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이순신 장군 순국일이다. 1598년 11월 19일(음력) 노량해전에서 왜적과 싸우다 최후를 맞았다. 우리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이순신 장군의 순국일에 장군의 생애를 돌아보게 된다.
***수군폐지 주장 막아 전란 극복
이순신 장군을 불세출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이유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단 한 번의 전투도 패하지 않은 연전연승의 신화 때문만은 아니다. 장군의 일생은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는 극적인 반전의 연속이었다. 상상력이 아무리 뛰어난 작가가 창작물을 집필하더라도 이순신 장군의 인생 역정처럼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긴 힘들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객관적 여건에서도 정확한 현실인식과 그에 필요한 대처방안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위기상황을 기적적으로 돌파해 나갔다. 이순신 장군은 수군을 폐지하려는 조정에 반대하는 건의를 통해 수군을 존속시킨 사례가 두 번 있었다. 당시에 조정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면 조선이 일본에 넘어가는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하나는,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탁상공론에 빠진 조정 신료들이 일본은 4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 오랑캐이므로 육전보다 수전에 강할 것이라 오판했다. 육지 방비에 전력하기 위해 수군을 없애고 영남과 호남의 큰 고을 성들을 증축하고 보수하도록 명령했다. 이순신 장군이 장계하기를 "바다로 오는 적을 막는 데는 수군만한 것이 없으니 수군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고 주장하여 수군을 유지했다.
조선 침략의 총지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시기 일본 수군이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과 벌이는 전투마다 모조리 패배하자 조선 수군과 전투를 벌이지 말고 피하라는 명을 하달했다.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조선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해 일본군의 병참선을 끊었다. 전국시대 100년 전쟁을 거치며 성을 공격하는 공성전과 백병전에 능수능란한 사무라이 집단이 거침없이 한양 도성은 물론 함경도까지 진격했지만 명나라의 참전과 조선 의병의 활동으로 타격을 입고 해상을 통한 병참보급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전쟁의 판도가 바뀐 것이다.
두 번째는,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고 사형 직전 풀려나 백의종군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는 교서를 받고 나서다. 2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조선함대가 1597년 7월 16일 거제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의 기습공격으로 궤멸 당하자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3대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했다.
이순신 장군은 곧바로 수군재건에 나섰으나 조정에서는 수군이 약하여 적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니 수군을 폐지하고 육지에서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 장군이 보성 열선루에서 "임진왜란 동안에 적이 감히 충청·전라를 바로 찌르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그 길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수군을 폐지한다면 적이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갈 것입니다"라며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고, 신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이순신 장군의 초인적 전략으로 명량대첩을 거두고 왜적의 수륙병진전략을 꺾어 정유재란 당시 천안까지 복상했던 일본군이 남하할 수 밖에 없었다.
***죽이려 한 나라에 바친 목숨
조선을 침략한 왜군과 전쟁을 치르는 장군에게 임금과 조정은 지원은커녕 죽이려 했고, 장군은 당신을 기필코 죽이고야 말겠다던 임금과 나라를 위해 마지막까지 결전을 벌이다 목숨을 바쳤다. 나라가 혼란스러우매 이순신 장군을 더욱 추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