꽈리고추 한 봉지

2025.09.21 17:23:36

이명순

수필가·한국어강사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현관 손잡이에 비닐봉지가 걸려 있었다. 열어보니 싱싱한 꽈리고추다. 누군가 방금 갖다 놓은 것 같은데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더운 날씨라 냉장고에 넣어 놓고 경비 아저씨께 물어보니 모른다고 한다. 혹시 동 호수를 잘못 알고 실수로 우리 집 문에 걸어 놓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경비 아저씨께 찾는 사람이 있으면 알려달라 말하고 출근했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요즘은 같은 아파트에서 이웃이라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도 없었고, 친분이 있다면 문자로 연락하든지 초인종을 누르고 주고 갔을 텐데 말도 없이 문 앞에 슬며시 갖다 놓을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얼마 후 경비 아저씨께 문자가 왔다. CCTV를 돌려 봤는데 같은 통로 1층에 사는 아주머니가 놓고 갔다고 한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그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오랫동안 살았으니 서로 간에 안면은 있어 오가며 만나면 눈인사는 나눴지만 그리 깊은 대화를 하거나 마실 가서 차 한잔을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도 없이 왜 꽈리고추 봉지를 우리 집 앞에 놓고 갔을까 다시 궁금해졌다.

퇴근길에 마침 밖에서 1층 아주머니를 만났다. 인사를 하고 꽈리고추를 우리 집에 가져온 것이 맞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한다. 왜 초인종을 안 눌렀냐고 했더니 집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며 꽈리고추가 많이 있어서 그냥 나눠 줬다고 한다. 엘리베이터를 올라오며 그냥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이유 없이 그냥 누군가에게 베풀 수도 있는 건데 내가 많이 베풀지 못하고 살다 보니 받는 것도 익숙하지 못했나 보다. 나눔이나 베풂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래전에는 아파트 이웃들과 어울려 지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눴고, 앞집이나 위아래로 마실 가는 집도 있었다. 커피 마시러 오라고 불러서 아줌마들만의 수다로 하루를 시작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은 추억으로만 남았다. 굳게 닫힌 철문처럼 이웃과도 교류 없이 내 생활 패턴을 유지했다. 그렇게 살았기에 소소한 나눔이 갑자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1층 아주머니는 그냥이라고 말했지만 숨은 의미를 알기에 울컥했다. 가깝기에 살가운 정을 나누며 지낼 수도 있는 이웃이다. 층간 소음으로 감정이 격해지기도 하고 배려가 부족해 삭막할 수도 있는 주거 공간이 아파트다. 어린아이가 있는 집들은 늘 아랫집 눈치를 본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그 또한 고마운 일이다.

나도 누군가와 그냥 나누고 싶을 때가 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보고 싶은 친구도 있고 갑자기 그리운 인연이 떠오르기도 한다. 마음이 있어도 만날 수 없는 먼 곳도 아니고 가까운 곳에서 마음 거리가 가까워진 이웃이 생겼다. 어느 날 마주치면 차 한잔하자고 청할 수도 있는 인연이다. 꽈리고추 한 봉지가 내게 이웃사촌이라는 소중한 관계의 연결 고리를 이어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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