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화단의 이단아이며 파계승으로, 정작 작품세계보다 기인적 삶이 더 큰 관심을 끌었던 화가가 있다. 이 작가는 '귀천'이라는 시로 유명한 천진난만한 시인 천상병(1930~1993), 미스 춘천 아가씨와 결혼하고 폭음과 몸을 잘 씻지 않는다고 알려진 소설가 이외수(1946~2022)와 함께 3대 기인으로 불리고 있는 중광(重光, 1934~2002) 스님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인(奇人)은 성품이나 언행이 남달리 특이한 사람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매월당 김시습(1435~1493), 북창 정렴(1506~1549), 토정 이지함(1517~1578)이 그 당시 3대 기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현대판 3대 기인은 젊잖게 말해서 '기인'이지 많은 사람들이 '머리가 돌은 아이(또라이)'로 기억하고 있다.
중광은 승려, 시인, 수필가, 화가 그리고 배우로 활동한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이런 재주에 기이한 복장과 기행을 일삼았으니 유명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승려가 되기 전 그의 이름은 고창률(高昌律)이다.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3세 때 가족과 함께 제주도에 정착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제주고등농림학교(현 제주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집안이 너무 가난해 2학년 때 중퇴하고 만다.
평소 행동거지에 어울리지 않게 절도를 중요시하는 귀신 잡는 해병대에서 복무했고, 30살때 통도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한다. 자신의 제사를 지내기도 하며 음주와 담배를 즐기면서도 승복과 삭발을 고집하며 평생을 지냈다. 미국 대학에서 강연하던 중 여학생에게 기습 키스를 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신문 지상에 쓰지 못할 여러 기행으로 결국 1979년 조계종으로부터 승적을 박탈당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승복과 삭발을 계속하고 다니는 바람에 승적이 박탈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에게 승적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90년대 작품 전시회와 관련해 인사동을 자주 갔었는데 그곳에서 중광을 본 적이 있다. 대화는 나누지 않았지만, 빵집에 특이한 복장으로 앉아 있는 중광을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중광은 항상 빵떡 모자에 누더기 옷을 걸치고 다녔는데 이러한 모습 때문에 그는 걸레스님이라고 불렸다. 단순히 기행만 놓고 보자면 정신 나간 사람(또라이)이 아닌가 생각이 들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세제 CF를 찍고 받은 5천만 원을 모두 지인의 치료비로 내놓았고, 2000년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었던 작품 전시회의 수익금도 불우한 이웃들에게 통 크게 기부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집에 찾아온 사람을 절대로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아끼는 그림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낌없이 줬다고도 한다.
그의 화풍을 모방한 가짜 그림들이 시중에 돌아다니자 자신의 돈으로 위작들을 사들여 태워버리기도 했고, 아예 가짜 그림을 자신이 직접 그린 진짜 그림으로 바꿔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평생 동안 그린 그림은 대략 300여점으로 추정되는데, 그 수보다 훨씬 많은 가짜 그림들이 현재도 유통되고 있다.
중광은 선화(禪畵)를 일필휘지로 그리는 달인이었다. 빠르면 5초, 또는 1분, 오래 걸릴 때는 3년까지도 걸렸으며, 휘갈린 듯 낙서한 듯 마치 도인처럼 그림을 그려냈다. 중광의 작품 속 화면은 동심과 어머니와 같은 메시지가 중첩돼 나타난다. 또 달마대사나 학을 그린 그림에서 보이는 단 한 번의 붓 터치나 아크릴물감이 범벅이 된 그림,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들은 추상, 구상, 서예, 그리고 조각의 세계를 경계 없이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1980년대에는 닭을 많이 그렸는데 운보 김기창(1913~2001)은 이를 보고 '상상력이 나보다 한 수 위'라며 격찬하기도 했다.
1979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의 한 교수가 'The Mad Monk'라는 책을 내면서 '한국의 피카소'로 그를 소개했다. 1981년 미국 화랑에서 중광 초대전을 개최하고, 일본 NHK를 비롯한 세계 유명 미디어에서 중광의 예술 세계가 방송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가 쓴 소설 '허튼소리'는 1986년 김수용 감독이 영화로 만들고 연극으로도 공연되는데, 아시아 영화제에서 한국 우수 영화로 선정됐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에서는 그에게 최우수 예술인상을 수여한다. 1990년 영화 '청송으로 가는 길'에 주연으로 열연해서 대종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까지 했다.
천상병과 이외수는 죽을 때까지 술과 담배를 버리지 못하나, 중광은 치매와 조울증으로 건강이 나빠지자 술과 담배를 과감히 끊고 백담사와 구룡사 등에서 요양한다. 60세 중반에는 곤지암에 있는 '벙어리 절간'이라 이름 붙인 동굴에서 보내다 2002년 68세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서울 은평구 한옥마을에 '셋이서 문학관'이라는 3대 기인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천상병의 방에는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라는 그의 시구가 쓰여 있고, 이외수의 방에는 '쓰는 이의 고통이 읽는 이의 행복이 될 때까지'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중광의 방에는 인상을 쓰고 있는 사진 옆에 '괜히 왔다 간다'는 글귀가 쓰여 있다.
영혼이 자유로운 영원한 자유인으로 이승에서 살았던 중광은 저승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