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2025.11.20 14:44:06

남호순

시인·배바우도서관장

아침 들녘에 서리가 얇은 칼날처럼 내려앉자, 밭의 배추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숙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속살을 숨기지 못하던 푸른 잎들이 이제는 서리를 견디듯 서로를 덮어 안는다. 그 미세한 흔들림 사이로 김장을 앞두고 서두르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서늘하게 스며든다. 배추는 가을 끝자락에서 그렇게 자신을 조금씩 여물게 한다.

어릴 적 집 뒤에도 배추밭이 있었다. 여름 끝무렵 아버지가 흙을 들춰 고랑을 만들면 어머니는 모종을 하나씩 심었다. 나는 작은 주전자를 들고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물을 뿌렸다. 갓 심긴 모종 위로 햇살이 기웃거리듯 내려앉아 잎맥을 금빛으로 적시던 순간들이 있다. 그 빛은 어린 날의 내 눈에도 묵묵한 소망처럼 보였다.

비가 오면 흙 냄새가 배추 잎의 안개와 섞였고 햇살이 뜨거우면 잎마다 푸른 기운이 되살아났다. 배추는 정직한 식물이었다. 물을 주면 물만큼 빛을 받으면 빛만큼 자랐다. 한순간이라도 마음을 놓으면 잎이 주저앉았고 욕심을 내면 금세 벌레가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머니는 배추를 대할 때 늘 숨을 고르는 사람 같았다. 한 잎 한 잎 벌려 벌레를 떼고, 흙을 털고 쓰다듬듯 살폈다. 그 손길을 보고 있으면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길러야 한다는 걸, 어린 나는 어렴풋이 배웠다. 배추를 다듬을 때면 노란 속살을 얻어먹으려 형제들이 몰려들었다. 그 고갱이의 따듯함은 손끝보다 먼저 혀에 닿아 잠시 세상을 부드럽게 만들곤 했다.

김장철이 되면 집안은 한 해의 마지막 의식을 치르듯 분주해졌다. 뽑아 온 배추를 포개 쌓으면 잎 사이로 스며 단내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어머니는 소금물에 배추를 절이며 말했다. "올해는 속이 꽉 찼네." 그 말엔 농사의 성적표가 아닌 버텨낸 시간의 무게가 들어 있었다. 절인 잎을 만지면 짠 기운이 손목까지 스며들었고 그 순간만큼은 겨울의 첫 기척이 내 작은 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지금 나는 시골에 살고 있지만 마트에서 사 오는 배추들은 모양도 반듯하고 흙 한 톨 묻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한 숨소리가 없다. 서리도, 흙도, 손길도 사라진 자리엔 비닐 포장지의 차가운 감촉만 남는다. 편리함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삶에서 손때가 빠져나가는 대가로 얻는 깔끔함.

하지만 겨울 문턱에 서면 문득 어머니가 담그던 김치 냄새가 떠오른다. 고춧가루와 마늘과 새우젓 냄새가 부딪히며 만들어내던 뜨거운 발효의 시간. 양념이 어머니 손등에 스며들고 김치통이 한 켠씩 채워지던 풍경은 지금도 나를 잠시 멈추게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음식의 향이 아니라 가족이 겨울을 견디기 위해 서로의 등을 떠밀던 온기였다.

배추는 늘 땅을 향해 자란다. 바람을 견디기 위해 잎을 겹겹이 여미고 속살을 감추고 서리를 향해 몸을 낮춘다. 겉으론 단단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순한 빛이 있다. 사람도 그런 때가 있지 않을까. 너무 쉽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중심을 조용히 여물게 해야 하는 늦가을이 그렇다.

텃밭에 배추 몇 포기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새벽이면 찬 기운이 잎을 훑고 지나가는데 그때마다 어머니의 배추밭이 떠오른다. 서리의 흰 기온 햇살이 이랑 위에서 튕겨 오르던 순간, 순간들 소리 없이 자라던 속살의 힘. 배추는 여전히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뿌리를 묵묵히 깊게 내리며. 나는 오늘 배추 앞에서 나비처럼 마음을 가만히 모아본다. 여문다는 의미를 조용한 잎이 먼저 알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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