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미술가 중에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이로는 설치미술가 이불, 서양화가 박불똥 등이 떠오른다. 그리고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서박이(1940~2016)'라는 추상화를 많이 그린 작가도 있다. 얼마 전 지인의 개인전을 보기 위해 서울 인사동에 갔다가 충북갤러리(인사아트센터 2층)에서 열리고 있는 서박이 작가 회고전을 본 적이 있다. 전시장에는 서박이 작가를 꼭 닮은 아드님(서의영)이 지키고 있었다. 서박이 작가는 필자와 같은 충북 지역에서 활동한 작가이다. 충북미술협회 모임에서 본 적이 있는데, 풍기는 첫인상은 화가 장욱진, 이완호, 박노수, 시인 서정주와 비슷했으며 초원을 흙먼지 날리며 힘차게 뛰어다니는 강인한 타조와 고고한 학을 닮았다고 느꼈다.
서박이 작가는 1940년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후 경남 함양에서 성장했다. 함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서 김환기, 이봉상, 이종무 교수에게 그림을 배웠다. 학교 다닐 때는 총학생회장을 했을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전시회 도록에 학사모를 쓰고 졸업생 대표로 연설하는 흑백사진이 인상적이다.
졸업 후 그의 적극적인 성격은 사업가로 변신하게 한다. 처자식을 굶길 수 없어 일본 처가로 떠나보낸 무능한 가장 이중섭, 동생에게 의지해 작품 활동을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빈센트 반 고흐와는 대조적인 삶을 산 작가이다. 산을 자기만의 독특한 조형 언어로 많이 그려 유명한 유영국이 사업에 성공했듯이, 보기 드물게 서박이도 광산업계에서 크게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1981년 공장 화재와 광산 산업의 사양화로 인해 사업을 접는다. 이로 인해 대학 시절과 사업 중 틈틈이 그렸던 작품들이 모두 소실되고 만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아무 연고가 없지만, 멋진 풍경에 매료돼 충주에 거주할 집과 작업실을 마련하고 다시 붓을 잡는다. 충주는 묘하게 미술가들을 끄는 매력이 있는 곳인가 보다. 연고가 없는 충주에 서박이 외에 서양화가 구자승, 장지원 부부, 한국화가 문은희, 수주팔봉에 미술관을 연 이미령 작가 등이 자리를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서박이는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며 현대미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심포니'와 '하모니' 등의 작품을 통해 음악적 감성과 생명의 이미지를 화폭에 담아냈다. 그의 작품은 자연의 생명력과 조화를 표현하며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스탬프 기법과 금속 오브제를 활용한 콜라주 기법을 동시에 사용해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기법은 팝아트 거장 앤디 워홀이 즐겨 사용한 표현 방식으로, 이를 통해 자연의 조화와 섭리를 화폭에 담아냈다.
권영걸 세종연구원 원장은 "서박이 화백은 우주의 질서와 생명의 생성 원리를 탐구한 사유의 화가로 그의 회화는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생명의 언어로 구성된 시각적 우주"라고 경의를 표했다.
이동우 작가와 서박이 작가의 아들 서의영 씨가 전시장에서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동우
어린 시절, 아들 서의영은 집에 걸려 있던 아버지의 추상화를 이해하지 못해 그림의 의미를 물었다고 한다. "아빠 이게 무슨 그림이야·" 아마 어린 아들에게 어떤 설명도 쉽게 와닿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아버지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만 지으실 뿐 대답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아들이 다시 묻자, 아버지는 "이렇게 상상해 보거라. 인적 없는 깊은 산골짜기에 아주 작고 가냘픈 예쁜 새 한 마리가 태어났단다. 그 작은 골짜기가 온 세상인 줄 알고 이리저리 날며 살다가, 매서운 겨울 날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눈 속에 묻혀 죽었어.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그 작은 생명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걸 알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져 버린 거지. 흩어진 깃털은 그 새의 흔적이고, 파란 점은 차가운 외로움, 빨간 점은 짧지만 소중했던 생명의 흔적이자 희망을 의미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순간 아들은 추상화가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깊은 철학과 예술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서박이 작가가 감성이 풍부하고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세월이 흘러, 서박이 작가는 죽음의 문턱에 있는 상황에서도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머릿속의 예술을 더 이상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며 생의 마지막 전시를 준비하며 예술의 열정을 놓지 않았다.
2016년, 서박이 작가는 이 세상 소풍을 마쳤다. 그의 작품들은 딸이 운영하는 강원도 삼척 부남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부남미술관은 화백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갤러리 겸 문화공간으로,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시와 문화 행사를 통해 방문객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아버지의 작품들을 관리하고 있는 아들 서의영은 "작품을 절대로 팔지 말고 잘 보관하다가 가끔씩 꺼내 사람들에게 보여주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려 서울 인사동에서 2026년 4월 아버지의 '10주기 추모전'을 열은 것이다. 많은분들이 고인의 작품을 통해 전율과 철학적 깊이를 조금이라도 함께 하는 것이 희망이라고 한다.
전시회를 보고 나오면서 얼마 전 청주에서 봤던 작품에 곰팡이가 필 정도로 작품 관리가 제대로 안 돼 씁쓸한 기분이 들게 한 전시회가 생각났다. 작가는 가고 없지만, 자식들에 의해 작품들이 세상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