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한국어 강의실 앞자리에 앉던 그녀의 자리가 비었다. 손자가 아파서 올 수 없다고 한다. 쉰 중반인 그녀는 지금 한국에서 외손자를 키우고 있다. 중국에 일자리를 잡은 딸 부부를 대신해 한국에 정착한 친정 부모가 육아를 대신하는 것이다.
한국에 사는 부모에게 아기를 맡기고 중국에서 생활하는 딸의 선택이 누군가에겐 낯설지 몰라도 같은 시대를 사는 내게는 그 삶의 무게가 공감으로 다가왔다.
부모는 한국에 일궈놓은 삶의 터전을 버릴 수 없고, 젊은 자녀들은 나고 자란 중국의 익숙한 언어와 문화권 속에서 생존의 길을 찾아야 했다. 중국과 한국의 지리적 단절 속에서 고육지책으로 찾은 것이 조부모의 황혼 육아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유로운 노후를 담보 잡힌 채 남편과 손주를 키우며 자신의 시간을 잊어가고 있다.
이 고단한 풍경은 비단 그녀만의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올가을 복직을 앞둔 딸아이와 아홉 달 된 손자를 보며 같은 고민에 빠져 있다. 사위가 육아 휴직을 이어받기로 했지만 휴직이 끝난 뒤의 대책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누군가 한 명은 경력을 포기하고 직장을 그만둬야만 해결된다. 손자가 성장하는 그 틈을 내가 메꿔주면 딸 부부에게 도움은 되겠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인 걸림돌 때문에 망설이고 있다. 육아의 어려움은 이제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풍경이 되었고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이 막막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떤 대처 방안을 모색해야 할까. 요즘은 '조부모 돌봄 수당'이란 제도도 생겼는데 신청 조건 맞추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가족센터에서 시행하는 '아이 돌봄 서비스'도 있지만 개인 형편에 맞게 이용하기가 수월하지 않다.
아이를 맡기는 자녀들도 부모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하고 지원해야 하는데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결국 국공립 보육 시설의 확충은 물론 유아의 갑작스러운 질병에 대응할 수 있는 긴급 돌봄 서비스의 이용이 활발해져야 하는데 내가 필요할 때만 조건 맞추기는 어렵다.
특히 기업 문화도 바뀌어 부모들이 눈치 보지 않고 육아기에는 근로 시간 단축 등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되면 좋겠지만 양쪽 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이 존재한다. 일방적으로 한 편만 두둔할 수도 없다.
순수한 눈망울의 아기가 주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에너지다. 하지만 그 경이로운 생명을 키워내는 대가가 개인의 희생이나 가계의 경제적 위협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국가에서 출산을 권장하는 구호보다 중요한 것은 내 딸이 경력 단절의 공포 없이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는 정책의 보호망이다.
아이를 온 마을이 함께 키운다는 말이 있다. 아이의 성장과 안전이 가정만이 아니라 지역 사회 전체의 도움과 상호 작용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 명 한 명의 아이들은 신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고 그 선물을 잘 키워내려면 책임과 돌봄이 함께 해야 한다. 저당 잡힌 노후가 아닌 축복받은 황혼으로 손주를 마주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우리 사회가 따뜻하게 채워지길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