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리의 바람은 금강을 건너 나에게로 온다. 검푸른 잎새들 사이로 너울너울 춤추는 생성의 기운, 하늘과 땅, 나무와 사람이 금강에 실려 둥둥 떠내려갈 것만 같다. 계절마다 바람은 말투를 바꾼다. 봄에는 여린 숨결이고, 여름엔 뜨겁게 뛰어다니며, 가을엔 말을 아끼고, 겨울엔 등 뒤를 살짝 밀고 지나간다.
대전을 떠나 연주리에 둥지를 튼 지 십 년이 넘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마루에 앉아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날 이후 바람과 함께 살기로 마음먹었다. 조금씩 땅을 일구고 나무를 심었다. 복숭아, 사과, 감나무. 계절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 그것은 나를 기다려준 시간이었다.
썰렁하던 마당 한켠엔 주워 온 돌들을 놓았고 그 틈 사이로 들꽃이 옆구리를 잡아끈다. 봄이면 개구리가 울고, 가을이면 고추잠자리가 놀다 간다. 철조망을 따라 호박 넝쿨이 타오르고 처마 밑에는 거미가 제멋대로 집을 짓도록 내버려두었다. 내 계획은 아니었다. 그저 흐르는 대로 두었을 뿐 그렇게 시간이 나를 데리고 내 삶의 방식을 찾아주었다.
황토방 옆으론 들고양이가 자주 들른다. 사람을 경계하다가도 볕 좋은 날이면 마당 한가운데 누워 낮잠을 잔다. 들고양이를 따라 참새가 내려앉고 내 인기척에 바람이 그것들을 몰고 간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고, 제 방식대로 하루를 살아간다는 거 문득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 또한 누군가의 바람이고, 스쳐 가는 햇살이며 내 자리를 지킨 돌멩이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밤이면 개구리 울음과 소쩍새, 고라니, 고양이 소리는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같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나도 이 땅의 일부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바람, 풀벌레, 어둠까지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듯해 잠이 늦어지니 일상은 느긋하고 향기롭다.
저녁이 오면 푸르름을 끌어와 킁킁 냄새를 맡아본다. 밤꽃의 아릿한 향, 인동이 피운 꽃 덩굴, 익어가는 오디, 보리수, 산딸기, 풋것들이 내뿜는 단내가 머리를 상쾌하게 한다. 특히나 으름 꽃향기는 저녁을 포근하게 만들어주니 나도 모르게 향기는 꽃일까? 아니면 낮에 뱉은 향기들이 다시 돌아온 것일까? 들꽃이 내뿜는 향기는 연인의 손길보다도 달콤하다.
땅거미가 내려앉고 어우러진 향기가 퍼진다. 그저 코로 맡기엔 아까운 저녁이다. 무겁도록 매달린 어둠도 풀어 헤친 꽃 냄새는 나지막한 위로가 된다. 향기로 떠오르는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물까치, 참새, 직바구리, 꿩들이 제집처럼 드나들어 푸드득 고요를 잡아 흔들 때는 놀라 가슴이 철렁한다. 바람에 흔들이는 자유로움을 방 안에서 바라보다가 문득 내가 바람의 길목에 집을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산새들이 햇살에 눈을 찡그리며 놀다 가는 동안 나는 마당의 손님처럼 조용히 앉아 있다. 저들의 거처에 내가 농막을 짓고 들어왔으니, 바람 사이에서 나 또한 누군가의 그늘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해가 뜨고 새들이 찾아오고 나무가 제자리를 지키는 이 마당이 축복이고 우주의 방식이라 믿는다. 내가 조금만 더 성실해진다면 이 집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공간이 될 것이다. 나의 남은 향기가 있으니, 오늘도 바람이 와서 내게 묻는다.
"이만하면, 살만하지 않으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