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獻血), 가장 아름다운 유산

2025.08.13 14:36:18

이윤지

간호사·작가

헌혈의 집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시절, 나는 단순히 혈액을 나누는 것을 넘어 삶과 사랑이 이어지는 소중한 순간들을 자주 마주했다. 누군가의 생명을 지킨다는 마음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매일 새롭게 느꼈다.

주말이면 가족 단위로 헌혈하러 오는 분이 많았다. 헌혈하는 부모님을 조용히 지켜보며 기다리는 아이들, 그리고 나란히 헌혈 침대에 누워 서로를 격려하는 부부의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런 장면들은 작은 희생이 모여 큰 사랑이 된다는 사실을 조용히 말해주는 듯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한 가족이 있다. 헌혈 중이던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간호사님, 아이가 바늘을 보면 무서워할까 봐요. 바늘이 안 보이게 밴드로 가려주실 수 있을까요? 헌혈이 두려운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싶어요."

그 한마디에는 아이를 향한 깊은 배려와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바늘 부위를 조심스레 덮어드렸고 곧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딸아이가 들어왔다. 아이의 눈빛에는 아버지를 향한 자랑스러움과 함께 새로운 희망이 자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OO야, 텔레비전에서 아픈 친구들 본 적 있지?"

"응."

"아빠가 지금 이렇게 헌혈하면 이 혈액이 아픈 친구들에게 전달돼서 치료받을 수 있어. 우리 OO이도 크면 아빠랑 같이 헌혈하자. 우리가 세상에 작은 힘을 보탤 수 있는 거란다."

"네, 좋아요! 우리 아빠 진짜 멋지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전하는 가르침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울림이 되는지 새삼 깨달았다.

또 한 번은, 첫 헌혈을 하러 온 고등학생이 있었다. 약간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마음 한 켠에는 설렘이 묻어났다. 옆자리에서 헌혈 중이던 중년 여성 헌혈자가 그 아이를 한참 바라보다 핸드폰을 내게 건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 둘이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내가 다소 당황하자, 학생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저희 엄마세요."

어릴 때부터 엄마가 헌혈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란 아이였다. '나도 크면 꼭 해야지'라고 다짐했고, 만 16세가 되어 마침내 엄마와 함께 첫 헌혈에 나선 것이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사랑과 자부심이 가득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삶으로 전해지는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참 많다. 그러나 물질보다 오래 남는 것은 부모의 삶의 태도와 가치관이다.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아이에게 훨씬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나는 헌혈의 집에서 수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전해지는 삶의 모습이야말로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임을 알게 되었다.

헌혈은 단지 피를 나누는 일이 아니다. 그 안에는 책임과 사랑,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 마음은 말없이, 조용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개인의 작은 헌신이 가정을 통해 전해지고,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에 따뜻한 희망의 씨앗이 된다.

"엄마, 저도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언젠가 내 아이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미소 지으며 말할 것이다.

"물론이지. 우리 함께 오늘도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을 나누었잖니."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