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생긴 습관이 있다. 잠들기 전 염주 알을 세는 것이다. 옛날에 잠이 안 올 때 엄마가 처방했던 방법과 비슷한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잠자리에서 핸드폰 볼 때보다는 확실히 잠들기가 쉬워졌다.
지난달에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해인사로 템플스테이를 다녀왔다. 몇 시간 내리 수다를 떨어도 싫증 나지 않고, 한참을 말없이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 중년 이후 이런 친구가 있는 것은 축복이다. 아침 9시쯤 출발해서 정오 전에 해인사 입구에 도착했다. 모 유명 가수의친척이 한다는 식당에서 비빔밥과 더덕구이로 점심을 먹고, 입실 시간까지 시간 반의 여유가 있어 소리길을 걸었다. 계곡을 따라 숲으로 이어진 산책길이었다. 이름처럼 물소리 바람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와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첫 일정은 사찰 둘러보기였다. 국보 제32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은 듣던 대로 놀라웠다. 지금 인쇄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대장경판에 새겨진 글자가 잘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800년 넘도록 이렇게 온전할 수 있는 것은 지형 및 기후를 고려한 전각 배치와 과학적인 살창 설계, 습도를 조절할 수 있게 만든 바닥 덕분이라고 했다. 또 전란과 같은 큰 위기가 있을 때마다 많은 사람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에 보물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귀중한 유산을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절로 숙연해졌다.
저녁 공양 후에는 선림원에서 '108배 염주 만들기'를 했다. 무릎 관절이 안 좋은 내가 과연 108배를 할 수 있을까. 힘들면 염주만 만들어도 된다고 했지만, 이왕이면 제대로 해내고 싶었다. 죽비가 울리면 절을 하고 구슬을 한 알씩 실에 꿰었다. 처음에는 박자에 맞춰 잘하고 있는지 신경이 쓰여 정신이 산만했으나 차츰 몸동작이 자연스러워지면서 구슬 꿰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염주를 완성하고 보니 어느덧 108배도 끝나 있었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해냈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 사이 밖에는 펑펑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신발 속까지 쌓인 눈을 털어 신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한발 한발 걸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해인사의 첫눈입니다!" 스님의 한마디에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들떴다. 눈은 사람의 마음을 순식간에 순수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여고 졸업식 날, 친구들과 매년 첫눈 오는 날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었다. 그때 우리는 모두의 첫눈이 같은 날 내린다는 무모한 전제를 어떻게 의심 없이 믿었을까. 아마도 눈 때문이었으리라. 눈이 가진 강력한 순수성을 믿었을 터였다.
새벽 3시. 서둘러 나와 보니 눈은 그쳤고 전각의 처마 위로 손톱달이 떠 있었다. 올려다본 하늘엔 북두칠성이 선명했고 산사의 밤공기는 더없이 청명했다. 하지만 지난밤의 들뜬 흔적들은 내린 눈으로 이미 하얗게 덮였다. 스님들이 빗자루로 쓸어냈던 언덕길도,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지나갔던 운동장도 똑같이 하얗다. 그러나 공평하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자칫 위험한 돌부리까지 덮여 감춰지기 때문이다. 법당으로 가는 발걸음을 조심해야 했던 이유다. 새벽예불을 마쳤을 때 몇몇 길은 벌써 스님들이 눈을 치우고 계셨다. 스님들에게는 머릿속 번뇌처럼 치워도 치워도 자꾸 쌓이는 눈을 매번 처음처럼 쓸어내는 일도 하나의 수행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해인사에서 만난 두 번째 첫눈은, 처음 마음을 찾으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었을까. 염주 알이야 세다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세면 된다지만, 살다가 공평함으로 감춰진 돌부리에 걸려 삶이 흔들릴 때마다 매번 나는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 가슴에 내린 첫눈이 금방 녹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