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년 만의 사죄… 임진왜란 왜장 후손, 옥천 가산사서 조상 죄 사죄

'광복 80주년 한일 평화의 날'서 일본 후손들 참회

2025.10.10 18:55:11

10일 충북 옥천군 안내면 가산사 호국충혼탑 앞에서 열린 ‘광복 80주년 기념 및 한일 평화의 날’ 행사 전경. 국가보훈부와 가산사가 공동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불교계와 보훈처 관계자, 지역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진경기자
[충북일보]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 왜장의 후손들이 433년 만에 한국을 찾아 조상들의 죄를 사죄했다. 10일 오후, 충북 옥천군 안내면의 조계종 사찰 가산사. 가을 햇살이 고요히 깃든 산사에는 향내가 피어오르고, 수백 년 묵은 역사적 응어리가 풀리는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이날 열린 '광복 80주년 기념 한일 평화의 날' 행사에는 일본인 히사다케 소마(24) 씨와 히로세 유이치(70) 씨가 참석했다. 소마 씨는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5진 소속 왜장 초쇼가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의 17세 손이며, 유이치 씨는 6진 소속 왜장 가라스마 구로노카미 미찌도모(烏丸九郎右衛門道友)의 17세 후손이다.

이날 행사는 국가보훈부가 주관하고 가산사와 부산외대 김문길 명예교수가 공동 기획했으며,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열린 일본 왜장 후손의 공식 참회 행사다.

‘광복 80주년 한일 평화의 날’ 행사에서 히사다케 소마씨와 히로세 유이치씨가 ‘참회(懺悔)’, ‘화해(和解)’, ‘평화(平和)’를 주제로 한 휘호 작성에 참여하고 있다. 이날 작성된 족자는 한일 양국 후손과 국가보훈부가 나누어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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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의병과 승병의 넋이 서린 호국충혼탑 앞에서 술잔을 올리고, 조상들의 침략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깊이 머리를 숙였다. 히사다케 소마씨는 "조선 침략이 잘못이었다는 반성 속에서 사죄할 기회를 찾아왔다"며 "오늘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과거를 직시하고 진정한 평화의 시대로 함께 나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는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명예교수와 가산사 주지 지원 스님의 오랜 인연에서 시작됐다. 두 사람은 3년 전 일본 교토의 '귀 무덤(耳塚)' 위령제에 함께 참석해, 왜군이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 묻었던 참혹한 역사의 현장에서 한일 간 화해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그 인연이 이어져, 임진왜란 당시 의승장 영규대사와 의병장 조헌 선생의 진영을 모신 가산사에서 일본 후손들의 공식 참회 행사가 성사됐다.

지원 스님은 "임진왜란 왜장 후손 두 분의 용기 있는 참회를 영규대사의 후손으로서 진심으로 환영한다"며 "433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뼈아픈 역사를 제대로 반성하지 못했기에 오늘의 결단이 더욱 뜻깊다. 아픈 역사의 고리를 풀기 위해서는 참회와 화해, 그리고 용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제는 그 길을 통해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도 참석해 한일 양국의 미래 관계를 언급했다. 권 장관은 "433년 전 임진왜란 당시의 과오를 용기 있게 밝힌 히사다케 소마와 히로세 유이치 두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일본이 진정성 있는 성찰과 반성을 보일 때 양국은 미래지향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있으며, 오늘 이 행사가 한일 양국이 우호와 협력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일본 왜장 후손 히로세 유이치(앞줄 오른쪽 세 번째)와 히사다케 소마(오른쪽 두번째)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후손 이종학 씨 등과 함께 식순에 따라 묵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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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에는 호사카 유지 광복80주년기념위원회 위원, 이광희 국회의원, 노영민 전 대통령비서실장, 김문길 명예교수, 추복성 옥천군의장 등이 참석했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후손 이종학 씨, 황진 장군의 후손 황의옥 씨, 서예원 장군의 후손 서재덕 씨 등 조선 장수의 후손들도 함께해 의미를 더했다.

행사의 마지막은 한일 양국의 평화를 기원하는 퍼포먼스로 마무리됐다. '참회(懺悔)', '화해(和解)', '평화(平和)' 세 글씨가 적힌 족자를 제작해 왜장 후손과 피해자 후손, 국가보훈부 대표가 한 점씩 나누어 들었다.

양국의 후손들이 서로를 향해 고개를 숙였고, 이어진 포옹 속에 400년의 한이 녹아내렸다. 박수 소리가 잔잔히 퍼지며 산사에는 숙연한 감동이 번졌다.

한일 양국 후손들이 ‘광복 80주년 한일 평화의 날’ 행사에서 포옹하며 화해의 뜻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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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성덕왕 9년(720)에 창건된 가산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의 군영으로 쓰였던 사찰로, 전란 중 소실됐다가 인조 2년(1624)에 중건돼 숙종 때 호국사찰로 지정됐다. 현재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으며, 2019년 호국충혼탑, 2022년 호국문화체험관을 세워 호국의 정신을 잇고 있다.

행사 후 두 일본인은 충북 청주로 이동해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소와 사당, 의암 손병희 선생의 생가를 찾아 참배했으며, 11일에는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을 방문한 뒤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433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 침략의 역사는 다시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약속이 옥천의 산사에 조용히 새겨졌다. 이날의 참회와 화해는 한일 양국이 과거를 넘어 평화의 미래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옥천/이진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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