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군대 동기로 문봉렬이 있다. 우리는 1979년 3월 하순 논산훈련소에 입대했다. 입대 당시 입었던 사제복을 벗고 선착순으로 집어든 군복은 여기 저기 찢어진 그대로였고 몸에 맞지도 않았다. 누군가 군복이 너무 크다고 사회에서 쓰던 말을 했다가, 욕설과 함께 "군복에 몸을 맞추라"는 쇳소리가 돌아왔다.
***논산훈련소를 추억함
그 해 봄 논산훈련소 일대는 봄비가 자주 내렸다. 야외 훈련장에 오고 갈 때면 비포장 황톳길을 훈련병들이 온몸으로 뒹굴며 쓸고 닦았다. 교관, 조교들은 수시로 선착순 집합과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를 반복하며 군인정신을 주입시켰다.
아침 기상과 동시에 구타와 욕설이 시작됐고 훈련을 위한 구타인지 구타를 위한 훈련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담배 피우는 10분간 휴식 시간 외에는 취침 시간까지 모든 일상이 구타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양 허리춤을 두 손으로 잡고 좌우 반동을 넣으며 군가를 소리 높여 부를 때면 고향에 계신 엄마 생각에 눈물이 나고 나라를 지킨다는 자부심과 충성심에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
입대 46년이 지난 지금도 논산훈련소를 떠올리면, 야외 교장 나가는 길 건너편 언덕에 불그스름하게 피던 아련한 복숭아꽃과 '압록강중대' 막사 앞 화단에 무심히 피어 20대 초반 훈련병의 속을 홀라당 뒤집어 놓던 라일락꽃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을 '독사'라 부르며 그토록 모질게 훈련시키던 교관도.
나의 전우 문봉렬은 자대 배치 후 대대 본부를 거쳐 중대 본부에서 만났다. 눈썹이 진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형 문봉렬은 진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쓰며 말을 참 재미있게 풀어냈다. 우리는 소대 본부까지 같이 배치 받았고 서로 다른 분대로 나뉘었지만 각별한 전우애를 가졌다.
우리 소대장은 상황판단이 빠르고 동작이 민첩한 문봉렬을 소대장 전령으로 배치해 항상 동행했고, 나는 중대본부 소속의 산꼭대기 통신대로 이동됐으나 우리는 수시로 교류하며 전역 때까지 우정을 나눴다. 우리의 군 제대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대형 사건이 터졌다. 문봉렬의 소대 중 한 분대 초소 내에서 졸병 한 명이 수류탄을 터트려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우리의 다른 동기 한명이 분대장의 책임을 지고 영창에 들어갔다.
제대하던 날 나와 문봉렬이 영창 면회를 가 함께 제대하지 못하는 동기를 위로했던 기억이 난다. 총기와 실탄을 휴대하고 비상시에는 신속히 기관총과 수류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된 부대여서 각종 총기 사고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거나 다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얘기도 나눴다.
나의 전우 문봉렬과의 우정은 강산이 바뀌는 10년 세월을 5번째 맞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경남 통영의 토박이인 문봉렬은 제대 후 통영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훌륭한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정년퇴직했다. 며칠 전에도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공분을 나눴다. 우리의 애국심은 20대와 변함이 없었다.
***변하지 않는 애국심
나와 문봉렬은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았으나 6.25 휴전(1953년) 몇 년 뒤의 전후세대다. 우리 세대는 갓난아기 시절부터 전쟁으로 파괴되고 찢어진 강토를 복구하는 고난의 시대를 지나왔다. 6.25 전쟁 75주년이 어제였다. 나의 전우 문봉렬, 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