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공정한 출발선'으로 인식돼야 할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영어영역 듣기평가로 '운(運)에 맡기는 시험'으로 전락했다.
2026학년도 수능이 치러진 지난 13일 수능 시험장인 청주 서원고등학교의 한 시험실에서 영어 듣기평가 방송이 스피커 문제로 음성이 나오지 않는 사고가 발생했다.
영어영역은 오후 1시 10분 타종 없이 듣기평가 안내 방송에 의해 시작되는데 무슨 일인지 서원고의 한 시험실 스피커는 먹통이었다.
시험실에 있던 감독관이 상황을 인지해 복도에 있는 감독관에게 문제가 있다고 알렸고 곧바로 시험본부에 전달됐다. 매뉴얼에 따라 CD플레이어가 시험실로 전달, 듣기평가 문제가 1번부터 재생됐으나 이미 4분가량이 지난 뒤였다.
해당 시험실에 있던 수험생 28명은 다른 시험실 수험생보다 지체된 시간만큼 추가 시간 4분이 주어졌지만 갑작스러운 돌발상황에 매우 혼란스러웠던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가 발생한시험실에 있던 수험생의 아버지 A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CD플레이어가 재생됐지만 다른 시험실 스피커 소리가 겹치면서 아이가 제대로 집중하기 어려웠다고 한다"며 "듣기평가부터 멘붕이 와서 시험을 망쳤다고 매우 속상해했다"고 말했다.
A씨는 단체 소송 등 공동 대응까지 고려하고 있다.
A씨는 "아이가 3년간 준비한 시험이 스피커 하나로 망가졌다"며 "해당 시험실에 있던 수험생이나 학부모들과 함께 소송까지 갈 생각"이라고 분개했다.
충북도교육청 관계자는 "상황을 파악한 결과 CD플레이어를 통한 재생, 추가 시간 제공 등 교육부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매뉴얼대로 감독관들이 대처한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또한 "해당 시험실은 사전 점검에서 문제가 없었고 3학년 교실이어서 모의고사 등이 여러 시험이 실시됐을 때도 문제가 없었던 곳으로 안다"며 "다시 한번 살펴보겠다"고 전했다.
수능에서 영어 듣기평가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수험생들이 피해를 보거나 이의제기가 접수되는 것은 사실 수능 때마다 반복되고 있지만 보상이나 피해 구제로 이어지는 경우는 없다시피했다.
실제 지난 2022년 11월 17일 실시된 수능에서는 전남 화순군의 한 시험장에서 방송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영어 듣기평가가 40여 분 지연됐다.
듣기평가는 오후 1시 53분에서야 실시됐는데 그 전까지 수험생들은 영어 독해 문제를 먼저 풀었다.
이 일로 해당 시험장 수험생 487명 중 16명은 2023년 3월 "응시생들에게 혼란을 초래하고 시험에 영향을 끼쳤다"며 국가를 상대로 1명당 1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2024년 6월 19일 "방송사고가 발생하자 준비된 지침에 따라 대처 방안에 관해 신속하게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져 수행됐으므로 공무원들이 주의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2023학년도 수능에서는 "듣기평가에 잡음이 섞여 있다", "목소리가 작게 들리는 등 소리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등 음질 불량문제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215건의 이의 신청이 접수되기도 했다.
영어 듣기평가 시간에는 항공기 이착륙 전면 중단 등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기도 한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올해 수능에서 영어 듣기평가 전·후 5분을 포함해 13일 오후 1시 5분부터 1시 40분까지 35분간 전국 공항의 항공기 이·착륙이 전면 중단됐다. 비행 중인 항공기는 3㎞ 이상 상공에서 대기했다.
이번 조치로 국제선 65편, 국내선 75편 등 140편의 운항시간이 조정된 것으로 파악됐다. 전국에서 항공기 이·착륙이 동시에 통제되는 날은 수능이 유일하다.
상황이 이렇자 2014학년도 수능부터 국어 듣기평가가 폐지된 것처럼 영어 듣기평가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임태희 경기교육감은 대입개혁안의 하나로 "내년(2027학년도) 수능부터 3교시 영어 듣기평가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14일 기자간담회에서 "수능 현장을 돌아보니 시험 감독관, 교사 등이 이구동성으로 영어 듣기평가의 문제를 얘기했다"며 "오는 20일 열리는 105회 시·도교육감협의회 총회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한 뒤 교육부, 국가교육위원회와 협의해 조속한 폐지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 안혜주기자 asj1322@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