). 창가에 둘러앉은 주민들은 스마트폰을 익히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진경기자
분메이는 디지털센터도, 행정기관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사랑방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도시락 가게였다. 청년에게는 창업을 준비하는 실험실이었고, 학생에게는 공부방이었다. 고령 주민들에게는 모르는 것을 몇 번이고 다시 물어볼 수 있는 헬프데스크이자 젊은 세대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만남의 공간이었다.

영동·옥천·보은에서도 디지털 교육은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정해진 교육이 끝난 뒤 주민이 다시 혼자가 되는 한계는 여전히 남아 있다.

분메이가 보여준 것은 교육 횟수나 첨단 장비가 아니다. 잊어버려도 괜찮고, 같은 것을 다시 물어도 괜찮으며, 특별한 용무가 없어도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우는 사람이었다.

"또 잊어버렸어요."

"그럼 또 오세요."

그 한마디가 반복되는 사이 주민들은 기술보다 사람을 먼저 믿게 됐고, 디지털은 그 뒤에 자연스럽게 일상이 됐다.

츠노초가 만든 것은 첨단 디지털 공간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찾아와 사람을 만나고 배우며 쉬어갈 수 있는 마을의 거실이었다.

충북일보는 다음 편에서 이 같은 생활 속 디지털 전환이 츠노초의 공동체와 지역경제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그리고 작은 농촌이 디지털을 생존 전략으로 선택한 이유를 살펴본다.

영동·옥천·보은 / 이진경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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