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에 이르는 길

2025.08.18 15:38:38

가야산 소리길(운천 촬영)

양선규

시인·화가

틈만 나면 떠나던 캠핑을 이제 잊을만하면 간다. 염천의 더위를 떠나 법보종찰로 잘 알려진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인, 가야산 해인사 근처 계곡 옆에 텐트를 쳤다. 캠핑장 가까이 물소리 새소리 함께 하니, 나도 따라 자유로운 하늘의 별과 숲의 바람이 된 듯하다

캠핑을 갈 때마다 새로운 야영지를 찾아 떠나는 호기심이 있어 준비하는 과정이 그리 힘들지 않다. 오전 11시쯤 가야산 국립공원 오토캠핑장에 도착해 텐트를 치고 해인사에 들러 대웅전 부처님께 삼배하고 장경각 법보전에서 팔만대장경을 알현했다.

해발 650m 가야산 자락에서의 야영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편안하다. 지난밤은 저녁 준비 중 갑자기 비가 내려 급하게 비설거지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가끔 일기예보와 다르게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거세게 불고 기온이 내려가면 참으로 곤혹스럽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한여름인데도 새벽에는 얇은 이불을 덮고도 좀 냉랭한 기운의 밤을 보냈다.

경판을 머리에 이고 탑을 도는 행렬 / 발걸음마다 동선은 우주를 그리고 / 은빛 햇살처럼 빛나는 경전은 / 물 흐르듯 해인삼매의 하늘을 연다
홍류동 계곡의 소리길을 걷다 보면 / 눈 감고도 들리는 숲의 숨결 / 마음과 마음으로 흐르는 경(經) 따라 / 오늘도 만행(萬行)을 떠난다
천수경을 외고 삼천사백 배를 하면 / 몸과 마음 가벼워질 수 있을까 / 오체투지로 팔만대장경을 알현하면 /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매화산은 묵묵히 햇살을 안고 / 바람은 부지런히 사람의 길을 내고 / 해인사 법보전 장경각 나무 경전은 / 욕심과 근심 내려놓으라 하네
2022,《시와문화》가을호, '시' 해인삼매의 길(전문)

아침저녁으로 해인사를 참배하고, 주변 암자와 홍류동 계곡의 소리길 산책을 하다 보면, 예불 드리는 소리와 목탁 소리, 그리고 범종과 흔들리는 숲 소리, 물소리 마음에 와닿고 얼마간의 잠잠한 시간이 흐르자 고요에 이른다. 야외에서 한 사흘 지내다 보면 내가 머물던 산과 나무 그리고 바위들까지도 친숙해져 자연과의 일체감을 더해준다. 한밤중 소등을 하고 잠자리에 드니 사방이 캄캄하다. 자크가 달린 문틈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고, 쉴 새 없이 바람 소리 계곡물소리 들리고 소쩍새 소리, 부엉이 소리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새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깊은 밤, 잠 깨어 텐트에서 기어 나와 넓적한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보니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 같다. 어릴 적 전기가 없던 시절 석유를 태워 빛을 밝히는, 불빛 보다 그림자가 더 큰, 희미한 호야 등이 있는 마당 평상에서, 어머니 무릎을 베고 바라보던 그 별들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두워야 더욱더 밝게 빛나는 이치를 알게 해준 소리 없는 그 별빛이다.

캠핑하다 보면 시간이 물 흐르듯 금방 간다. 2박 3일 중 벌써 마지막 날 아침이다. 자리를 정리하는 시간이 오면 집에서 떠날 때와 텐트를 칠 때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또 다음을 기약할 수 있고, 속세나 산중, 어디에나 마음먹기에 따라 고요에 이르는 길은 있으니 미련 둘 필요는 없다. 사실 한 사흘 캠핑을 하다 보면 몸도 좀 피곤하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어려울 때 안다고 했던가 어찌 보면 살아오면서 지금 머무는 집과 걷는 길이 가장 편안하고 좋은 곳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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