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붉고 뜨겁다고 생각한 적 있다. 흐르는 강물과 일하는 사람들 몸에서, 대지를 박차고 거침없이 달려가는 말의 근육에서 끊임없이 붉은 기운을 뿜어내기 때문이다. 겨울은 잠시 쉬어가는 계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동적인 힘을 발휘해, 끊임없는 에너지를 만든다. 깊은 땅속에서 새로운 봄을 밀어 올리는 겨울은 우리에게 큰 희망이다.
동해 바다 아침 일출이 붉고/남해 통영 사량도 동백이 붉다/황매산 저녁노을이 타는 듯/겨울 바닷바람 앞에 선 여인의 입술이/종종걸음으로 학교 앞 건널목 건너는/여고생들 종아리가 붉다
어시장 좌판 위에 누운 생선 아가미가/추위 녹이는 새벽 시장 사람들 손이/빙판에 넘어져 우는 아이 두 볼이 붉다/벼랑에 선 정취암의 저녁 예불 소리/촛불에 비친 문살의 연화문 창호지가/수능 기도 올리는 어머니 무릎이 붉다
남해동백꽃.
ⓒ양선규
하루 일 마치고 쏟아져 나온 퇴근 길/사람들 붐비는 사거리 조명등이 붉고/어지럽게 돌아가는 네온사인 불빛이/안주로 올라온 숯불에 익는 붉은 살,/늦은 밤 거나하게 취해 귀가하는 사람들/신호등 기다리는 사람들 얼굴이 붉다
하얀 겨울 우리가 걸어온 길 걸어가는 길/살아온 날이 붉고 살아갈 날이 붉다 2025년 계간《시에》봄호,『양선규 시(우리가 걸어가는 길)』전문
깊은 겨울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에서 울음 소리가 난다.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바다에서는 밀물과 썰물 끝없이 오가고, 한 겨울 사람들의 분주한 출근길, 손등이 붉고, 콧잔등이 붉다. 그렇게 겨울은 웅크리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우렁찬 새 생명을 무럭무럭 몸 안에서 키우고 있다.
설중사우(雪中四友)란 엄동설한(嚴冬雪寒)에도 굴하지 않고 피어나는 네 가지 꽃을 말한다. 그 꽃은 납매(臘梅), 옥매(玉梅), 동백꽃, 수선(水仙)을 뜻하는데, 그중 동백은 한 겨울에도 붉은 꽃을 피워 마음 훈훈하게 하며 볼 때마다 겨울의 역동성을 실감 나게 해준다.
"삼여(三餘)란 여가(餘暇)로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때를 말한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舒) 왕숙전(王肅傳)의 주(註)에 보이는 것처럼 한 해의 여가인 겨울과 하루의 여가인 밤, 그리고 시(時)의 여가인 비 오는 때를 말한다." 눈 내리는 겨울밤은 책 읽기에 좋다. 마음의 양식을 차곡차곡 채우고 새로운 봄을 준비하는 겨울은 여백이 많아, 여유롭고, 새로운 것을 구상하기에 좋고 작품을 제작한다거나 명상하기에 참 좋은 계절이다.
이제 겨울은 소한(小寒)을 넘어 대한(大寒)으로 가고 있다. 눈이 많이 내리고 날씨가 가장 추운 절기다. 겨울은 그냥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땅속에서도 나무의 뿌리에 새 생명이 움트고 대지는 무럭무럭 새 생명을 키우고 있다.
2026년 말의 해 병오년(丙午年)은 육십 갑자의 43번째로 붉은색과 불의 기운을 지닌 '병(丙)'과 말을 상징하는 '오(午)'가 만나 '붉은 말의 해'라 부른다. 말발굽 소리 내며 힘차게 달려가는 적토마(赤·馬)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새해의 기운을 받아, 모든 사람들이 멋진 꿈을 펼치는 가슴 두근거리는 뜨거운 붉은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