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봉리는 여덟 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곳으로 풍수지리의 문외한이 보더라도 명당이라는 느낌이 확 드는 마을이다. 8명의 큰 인물이 이 마을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전설을 증명하듯이 우리나라 최초의 조각가 정관 김복진(1901~1940)과 문인 팔봉 김기진(1903~1985)형제가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두 형제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집은 창고, 닭장 등으로 사용될 정도로 방치돼 있다가, 얼마 전 '김복진 생가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미술관은 청주시나 충북도가 나서서 한 것이 아니라, 김복진을 무척이나 사랑해 생가를 구입까지 한 지인에 의해서 이뤄졌다. 필자가 지인을 안 것은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충북일보 이동우의 그림 이야기(2024.9.5)'에 김복진에 대해 쓴 글을 인터넷을 통해 읽고, 연락을 해와 만남이 시작됐다. 만남이 시작된 것은 짧지만 김복진 생가를 중심으로 팔봉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대해 많은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 필자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김복진 관련 자료를 넘겨주며 응원했다.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되면서 관심 밖으로 밀려난 생가는 40년 전에는 아예 어디인지 몰랐다고 한다. 정관이 1940년 39살에 요절하고, 부인과 딸까지 세상을 떠 팔봉리하고는 인연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정창훈 조각가에 의해 기적적으로 묘소와 생가가 발견된다. 정창훈 조각가가 홍익대 대학원을 다닐 때 지도교수가 "자네 집이 청주라니, 그곳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 김복진의 묘소와 생가를 찾아보게"라는 말을 듣고, 몇 년간 뜬구름 잡듯이 찾기 시작해 1985년 어렵게 찾아냈다. 어릴 적 봐서 묘소 위치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길도 없는 산비탈을 업고 다니며 찾았다 하니, 정창훈 조각가의 의지를 높이 살만하다.
지인은 최근 생가를 정비하던 중 '광무(光武) 5년'이라고 적힌 상량문을 발견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상량문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상량문이 보관돼 있는 상량대를 발견한 것이다. 상량문은 상량한 날짜와 시각을 한 줄로 내려쓰고, 그 아래에 두 줄로 기원하는 글귀를 적는다. 상량문의 아래위에 '龍(용)· 龜(거북)'자를 써서 천리(天理)에 순응하는 집을 지었음을 하늘에 고한다. 일반적으로 민가의 상량문은 위와 같은 내용을 나무 보에 간략하게 쓰나, 써야 할 내용이 많은 궁궐·관아·사찰 등에서는 별지에 상량문을 적어서 상량대에 홈을 파고 넣어 보관하는 방법을 이용한다. 김복진 생가에서 발견된 것은 민가에서 보기 드물게 후자의 상량문이다.
박상일 사학가(청주대 명예교수)는 "광무 5년이라는 건축 연도가 확실하고, 김복진의 생가라는 역사적 의미도 있어 원형을 되찾아 충북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 장현석 건축가는 팔봉리 293번지가 1912년 토지대장에 소유주가 김복진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공개했다. 광무(光武)는 대한제국 고종 때인 1897년에 사용한 연호로 '광무 5년'은 서기 1901년으로 집이 지어지고 김복진이 태어난 해인 것이다.
김복진 탄생일은 영동공립보통학교 학적부에 1901년 9월 23일생으로 표기돼 있다. 하지만 지인은 미술평론가 윤범모의 논문 내용 '1901년 4월 3일, 안동김씨 김홍규(1871년생)와 광산김씨 김현주(1868년생) 사이의 장남으로 탄생하다'라는 내용를 인용해 4월 3일 생신상을 차려 아이들과 함께 김복진을 기억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한다.
유별나게 호기심이 많은 필자는 상량대 문을 열어보고 싶다. 1901년 4월 3일 이전에 세워졌으면 생가(生家)가 되는 것이고, 4월 3일 이후에 세워졌으면 어릴 때 살았던 집이 되는 것이다. 이 수수께기를 푸는 방법은 밀봉돼있는 상량대의 문을 열어 상량 날짜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상량문은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고, 이 한옥이 정관의 생가이냐· 자란 곳이냐?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 정관의 숨결이 배어있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이중섭이 불과 일 년간 피난살이 한곳을 명소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동안 지인의 뛰어난 추진력이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어우러져 팔봉리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있었다.
모닥불 포럼, 조각가 김복진 생가에 대한 재검증 토론회 및 윤지훈 초대전이 개최됐고, 김복진 순례길 투어 코스가 개척됐다. 집집마다 있는 작은 건조장을 전시실로 활용해 40여 명 작가의 작품을 전시한 '1회 김복진 조각 페스타'가 성황리에 열렸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팔봉리를 전시장으로 만들었고, 축제의 한마당이 됐다. 이런 행사들을 지켜보면서 팔봉리가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문화예술공간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가능성을 엿보았다.
지인은 팔봉리 출신으로 환경조각과 조형예술학을 전공한 현직 교수(용인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객원교수)이다. 그의 이름은 오헨리(1961~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