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살면서 하루 기분 좋은 날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대부분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세상을 각박하게 재미없게 산다는 이야기와 다름없다.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오는 봄기운을 시샘하던 날, 우리 부부는 봄나들이를 나섰다. 겨우내 추위에 눌리기도 했지만, 이 핑계 저 핑계로 한 달에 한 번은 여행 다니자는 약속을 수개월 동안 지키지 못한 탓에 쌓인 빚을 좀 갚아야겠다는 심산이기도 했다. 차창을 스치는 풍경은 바싹 마른 잎을 떨어내지 못하는 나무들만 외로이 서 있었다. 다행히 가을처럼 맑고 푸른 하늘빛에 마음은 유유히 떠 있는 하얀 구름이 되었다.
괴산 연풍에서 소조령과 이화령 터널을 연달아서 지나면 바로 문경새재가 나오고 명산 주흘산 아래 문경읍이다. 나는 괴산에 정착하면서부터 문경에 자주 간다. 문경(聞慶)은 높고 험한 주흘산 아래 남향으로 안온한 위치에 자리를 잡은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으로 기쁜 소식을 듣고 경사스러운 일의 조짐이 있다는 문희경서(聞喜慶瑞)에서 유래된 이름만큼이나 뭔가 좋은 기대감을 주는 곳이다. 해방 직전에는 어떤 도사가 문경에 나타나 곧 경사스러운 일이 생길 거라며 춤추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다.
언젠가 가을 사과가 익을 때 주흘산 바로 아래 깊숙이 들어앉은 모싯골이란 마을을 간 적이 있었는데 동네 곳곳에 탐스러운 사과와 황금빛 감이 주렁주렁 달린 풍경을 보고 감탄을 연발한 기억이 생생하다. 일교차가 커 사과 맛이 기막힌 점 또한 문경에 대한 호감을 더한다.
아내와 나는 봄바람으로 콧바람을 쐬며 어떤 기대감으로 문경새재 입구를 지나 읍내로 들어선다. 문경새재를 왼편에 놔두고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박 대통령이 문경초등학교 교사 시절 하숙을 했다고 하는 청운각을 바라보면서 순간 역사의 한 장면이 스쳐 간다. 점심으로 무얼 먹을지 하다가 아내가 좋아하는 갈빗살을 찾아 지인과 한번 온 적이 있는 식육식당에 들렀다. 어떤 부위를 먹을까 고민하는데 주인아주머니께서 어머니 같은 온화한 미소를 띠시면서 권해주는 치맛살을 골랐다. 또한 빠르게 상을 차려내며 상냥하게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하는 종업원의 태도에 더불어 어느새 편안해지고 입맛이 돌았다.
느긋하게 맛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또 뭔가 구경거리나 없을까· 하던 차에 마침 문경새재 입구 광장에 도자기종합전시관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내가 좋아하는 컵이나 화병이 없을까 하고 들어가 봤다. 다양한 도자기류를 둘러보는 데 "혹시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하는 소리에 흠칫 돌아오니 여기에서도 상냥한 미소를 띠며 여직원이 다정히 다가온다. 그때 두 주먹 크기만 한 화병이 눈에 들어왔다. 연한 자줏빛에 안개 색 같은 하얀빛이 감도는 데 아이비 한 가닥이 옆으로 휘어져 다시 올라오는 모습이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이미 마음으로 이걸 사야겠다 하고 값을 물으니, 오만 원이란다.
비싼 느낌은 아니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할인은 없나요·"하고 툭 던졌더니 그녀는 바로 화병 작가한테 전화를 걸어 깎아줄 수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밝게 웃으며 작가님이 삼만 원에 주신다고 하네요 한다. 세상에 오만 원에 이만 원을 깎아주다니, 값도 값이지만 손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는 직원의 태도에 또 한 번 마음이 밝아지고 기분이 유쾌해졌다. 속으로 다시 또 와야겠다는 마음이 파도처럼 인다.
작은 말 한마디, 작은 마음 씀씀이 하나에 굳었던 얼굴이 펴지고 마음은 행복해진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라도 있는 날은 기분이 좋은 날이다. 나도 평소 남한테 이런 '기분 좋음'을 주자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