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가 말한 좌치, 앉아 있지만 달리는 이 기묘한 역설은 사실 인간 의식이 매일 반복하는 원초적 장면이다. 우리는 쉼 없이 멈추어 있으면서 동시에 달리고, 달리면서도 멈춘다. 이러한 모순을 현전 불가능성이라 한다. 이는 어떤 대상이나 개념이 완벽하게 현재에, 그리고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현전)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지금, 여기 있는 감각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묶여 있지만, 의미는 지평선 너머로 미끄러져 간다. 어떤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시간은 늘어지고, 늘어진 시간을 붙잡으려는 마음은 다시 어딘가로 흩어진다. 주체는 사실상 현전하지 않는다.
주관적 시간 인플레이션(주관적 팽창)은 좌치 구조와 닮았다. 주관적 팽창은 주로 시각적 지각 및 의식 연구에서 사용되는 개념으로 주의를 덜 기울이거나 주변 시야에 있는 자극(정보)을 평가할 때, 실제 객관적인 수행 능력에 비해 주관적으로 정보 신뢰성이나 질을 과대평가하는 현상을 말한다.
사람들은 시야 전체에 걸쳐 풍부하고 자세한 정보를 의식적으로 지각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인지적 접근이 제한된 상태에서도 정보에 대한 품질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시각적 경험이 실제보다 더 풍부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팽창'된 주관적 인상으로 설명된다.
즉, 실제 시간은 흐르지 않는데, 뇌는 마치 급박한 생존 상황에 놓인 것처럼 예측·불안·주의를 과도하게 가동하게 된다. 신경계는 "해야 할 일이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오히려 더 많은 일을 만들어 낸다. 스마트폰을 켜고, 창밖을 내다보고, 메시지를 확인하는 행동은 무의미하지만 뇌는 스스로 속이며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갖게 한다.
또한 좌치는 욕망 구조를 드러낸다. 욕망은 대상에 앞서 달린다. 아직 오지 않은 합격 통지, 아직 오지 않은 사랑한다는 메시지, 아직 오지 않은 내일, 따라서 "욕망은 도착하지 않는 운동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기다림이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운 이유이다. 대상은 현실 시간 속에 있지만 욕망은 상징계 어딘가에서 이미 다음 장면으로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앉아 있는데 욕망은 달리고 있는 어긋남이 좌치 구조이다.
그러나 장자는 조급함에 대한 회로를 멈추기 위해 역설을 제시한다. 그것은 坐忘(앉아서 잊는 법)이다. 마음을 비우고 모든 집착과 분별을 내려놓아 자연과 하나 되는 것으로 단순한 무위가 아니다. 선택한 방향을 외부로 돌리지 않고 내부에 흐르는 흐름을 그대로 두는 상태, 즉 메타인지 기반 '탈중심화'에 가깝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 무엇을 지켜야 한다는 윤리, 무엇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을 모두 해체하고, 지금 여기 무력함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태도이다.
시 창작도 마찬가지이다. 시가 길어내는 깊이는 언어를 끌고 가는 힘이 아니라 언어를 놓아주는 순간 일어난다. 말이 덜어지고 침묵이 여백을 만들어 낼 때 비로소 이미지가 드러나듯, 좌망은 인간이 스스로 과도하게 걸어둔 의미에 대한 짐을 벗고 난 뒤에야 비로소 도래하는 투명한 경계가 좌망이다.
멈춤은 패배가 아니라 방향을 되찾는 시간이다. 좌망하는 시간은 무의미하지 않다. 그것은 경계를 다시 그리는 순간이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가르는 선이 다시 조용히 그려지고, 억지로 줄여놓았던 한계에 대한 폭이 원래 자리로 회복된다. 좌망은 항복이 아니라 회복이다.
앉아 있으되 달리지 않는 법. 기다리되 조급해하지 않는 법. 멈추고 있는 자신을 그냥 두는 것.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 비로소 앞으로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것. 때문에 좌망은 필요한 것이라 생각에 잠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