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이 유독 심한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기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 경쟁에 내몰리게 된다. 현재 미국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오랜 지인은 얼마 전 대화를 나누다가 졸업 요건인 인턴십 자리를 구하기 위해 엄청난 경쟁을 해야 하는 스트레스로 인해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미국에도 다른 양상의 경쟁이 존재하고 누구나 살아남으려면 거기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한국의 언론 매체를 통해 취업을 포기하고 쉬는 청년 세대들의 문제를 많이 접하는데 그 원인으로 취업과 회사 생활의 어려움 등이 이야기된다. 그런데 결국 근본 원인은 치열한 경쟁과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 마련이 부족하다는 점에 있다.
사실 능력주의를 지향하는 한국 사회에서 '경쟁'은 '능력'을 보여 주는 가장 공정하고 훌륭한 수단이 된다. 이에 따라 의미상 말이 안 되는데도 무심코 일상에서 통용되는 말들도 생긴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경쟁은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전쟁'과도 같다. 그만큼 전쟁은 치열한 대결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죽여야만 내가 산다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내면화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이런 전쟁에서 어떻게 '선의'가 작동할 수 있겠는가. '선의'는 타자에 대한 관용과 배려를 통해 삶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내가 살아남아야만 하는 전쟁에서는 당연히 '선의'보다는 '악의'가 작동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선의의 경쟁'이라는 말은 '경쟁'이 지닌 폭력적인 성격을 희석하면서 사회 구성원들의 윤리적 시야를 흐리고 판단 능력을 호도하는 언어적 함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전제 아래 한국 사회에서 개인들은 어릴 적부터 정서적 교감과 협력보다는 경쟁을 먼저 배운다. 일상에서 아무리 친한 친구 혹은 지인 사이라고 해도 필요에 따라 언제든 적이 되어 서로 경쟁하는 사이가 된다. '선의'라는 예쁘고 그럴듯한 윤리적 수식어를 빌미로 개인을 잠재적 적으로 호명하는 사회, 치열한 경쟁이 가능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적 차원에서 보자면 '경쟁'과 연관된 이러한 말들의 사회적 통용은 그리 반갑지 않다. '경쟁'을 당연시하고 능력주의 문화를 내면화하는 사회에서 청년 세대의 좌절감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요즘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경쟁'과 '능력'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회의 근본 구조로 받아들이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그러한 구조의 피해자일 수 있음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사회 구조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냐는 것이다. 아직은 사회의 쓴맛을 경험하지 못한 순수한 학생들의 반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안타깝다. 실제로 그들이 사회에 진출해 능력주의와 경쟁 사회를 경험하면서 직면하게 될 충격이 어떤 좌절감으로 되돌아오게 될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 사회가 가져오는 부작용을 단기간에 쉽게 해결할 수는 없다. 다만 사회의 잘못된 측면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다각도에서 시정해 나가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일상에서 무심하게 사용하는 언어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