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옷장, 굶주린 마음

2026.06.22 09:36:34

이한솔

프로덕트스토리지 대표

입을 옷은 없고, 옷은 너무 많다어릴 적 내 옷장은 작은 한 칸이었다. 계절마다 몇 벌의 옷이 전부 였고, 새 옷을 산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마음에 드는 옷 한 벌은 오래도록 애착을 갖고 입었다. 옷에 구멍이라도 생기면 수선집에서 자수를 넣어 입었고, 누군가에게 옷을 물려받기도 하며 그렇게 옷에 시간과 추억을 쌓아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옷은 너무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계절이 바뀌기도 전에 새로운 유행이 등장하고, 휴대전화 화면을 몇 번만 넘겨도 수많은 옷이 눈앞에 펼쳐진다. 할인이라는 단어와 무료 배송이라는 문구는 소비를 망설일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옷장은 점점 커지고 그 안에는 옷이 넘쳐났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많은 옷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입을 옷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패션디자이너로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그 말을 해보았다. 매일 옷을 만들고, 누구보다 많은 옷을 가까이 하며 살아왔지만 가득 찬 옷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 적이 있었다.

옷은 많았지만 손이 가는 옷은 많지 않았다. 부족한 것은 옷이 아니라 만족감이었다.

우리는 흔히 더 많은 선택이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삶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메뉴가 너무 많은 식당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듯, 넘쳐나는 선택지는 오히려 우리를 지치게 한다. 옷 역시 마찬가지이다. 더 많은 옷이 더 많은 만족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때로는 선택의 무게가 즐거움보다 피로를 먼저 가져온다.

패션 산업은 오랫동안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왔다. 어제의 유행은 오늘의 재고가 되고, 오늘의 베스트셀러는 내일의 할인 품목이 된다. 소비자는 늘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브랜드는 더 빠르게 움직인다. 그렇게 우리의 옷장은 점점 커져갔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은 비어갔다.

나는 가끔 오래된 사진을 들여다본다. 십여 년 전의 사진 속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적은 수의 옷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때 입었던 옷들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처음 월급을 받아 샀던 겨울 코트, 몇 년 동안 닳도록 입었던 셔츠, 여행지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티셔츠. 옷의 개수는 적었지만 각각의 옷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었다.

어쩌면 행복은 소유의 양이 아니라 관계의 깊이에서 올 수 있다. 많은 옷을 갖는 것보다 오래 입고 싶은 옷을 갖는 것, 유행이 지나면 잊히는 옷보다 시간이 지나도 다시 꺼내 입게 되는 옷을 곁에 두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풍요가 아닐까.

이미 가지고 있는 옷을 한번 더 입고 유행보다 취향을 믿으며, 필요 이상의 소비를 조금 늦추는 것. 옷장을 끊임없이 채우기보다 오히려 비어 있는 여백 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발견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

입을 옷은 없고, 옷은 너무 많다는 말 속에는 어쩌면 부족한 옷이 아니라 충분함을 잊어버린 우리의 마음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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