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과 채움

2026.03.24 16:31:26

이명순

수필가·한국어강사

이틀 내내 좁은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흙을 만졌다. 진작부터 상토와 화분들을 준비해 두었지만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아 차일피일 미뤘던 일이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자리를 폈다.

지금 우리 집 베란다는 제라늄의 계절이다. 제각각의 자태를 뽐내며 활짝 핀 꽃들이 베란다를 가득 채우고 있다. 사실 수형을 다듬으려면 저 탐스러운 꽃볼들을 따내고 순을 쳐내야 하는데 차마 예쁜 꽃송이를 잘라내기 아까워 분갈이마저 차일피일 미뤄졌다.

3~4년간 애지중지하던 제라늄이었는데 지난여름부터 식태기가 찾아왔다. 딸의 출산으로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졌고 새로 태어난 손주에게 마음을 뺏긴 탓이었을까. 더운 날씨에 축 늘어진 잎사귀처럼 식물에 대한 애정도 시들해졌고 관리는 귀찮은 숙제가 되었다. 주인의 무관심에 제라늄 수형도 제멋대로 엉망이 되어버렸다.

욕심껏 늘려온 화분들은 공간을 좁혔고 물주기 부담도 커졌다. 그렇게 무심한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2월의 따스한 햇살이 비치자 제라늄들은 다시 몽글몽글 꽃볼을 올리기 시작했다. 식물 등을 달지 않아도 저마다 큼직한 꽃을 피워내는 생명력에 결국 나는 매료되고 말았다.

화려한 꽃들이 다시 시작되는 봄, 새롭게 정비를 하기로 했다. 그 첫 번째가 분갈이다. 묵은 흙을 털어 새 흙으로 갈아주고 큰 화분으로 옮겨 심었다. 시든 꽃은 과감히 잘라내고 못생긴 수형은 잘라서 다듬고 잘라 낸 순으로 삽목을 해야 한다.

봄은 삽목의 계절이기도 하다. 본래는 삽목을 해서 개체 수를 늘렸겠지만 올해는 예정된 이사가 발목을 잡았다. 요즘 아파트는 대부분 확장형이라 식물을 둘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에 고민하다가 삽목의 욕심을 접고 구석에서 시들하던 화분들을 과감히 정리하기로 했다.

정리를 끝내고 화분들을 세어보니 얼추 백 개가 훌쩍 넘는다. 처음에는 한 이십 개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꽃에 대한 욕망이 어느새 순수했던 초심을 덮어버렸다. 무엇이든 몰두하다 보면 과해지기 마련이라지만 돌아보니 필요 이상의 집착과 욕심만 쌓여 있었다.

이제는 베란다를 점령한 제라늄을 보며 걱정이 앞선다.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이 많은 것을 싸안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필요한 것만 남기는 무소유가 행복의 조건이라는데 나는 여전히 신상 제라늄과 별꽃 푹죽이 터지는 스텔라 제라늄을 새로 들이고 싶어 검색창을 바라보고 있다.

이사를 가면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우리 베란다를 가득 메운 초록이들을 보니 헛웃음이 난다. 버리지 못한 미련과 비워내지 못한 내 마음의 틈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제는 화분을 줄여가듯 삶의 무게도 조금씩 덜어내 보려 한다. 비움의 홀가분함을 알아가는 것이 올봄 제라늄이 내게 준 깨달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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