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답게 주말마다 행사 일정이 잡혀 있다. 바야흐로 말도 살이 찐다는 쾌청하고 풍요로운 계절이다. 지인의 아들 결혼식 참석차 서울에 온 김에 손자가 보고 싶어 딸네 집으로 향한다.
잘 웃어서 예쁜 손자는 할머니를 보자 역시 활짝 웃어준다. 뭐든지 잘 먹는다더니 키도 꽤 자란 것 같다. 나는 육아에 지친 딸네 부부를 잠시 쉬게 해준다는 핑계로 손주를 독차지하기로 한다. 손 흔들며 외출하는 엄마 아빠를 보면서도 방긋방긋 웃는다. 엄마를 아는 것 같은데 낯가림이 없어 신통하다. 분유를 먹고 트림을 안 해서 애먹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놀이방 안을 누비며 혼자서도 잘 논다. 반응을 보려고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살짝 숨기니 기웃거리며 찾는다. 귀엽다.
모든 것이 예쁘기만 하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눈망울, 포동포동한 손과 발, 모공 하나 없는 매끄러운 피부, 꾸밈없이 터져 나오는 미소와 별 뜻 없이 내는 소리까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일까? 천사 같다. 아기의 모든 언행은 거짓이 없다. 몸과 마음에서 계산 없이 저절로 우러나오기 때문에 보는 어른들도 계산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성선설(性善說)이 더 설득력이 있을 듯싶다. 그런데 이 순수함은 왜, 언제부터 퇴색하는 걸까. 열심히 광합성을 할 때는 온통 초록 잎이듯, 젊은 날에는 왕성한 삶의 흔적에 덮여 순순함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앞니가 나고 눈과 손의 협응이 이루어지면서부터는 뭐든지 입에 넣으려고 할 때다. 우리 손자도 10개월 차라서 안전한 장난감뿐만 아니라 물티슈, 기저귀 같은 안 좋은 것들도 입으로 가져간다. 호시탐탐 내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노리는 바람에 다른 장난감으로 주의를 돌려주느라 바쁘다. 이 아이도 언젠가 '미운 일곱 살'이 되겠지. 고집이 세져서 제 엄마를 힘들게 할지도 몰라. 그렇게 세상 속으로 나아가 갖가지 색들로 자신을 채워가며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이태 전에 글동무에게 우리 집에서 키우던 몬스테라를 물꽂이해서 분양해 준 적이 있다. 화분에 옮겨 심었더니 잘 자란다며 좋아했다. 나중에 사진을 보여줬는데 우리 몬스테라보다도 잎이 크고 무성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이제 너무 커져서 감당이 안 된다며 푸념했다. 뿌리를 자꾸 화분 밖으로 뻗치고 잎도 제멋대로 뻗어나가니 형태가 흐트러져 예쁘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식물도 동물도 사람도 어렸을 때가 제일 예쁜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소리 듣기를 좋아하는 손자에게 커튼이며 벽이며 여러 가지 물건을 손가락으로 긁어 다양한 소리를 들려준다. 동그란 눈에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는 모습이 제법 진지하다. 청각이 특히 민감한 듯싶다. 그러다 문득 내 손이 눈에 띄었다. 주름지고 검버섯으로 얼룩덜룩해진 못생긴 손이다. 한때 희고 부드러웠던 손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깨끗한 아기의 얼굴에 대비되어 더욱 초라해 보였다. 손자가 할머니를 겉모습으로 보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손주를 안고 내려다본 아파트 정원에 은행나무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다. 한때는 가을이면 단풍으로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다니곤 했는데…. 문강 저수지 은행나무길이 기억난다. 얼마 전까지도 여름날처럼 더운 날씨 때문에 올가을 단풍은 곱지 않겠다는 얘기들이 들려왔다. 그런데 샛노란 단풍잎을 보게 되니 뜻밖의 선물이라도 받은 듯 반갑다. 봄에 돋는 새순도 그렇지만 고운 빛깔의 단풍잎은 꽃만큼이나 예쁘다.
해맑았던 시절을 기억하려 애쓰는 요즘이다. 은행나무처럼 세월의 더께를 다 씻어내고 찬란하게 물들 수 있을까. 나는 이제야 조금씩 본색을 드러내는 중이다. 단풍 드는 일은 결국 본래의 색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