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가 동양화를 그리는 재료로만 인식되던 1960년대에 과감하게 붓과 먹을 버리고 '종이의 화가'로 시 태어난 용감한 젊은 화가가 있었다. 그는 전통을 중시하는 우리 동양화단에서 초현실주의적인 화풍으로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다. 그래서 '화단의 이단아'로 불렸던 이 화가의 이름은 권영우(1926~2013)이다.
초기에는 동양화의 기본 재료인 수묵과 한지의 표현 가능성을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추구하는 작업을 하고 그 이후 한지만으로 순수 추상회화에 전념한다. 한지를 오려내고, 찢고, 붙이고, 떼고, 손가락이나 손톱으로 밀어붙이는 등 평면에서 입체로 통일에서 파괴로 변화를 시도했다. 70~80년대에는 젖은 한지에 칼질하거나 손가락으로 눌러 구멍을 냈고 90년대에는 각종 오브제를 화면에 붙이고 한지를 덮는 등 실험적인 작업을 계속하며 '종이작가'라는 명성을 굳혀 나갔다.
추상회화의 대가 권영우는 요즘 잘 나가는 장르가 된 단색화를 1970년대 박서보, 윤명로, 정상화 화백과 함께 주도했다. 또한 박노수, 서세옥 등과 함께 서울대 미술과가 개설된 후 입학한 우리나라 해방 1세대 작가다. 중앙대학교에서 10년 넘게 몸담고 있던 권영우는 53세 때 철밥통이라고 할 수 있는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작품만 하겠다는 일념으로 미술계의 큰바다 프랑스로 날아간다.
필자는 이 시기에 있었던 드라마틱한 일들을 권영우 화백에게서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영동군에서 미술 교사로 있으면서 미술협회장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대한민국 예술원'에서는 예술원 회원들을 문화적으로 소외돼있는 지방으로 보내 강연회를 열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영동에도 두 분의 예술원 회원이 내려왔는데 문학 분야에 소설가 이호철, 미술 분야에는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권영우 작가였다.
강연회를 끝내고 두 작가와 술을 곁들이면서 저녁 식사를 같이했다. 이 자리에서 강연회에서 못 들었던 에피소드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오래전 일이라 그때 주고받은 이야기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권영우 화백이 프랑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은 작품들을 꼼꼼하게 포장해서 손에 들고 비행기를 탔다는 얘기는 잊혀지지 않았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를 시기에 대학교수라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혈혈단신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권영우 작가를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작은 체구에 선비 같은 인상이었다. 그런 몸에서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을까. 미술 교사로 있으면서 틈틈이 작업하고 있던 필자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지는 작은 거인이었다.
권영우는 맨땅에 헤딩하듯이 시작된 11년간의 프랑스 생활에서 국제적 조형 감각을 익히고, 그것을 인정받아 호암미술관 회고전으로 화려하게 돌아온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그는 한지 작업과 함께 과슈 물감과 먹을 혼용한 단색조의 색채를 가미하는 작업을 한다. 회고전에서 선보인 나뭇가지, 부채, 병, 번호판, 창틀, 못, 철사 등 일상의 사물들을 화판에 붙인 후 화선지로 덮은 작품들은 흡사 눈 덮인 겨울 풍경 같았다. 그가 말년 동안 전념한 한지 작업은 동양화 표현양식의 지평을 확대시킨 것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생전에 작가는 "내가 하는 일은 매일 종이 바르는 일"이라며 "찢고 뚫는 도구도 손가락뿐 아니라, 나무꼬챙이나 쇠붙이 같은 것으로 적당히 그때그때 만들어 쓴다. 누가 왜 그 맑고 하얀 종이를 찢느냐고 묻는다면 거울같이 맑고 고요한 수면보다는 소용돌이가 있고 물결치는 상황이 더 보고 싶어하는 마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같아서는 그 맑고 고요한 수면에 빗방울이 억수같이 쏟아지는 광경이 보고 싶어진다"고 이야기했다.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젊은 작가들에게 주는 '올해의 작가상'을 이례적으로 70대인 권영우 작가에게 수여해 그의 작품세계를 인정한다. 그의 작품은 구체적인 제목이 없이 Untitled(무제)다. 이에 대해서 그는 "조물주는 만물을 만들었지만 이름은 붙이지 않았고 자연 그 자체가 곧 추상인 셈"이라고 말했다. "저는 단지 자연의 여러 현상들에서 발견하고 선택하고, 이를 다시 고치고 보탤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 말은 "형상은 처음부터 돌 속에 있다. 나는 단지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냈을 뿐"이라고 말한 미켈란젤로와 비슷하게 겸손한 작업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권영우는 교과서에 나오는 대다수의 대가들이 그랬듯이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나와 국전에서 큰상을 받고 대학교수가 되었다. 화단의 원로대접을 받으면서, 쉽게 돈 되는 그림만 그리면서 편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안일한 삶을 거부하고 선구자적인 길을 걸은 큰 작가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일찍 깨우쳤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39년 후배작가는 권영우의 작가정신을 본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