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겨우내 딱딱하게 굳어있던 땅에 촉촉이 봄비가 내리면 땅의 물꼬가 트인다. 꽃샘추위에도 남풍은 봄기운을 몰아오고 양지 녘 봄까치꽃 같은 풀꽃들은 성급히 고개를 내민다. 지난해 잎눈, 꽃눈을 예비한 나무들도 이에 질세라 따스한 봄볕이 좋아 언제라도 망울을 터트릴 기세다.
앞뜰 시냇가를 흐르는 물소리가 힘차다. 쿨 쿨쿨 심장의 고동을 북돋운다. 아침부터 이리저리 바쁘게 나는 까치 소리도 경쾌하고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은 무슨 그림을 그려도 될듯싶다. 벌써 부지런한 농부가 밭에 뿌린 거름 냄새가 구수하고 아침밥을 짓는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꽃처럼 피어난다. 귀촌 생활 15년에 들어오는 봄의 정경은 어머니 품처럼 푸근하기만 하다.
변덕스러운 봄날, 이른 아침 코끝에 오는 쌀쌀함이 상쾌하다. 여기저기 뜰 안을 살펴보다 쑥쑥 올라오는 마늘과 비닐하우스에 심은 상추의 빠른 성장세에 감탄한다. 마당 잔디밭에 온갖 잡초가 기를 쓰고 올라온다. 저걸 다 뽑아버려야지 하다가도 저렇게 자신의 삶을 피우기 위한 치열한 외침을 나의 기준으로 무참히 짓밟아 버린다고 생각하니 죄인이 되는 느낌이다. 나는 잡초를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목숨을 빼앗아 버릴 힘을 가졌고 그는 그럴만한 무기가 없다는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생명임은 틀림없는데 말이다. 그것이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이라고 외면하지만, 오늘의 인간 세상에도 이런 정글 법칙이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공포로 다가와 무척이나 마음 무겁기도 하다.
잡초뿐 아니라 나무의 전지도 그렇다. 올해 뜰 안에 있는 다섯 그루의 소나무가 새순을 아주 자랑스럽게 올리고 있다. 저걸 수형을 잡기 위해 매정하게 잘라버려야만 한다. 내 보기 좋게 하려고 말이다. 하지만 소나무와 내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애써 합리화한다. 소나무와 나처럼 인간관계도 서로를 맞추는 과정이 아닐까. 너무 내 기준을 고집하면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걸리적거리는 나무의 가지를 잘라내듯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가지는 잘라내는 타협을 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 가까워지고 협력하게 되지 않는지 생각해 본다.
봄은 계절의 시작이며 여름과 가을을 거쳐 겨울로 한 해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다시 봄이 시작되어 끝없이 반복 순환한다. 파릇파릇한 청춘은 우리 인간의 봄이고 청춘은 생의 시작이다. 나뭇잎 무성한 중년은 여름이다. 낙엽 물드는 장년의 가을을 지나면 어느덧 찬바람 휑한 노년의 겨울이 찾아든다. 자연은 계절을 반복하지만 인간의 계절은 반복이 없다. 여기에 인간의 비극이 있다. 우리는 반복하지 않는 생, 일회성의 삶을 산다. 그래서 그 생의 계절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아니 그 계절을 이루는 하루하루가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새봄에 피어나는 아기 손 같은 연둣빛 이파리를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떨린다. 너무 연약해서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다. 이 잎이 커서 가지를 내어 무성한 모습을 상상해 보라.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듯 이는 시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웅변한다. 그래서 연둣빛은 '시작'을 의미한다. 다시 시작하는 봄은 힘들었던 지난해를 잊게 하고 희망의 불씨를 지핀다.
절로 이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쑥쑥 거침없이 올라오는 풀이며 나무들을 바라보며 이 봄 나는 다시 또 새로운 출발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