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옷 한 벌

2026.01.04 14:59:01

이은일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안방 욕실 문 앞에는 손뜨개 발 매트가 있다. 오래전에 지인이 집들이 선물로 준 것이다. 십 년이 넘었지만 빨아도 변함이 없다.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무늬를 따라가다 보면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매트를 떴을 사모님의 단아한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손뜨개질로 만든 것은 공들인 만큼 그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좋다.

나도 첫 손주 백일 날 손뜨개질로 곰 인형을 만들어서 선물하기로 했다. 유튜브를 0.7배속으로 틀어놓고 보면서 따라 떴다. 한코 한코 세어가며 늘리고, 줄이고, 털실 색도 바꿀 때마다 복잡한 과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동영상을 멈춰야 했다. 그런데도 서너 번쯤 풀었다가 다시 뜬 것 같다. 머리와 몸통, 팔다리와 꼬리를 각각 따로 떠서 각각에 솜을 넣었고, 귀는 솜 없이 반을 접어 머리 위쪽 양옆에 붙였다. 하나하나 위치를 찾아 붙이고 백일이라 돗바늘로 가슴에 '100'이라고 수놓았다. 자세히 보면 한쪽 발이 살짝 크지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여운 곰 인형이 완성됐다. 훗날 손주가 이 정성을 알아줄까 기대하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스쳤다. 뜨개질하는 동안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가. 사실 선물은 내가 받은 것이다.

엄마도 그랬을까. 내가 어렸을 적에 겨울이면 엄마는 털실로 옷을 떠 주셨다. 그 시절엔 지금처럼 실이 좋지 않았던지, 신축성이 없어서 입고 벗을 때마다 귀가 빨개지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나는 알록달록하고 따뜻한 그 옷이 맘에 들었다. 아마도 엄마의 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엄마가 늘 새 실만 사용했던 건 아니다. 작아지거나 닳아 얇아진 옷들을 풀어서 몸에 맞게 다시 떠 줄 때가 더 많았다. 옷을 풀 때 엄마는 나에게 옷을 잡고 있으라고 하고는 실 끝을 찾아 매듭을 풀고 잡아당겼다. 그러면 두두두두 소리를 내며 손쉽게 풀려나갔다. 먼지를 날리며 풀려나온 실은 갓 파마한 머리처럼 꼬불거렸고, 엄마는 그 실을 감아 동그랗게 뭉치를 만들었다. 내 손에 쥔 옷은 점점 작아지고 엄마의 실뭉치는 점점 커졌다. 옷 한 벌에서 나온 실이 그렇게 길다는 사실과 단 한 가닥의 실로 이어져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엄마가 주전자 뚜껑의 꼭지를 빼고 그 구멍으로 실 끝을 통과시킨 뒤 주전자 안에서 주둥이 밖으로 실을 빼놓았다. 그런 다음 주전자에 물을 담아 화로에 올리고, 물이 끓기 시작하면 주둥이의 실을 천천히 잡아당기며 감았다. 뚜껑으로 들어갈 땐 라면처럼 꼬불꼬불했던 실이 주둥이로 나올 땐 마법처럼 곧게 펴졌다. 뜨거운 김이 실을 펴준 것인데 어린 나는 그것이 마냥 신기했다. 그렇게 주전자를 통과한 실은 다시 감겨서 이전보다 훨씬 크고 풍성한 실뭉치로 변했고, 엄마는 그것으로 새 실인 양 다시 옷을 짰다.

손뜨개질로 옷감을 짜 나가듯 어쩌면 우리도 자신만의 무늬를 만들며 인생을 짜 나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 뜨개질은 어떤가. 돌아보면 흡족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실을 바짝 잡아당겨서 햇빛도 새지 않을 만큼 빡빡한 구간도 있고, 더러는 너무 성글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부분도 보인다. 하지만 인생은 손뜨개질과는 달라서 과거에 잘못 짰더라도 풀고 반듯하게 편 뒤 다시 짤 수는 없다. 다만 남은 삶을 원하는 대로 짜 나갈 수 있을 뿐이다.

육십갑자를 돌아온 지금, 내게 남은 실뭉치는 얼마나 될까. 코를 늘이고 줄여서 무늬 하나를 완성할 수 있을 만큼은 될까. 화려하고 큰 무늬는 욕심일 것이다. 기본 뜨기로 한코 한코 정성스럽게 짜 나가면 소소하게 나만의 무늬를 만들 수 있을 테고, 그것으로 내게 어울리는 마지막 옷 한 벌은 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한평생 한 가닥 삶의 끈을 엮어 옷감을 짜고, 옷 한 벌 지어 입고 먼 여행을 떠나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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