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하다는 말

2025.08.21 15:50:37

남호순

시인·배바우도서관장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은 지도가 먼저 움푹 접히는 곳이다. 금강이 한 굽이 돌아드는 지점, 들판과 마을은 물그릇처럼 안으로 기울어 앉아 있다. 바람도 물도 이곳에서는 걸음을 늦춘다. 장대비가 읍내를 휩쓸고 지나가도 이 마을은 종종 비껴간다. 눈보라도 고갯마루에서 숨을 고르다 조용히 방향을 돌린다. 오목함은 자연의 지형일 뿐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안남면의 골짜기를 내려다보면 낮고 순한 능선들이 팔을 벌리듯 들판을 감싼다. 흙길을 걸으면 잡풀조차 허리를 숙이고 있다. 한여름 햇볕 아래서도 마을은 늘 그늘을 품는다. 높은 곳에서 굽어보면 비어 있는 듯 초라해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속이 고요히 차올라 있음을 알게 된다. 오목한 곳은 언제나 받아들이고, 품고, 이윽고 흘려보내는 그릇이 된다.

참, 좋은 곳이다. 마을 앞 강은 철새들의 여관이거나 호텔쯤은 아닐까? 철마다 들러 쉼을 내려놓고 새끼들을 키워 다시 떠날 수 있는 곳, 물고기와 다슬기와 고라니와 멧돼지와 들개가 채우고 비우는 오목한 자리에서 나는 여전히 마음이 편안하다. 빈다는 것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채움의 전주곡이다.

세상살이를 버텨내려다 보면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수시로 고개를 든다. 더 가지려 하고 더 드러내려 할수록 마음은 날카롭게 뻗어간다. 그러나 뾰족할수록 바람에 쉽게 흔들리고 작은 충격에도 금이 간다. 그럴 때마다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을 떠올린다. 움푹 낮아져 있기에 오히려 단단한 땅, 모든 물길이 흘러와 잠시 쉬었다 가는 자리. 오목하다는 말은 곧 단단하다는 말이된다.

오목함은 겸손과도 닮아있어 사람 사이에서도 그렇다. 나서지 않고 한발 물러서는 사람이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더 깊은 사정을 품는다. 오목한 귀가 소리를 받아들이듯, 오목한 마음이 타인의 사정을 끌어안는다. 반대로 빳빳이 곧추선 마음은 쉽게 다투고 금이 간다. 나는 이 마을에 살면서 지금도 그 오목함을 배우는 중이다.

저녁 무렵 들판에 서면 서쪽으로 기운 해가 금강 물 위에 넓게 번진다. 오목한 강물은 붉은 노을을 고스란히 품는다. 새들이 강가에 내려앉아 그 안에서 노닐고, 풀벌레 소리마저 낮게 퍼진다. 세상의 소란이 잦아들고, 땅의 그릇이 하루를 잠시 머금은 순간, 나는 하루의 무게를 견딜 힘을 얻는다.

삶도 이와 같으리라. 움푹 팬 자리에서 시작해 들어온 것을 품고, 어느 순간 다시 흘려보내며 이어지는 것. 열매가 떨어져 다시 씨앗이 되고, 강물이 흘러가 다시 구름이 되는 것처럼, 오목함 속에서 순환이 이루어진다. 오목하다는 말은 부족함이나 결핍이 아니라, 새로운 채움을 준비하는 모양새다.

나는 지도를 펼칠 필요도 없다. 매일 한반도 지형을 직접 밟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낮아져 있기에 넉넉한 땅, 비워두었기에 채울 수 있는 자리. 오목하다는 말은 결국 살아가는 길의 지혜다. 바닥이 패여 고여 있는 물처럼, 내 안에도 여전히 오목한 공간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그곳이야말로 내가 숨을 고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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