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

2025.12.29 14:10:00

장현두

시인·괴산문인협회장

창밖 솔잎 위에 서리꽃이 하얗게 피었다. 사그라든 장미꽃잎에도 영산홍 꽃잎에도 피었다. 서리꽃은 해가 떠오르면 이내 사라지는 초겨울 이른 아침에나 만나는 귀한 손님이다. 서리가 내려앉아 눈처럼 빛나는 솔잎 가운데 솔순이 오롯이 아침 햇살을 받고 있다. 서리꽃의 축복 속에 내년을 예비하는 희망이 살아있는 것이다.

또 한 해가 저문다. 어떻게 달려왔는지 가물가물한 기억뿐이다. 봄, 여름, 가을 내내 소나무는 이 솔순 하나 만들기 위해 그렇게 꼿꼿하게 살았나 보다. 나는 무엇 하나 남기려고 달려왔을까. 돌아보면 허허벌판에 휑한 가슴만 드러나지만 그래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솔순 같은 알갱이를 거두어 한해의 매듭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식물 중에 매듭을 잘 지어가는 것으로 대나무를 빼놓을 수 없다. 대나무는 마디와 마디로 하나의 매듭을 확실히 만들고 아주 단단하게 만든 그 마디를 밑천으로 다음 마디를 만들어 키를 쑥쑥 키워 나간다. 마디와 마디 사이를 텅텅 비워 놓아도 마디가 단단해서 휠지언정 절대 꺾이지 않는다. 유교를 신봉하는 선비들은 대나무의 이런 '곧음'과 '비움'을 높이 사서 절개와 지조, 겸손과 수용의 상징으로 여겨 사군자의 하나로 사랑하였다. 소나무는 대나무 같은 마디가 아니라 열매로 매듭을 짓는다. 전 해 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다음 해에 피울 꽃눈을 미리 만들어 놓고 이듬해 봄에 꽃을 피워 꽃가루받이한 후 다음 해 봄~여름쯤 수정이 일어나 솔방울을 만들고 키워 그해 가을~겨울에 솔씨란 씨앗을 만들어 바람에 날려 보낸다. 이는 거의 2년이나 걸리는 매듭이다.

풀이나 나무나 사람이나 아마 모든 생명체는 다 나름의 매듭을 지으며 살아간다. 그 매듭의 최종 완성은 물론 생명의 끝이 되겠지만 각기 다른 삶의 여정 속에서 어느 구획되는 단계에는 하나의 매듭이 일어난다. 사람 사는 매듭은 하루, 한 주, 한 달, 일 년이 될 것이나 그중에서 일 년의 매듭은 의미가 상당히 크다. 일 년의 마지막 달인 12월은 한 해를 돌아 보고 결산함으로써 내년을 또 준비하는 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여러 복잡다단한 인간관계와 사회적인 관계에 얽혀 살 수밖에 없어 대나무 같은 곧음과 비움의 매듭이라거나 솔방울을 만드는 소나무 같은 느긋한 매듭을 짓기가 쉽지 않다. 올해 나는 문학단체의 장과 인문 강의로 한 해를 달려왔으나 그 '관계'의 올가미 같은 망에 걸려 몸과 마음이 많이도 힘들었다. 모두가 내 마음 같지 않았고 사소한 일로 마음의 벽을 쌓거나 순수한 뜻을 자의적인 왜곡을 통해 전파하는 등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기도 했다. 관계에 미숙한 성격 내지는 행동양식 때문이라 생각하지만 한번 받은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런 상처에 매여 마냥 오그라들 수만은 없지 않은가. 아픔 속에서도 길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절망에 빠질 수 있다. 마디마디 단단하게 매듭을 지어나가며 튼튼한 뿌리를 바탕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대나무 같은 매듭이면 너무 좋을 것이다. 아니면 조금 더디더라도 소나무처럼 찬찬히 내실 있게 매듭을 지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예정한 목표를 향해 욕심부리지 않고 차근차근 나아가는 모습은 내가 닮고 싶은 모델이다.

이 아침에 솔잎에 피는 하얀 서리꽃, 그 모습 그대로 짧은 하나의 아름다운 매듭으로 다가온다. 길든 짧든, 어렵든 쉽든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매듭은 확실하게 지어야 한다. 올해 나의 매듭은 정리할 틈 없이 달려온 탓인지 뭔가 뚜렷한 매듭이 아쉬웠다. 새해에는 나도 대나무나 소나무처럼 확실한 '매듭을 짓는 사람'이 되고자 다짐해 본다.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