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저녁식사' 일상이 깊어지는 방식

2026.04.22 15:17:43

이정민

청주시청 도시계획상임기획단·공학박사

일상은 어느 순간 납작해진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밥을 먹고, 비슷한 일을 하고, 잠이 들고 또다시 아침이 밝는다. 반복되는 일상은 무료하고, 무료한 일상이 누적되면 감각이 무뎌진다. 복권 당첨 같은 횡재를 꿈꾸지만, 그런 변화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고프스타인의 《할머니의 저녁식사》의 주인공이다. 할머니의 하루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이른 아침 일어나 식사를 하고, 호숫가에 나가 온종일 낚시를 한다.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잡은 물고기를 버터에 구워 먹고, 이른 잠에 든다. 사건이라고 부를 만한 일은 없다. 하지만 이 반복은 이상하게도 지루하지 않다.

반복을 다루는 태도

할머니의 일상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사소한 일들을 다루는 태도다. 설거지는 '재빨리' 끝내고, 호수에서 '온종일' 머문다. 일상에는 설거지나 청소처럼 귀찮은 일들이 산재해 있다. 할머니는 그것들을 미루지 않고 해치움으로써, 온종일 낚시할 자유를 확보한다.

저녁 식사는 '아주 천천히' 이루어진다. 살아낸 하루에 스스로 보상하는 방식이다. 이때 낚시는 더 이상 생계를 위한 노동이 아니다. 하루를 구조화하는 의식(Ritual)이다. 반복이 무의미를 낳는다면, 의식은 반복 속에 의미를 부여한다. 의식이 되는 순간 시간은 소모되지 않고 축적된다.

할머니는 물고기를 팔아 부자가 되려는 욕망 대신, 낚시라는 행위 자체에 가치를 둔다. 할머니의 일상에서 미세한 차이들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호수의 물결은 매번 다르게 흔들리고, 불의 세기에 따라 생선의 맛도 달라질 것이다. 할머니의 삶은 변화를 추구하는 대신, 변화를 감각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반복은 감각을 정교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

반복을 감각하는 삶이 있다면, 반복을 설계하는 삶도 있다. 드라마 <반주의 방식> 여주인공 미유키다. 그의 인생 목표는 선명하다. '하루의 끝에서 마시는 맥주 한 잔을 완벽한 순간으로 만드는 것' 미유키의 하루는 그 한순간의 절정을 위해 설계된다. 회사에서 스ㅤㅋㅘㅅ 자세로 서류를 보고, 퇴근 전에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기다린다. 일부러 언덕길을 오르거나 사우나에서 땀을 빼 '맥주가 가장 맛있는 몸'을 만든다. 마트에 들러 재료를 사고, 정성을 들여 요리한다. 고등어 초절임 카르파초가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이고, 꽁꽁 얼린 잔에 맥주를 따르는 그 순간 미유키는 비로소 하루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으로 맥주를 마신다. 행복한 한순간을 위해 달려가는 미유키의 일상이 사랑스럽다.

두 사람의 일상은 단순한 삶을 어떻게 깊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준다. 할머니가 반복 속에서 세상의 변화를 감각한다면, 미유키는 반복을 통해 자신만의 즐거움을 구성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변화는 외부의 사건이 아닌 지루한 반복을 통과하면서 내부에서 생성된다는 사실이다.

일상이 다시 평평해질 때 할머니의 저녁식사와 미유키의 차가운 맥주를 기억한다. 반복은 무의미해지기 쉽지만, 동시에 의미가 생성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얼마나 새로워야 충분한가 혹은 얼마나 안정되어야 아름다운가. 그 사이의 나의 위치에 대해 생각한다. 온전히 내 삶의 리듬을 만들어 가는 일, 그리고 그 리듬이 무너지지 않도록 절제하는 태도까지가 일상의 완성이다. 미세한 차이를 알아차릴 때, 납작했던 일상은 조금씩 깊이를 얻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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