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전, 명성황후의 비극적 죽음을 애도하러 홍릉에 사람들이 몰려들던 그때, 한국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거리에서 문을 열었다. 오늘날 '커피 공화국'이라 불리는 한국의 시작점은 사실 황제의 궁정도, 인천의 외국인 전용 호텔도 아닌, 민중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홍릉 전차 정거장이었다.
보통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 머물던 아관파천 시절 처음 커피를 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커피는 이미 철종 때인 1861년 국내에 들어왔고, 1883년 제물포 개항과 함께 정식 수입 기록도 있다. 그럼에도 고종을 '조선 최초의 커피 음용자'로 기억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커피 애호가들이 붙인 상징적 별호에 가깝다. 실제 한국 커피사의 기원은 훨씬 더 깊고 복합적이다.
1860년 4월, 프랑스 예수회 신부 랑드르, 조안노, 리델, 칼레가 목숨을 걸고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들어왔다. 그들의 짐에는 성경과 자명종, 포도주와 함께 커피 18㎏이 실려 있었다. 당시 조선은 콜레라로 수십만 명이 희생되던 참혹한 시기였다. 신부들이 들여온 커피는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전염병 속에서 체력을 보강하고 정신적 위안을 주는 일종의 '치유의 음료'였다. 베르뇌 주교가 1860년 홍콩지부에 "커피를 보내달라"는 서신을 남긴 것도 이를 보여준다. 그는 1866년 순교하기 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약 136㎏의 커피를 조선에 전했다. 이 순간이 바로 한국 커피사의 첫 장면이다.
불과 20여 년 뒤, 커피는 궁중에서도 공식 음료로 자리 잡았다. 미국인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은 1884년 경복궁 연회를 기록하며 "잎담배와 샴페인, 과자에 이어 홍차와 커피가 제공되었다"고 적었다. 이는 고종이 아관파천 시절 처음 커피를 마셨다는 통설보다 12년 앞선 기록이다. 커피는 이미 외교사절을 접대하는 상징적 음료였던 셈이다.
상업적 영역에서도 커피는 곧 등장했다. 1899년 8월 31일자 독립신문은 "윤용주가 홍릉 전차 정거장 앞에서 다과점을 열고 커피와 차, 코코아를 판다"는 광고를 실었다. 현존 기록에 따르면 '윤용주의 다과점'이야말로 한국 최초의 커피하우스였다. 그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상시 판매하며, 궁궐과 외국인 거주지에 머물던 음료를 대중의 거리로 이끌어냈다.
홍릉이 선택된 배경은 흥미롭다. 1899년 서울 전차가 개통되자 가장 붐빈 곳이 명성황후의 능이 있는 홍릉이었다. 참배객과 전차를 구경하는 인파가 몰려든 그곳에 다과점을 연 것은, 교통과 광장을 중심으로 카페가 번성하던 유럽 도시 풍경과 닮아 있었다. 제물포 개항 이후 인천에는 대불호텔(1888), 스튜어드 호텔, 호텔 드 꼬레 등 서구식 호텔이 문을 열었지만, 이곳에서 커피가 제공되었다는 문헌적 증거는 없다. 반면 윤용주의 다과점은 신문 광고라는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어, 한국 최초의 상업적 커피하우스로 학문적 근거를 갖는다.
따라서 한국에서 커피가 공식 접대용 음료로 처음 등장한 곳은 경복궁, 그리고 상업적으로 판매된 최초의 공간은 홍릉 전차 정거장 앞 윤용주의 다과점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고종을 조선 최초의 커피 음용자로 기억하지만, 커피의 진짜 역사는 훨씬 더 사회적이고 복합적이다. 그것은 황제의 궁정에서 비롯되어, 민족의 아픔이 서린 홍릉 거리에서 대중적 소비문화로 이어졌다.
130년 전 명성황후의 비극적 죽음, 그리고 이를 둘러싼 역사적 격랑 속에서 커피는 결코 사소한 음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근대 조선이 세계와 마주하던 순간을 함께 기록한 증인이었다. 그리고 이름 없는 사업가 윤용주의 다과점은 오늘날 한국 커피문화사의 출발점으로서 분명한 좌표를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