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권근(權近, 1352∼1409)의 호가 양촌(陽村)이고 그의 묘를 비롯한 권제, 권람 등 3대의 묘가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마을에 있다.
그런데 권근이 호로 사용한 양촌(陽村)이라는 지명은 과연 어디일까· 양촌(陽村)은 '양지쪽에 있는 따뜻한 마을'이라는 의미로서 전국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흔한 지명인데다가 권근의 생애가 파란만장하여 머물던 곳이 여러 곳이므로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고 정확한 기록도 없어 추측이 난무한 실정이다. 그러면 권근의 생애를 따라 양촌과의 연관을 찾아보기로 하자.
권근(權近)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가원(可遠) 또는 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 소오자(小烏子)이다. 1352년(공민왕 원년)에 태어나 1369년(공민왕 18)에 과거에서 병과 2위로 급제한 뒤 좌사의대부, 성균관대사성, 지신사, 동지공거 등을 역임하였다. 1389년(창왕 2)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명의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보고하기도 전에 몰래 봤다는 죄로 우봉(牛峯)에 유배되었고 이후 영해(寧海-현 영덕군)와 흥해(興海-현 포항시), 김해(金海-현 김해시) 등지로 옮겨지면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1390년(공양왕 2) 5월 권근은 윤이·이초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다가 청주에서 발생한 홍수로 인해 잠시 풀려나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7월에 다시 익주 몽관(夢官-지금의 전북 익산시 임상동 일대)으로 유배되었다.
권근은 유배지인 익산에서 성리학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저술하였으며 당시 권근이 '양촌대(陽村臺)'라는 누각과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권근의 호가 양촌이므로 정자의 이름을 '양촌대'라 하였을 뿐 이곳의 지명과는 연관이 없다고 하겠다. 전북 익산시 임상동에는 2015년 11월 5일에 세운 양촌 권근 선생 유허비(陽村權近先生遺墟碑)가 있는데 이 비석이 있는 곳은 권근이 실제 거주한 곳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익주에서 지은 시 '서회(書懷: 마음에 품은 바를 글로 씀)'에 창문을 열면 미륵산이 보인다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몽환 마을에서도 미륵산이 보이는 어느 쯤에 그가 거주한 집이 있었으며 바로 그곳이 1390년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완성한 곳이지만 양촌이라는 지명과는 관련이 없다. 1391년 3월에야 비로소 종편(從便(귀양에서 풀려나 서울 밖에서 사는 것)이 허락되어 충주 양촌에 은거하며 조선 개국을 맞았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1393년(태조2) 정총(鄭摠)과 함께 정릉(定陵)의 비문을 짓고 중추원사가 되었다. 1396년 태조는 이천시 율면 산성리 정문말에 권근을 찾아와 임금님 바위에서 권근과 정치적인 담론을 하였고, 조선왕조에 협조를 거부하던 권근은 절의를 굽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새 왕조에 협력하게 되었다. 1396년(태조 5) 명나라 태조가 자기에게 바치는 글인 찬표를 잘못 썼다 하여 그 글을 쓴 정도전을 잡아들이라고 할 때, 정도전을 대신해서 자진하여 가서 해명을 잘하여 극진한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었다.
1409년 양촌이 58세로 운명하자 자손들은 한양에서 멀지 않은 경기 광주에 안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묘 앞을 지나는 사람마다 자리가 심상찮다며 수군거리자 효성이 극진했던 둘째아들 권제(1387∼1445)는 당시 한양에서 유명한 풍수 지관의 권유를 받아들여 양촌이 죽은 지 31년 후인 세종 22년(1440)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마을로 이장을 하게 된다.
일설에는 능안마을의 옛 지명이 양촌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묘가 있던 광주는 연고가 없는 지역이므로 권근이 살아서 항상 가고 싶어하던 충주 소태면의 양촌 마을과 같은 충주 관내에서 풍수적으로 명당인 곳을 찾아 능안마을을 묘소로 선정했을 뿐 생전에 권근과의 연관성은 찾을 수 없으며 이곳이 양촌이라는 지명의 근거도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권근이 유배지를 전전하면서도 틈만 나면 양촌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시 속에 표현하였고, 오랜 동안의 유배가 풀리자 충주시 소태면 양촌 마을을 찾아가 2년 동안 살면서 학문을 닦고 은거 생활을 한 것을 보면 이곳이 양촌이라는 호와 연관이 있는 곳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