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장 김영조 선생의 삶

2023.05.29 15:44:45

박연수

백두대간연구소 이사장

하얀 도화지에 불 먹은 인두가 생명을 불어 넣는다. 국화가 피어난다. 중국 당대 최고의 시인 도연명(365~427)이 노래한다. 採菊東籬下 ·然見南山(채국동이하 유연견남산)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다 물끄러미 남쪽 산을 바라보네-

열린공방 낙화장(烙畵匠) 5번째 공개 시연 행사가 지난 4월 보은 전통공예체험학교에서 열렸다. 이번 행사는 국가무형문화재 낙화에 대한 이해와 낙화장 김영조의 삶을 들여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낙화(烙畵)는 불에 달군 인두를 이용해 종이, 나무, 가죽 등 표면에 그림이나 문양 등을 표현하는 한국 전통 예술이다. 이러한 기능을 가진 사람을 '낙화장'이라 부른다.

김영조 낙화장(71)은 시연에 앞서 "보은 문화예술관계자를 초청하여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편하게 진행하려 준비했다"고 취지를 설명하며, 낙화가 국가무형문화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충남 부여가 고향인 낙화장은 독립운동가인 조부모와 정치가인 아버지 때문에 경제적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밥 먹은 기억보단 도토리 먹은 기억이 많다'는 그는 고 3때 아버지를 여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학생 김영조는 '낙화수강생 모집! 취업도 가능함'이란 한 줄 광고를 보고 달려갔다. 벽에 걸린 산수화에 운명적으로 빠져든 학생은 한여름 작은방의 10개의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60도의 열기를 참아가며 그림에 몰두하였다.

학원에서 청소하고 밥하며 배우던 중 1년쯤 되었을 때 운영의 어려움으로 학원이 문을 닫았다. 처음 30명이던 수강생이 10여 명 정도 남아 있었다. 이들은 의기투합해 다른 장소를 얻어 1년을 버티다 해산했다. 1974년 해산 기념으로 간 무주구천동에서 그린 낙화가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자 이거다 싶어 홀로 1977년 속리산으로 들어왔다. 김 낙화장은 "먹고 살기 위한 20여 년간 작품 활동은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간이자 경제적 여유를 갖게 한 기간이었다."며, "40에 들어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리 잘 그려봐야 예술로 대접을 못 받는 것에 대한 슬픔이 앞섰다."고 설명했다. 그림을 싸 들고 무작정 문화재청의 문화재 연구소로 찾아가 담당실장과 학예연구사를 만났다. "낙화는 왜 무형문화재가 될 수 없습니까?"라고 질문하자 "그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길은 알려 드리겠습니다"라며 "학술적 증명, 실력 증명, 문화재위원들의 인정이 있어야 한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그때부터 딸들과 함께 열심히 연구해 낙화에 대한 역사적 고증을 찾아내고 전승공예대전 출품해 특선하고 자문과 연구를 이어나갔다. 그런 와중에 충북도에서 연락이 와 2010년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태리 아솔로비엔날레 초청을 받고 시연장에서 만든 4개의 작품 중 하나는 시에 기증하고 3개가 팔리면서 처음으로 아내에게 가죽백을 선물하는 기쁨도 누렸다. 인도에서는 전시관 하나를 낙화로 채우고, 각종 비엔날레 등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런 노력에 힘입어 낙화 종목이 2018년 12월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개인무형문화재 낙화장이 되었다.

달구어진 인두보다 뜨거운 간절함은 400년 간 감자던 낙화를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낙화장 김영조 선생의 삶에서 피어나는 국화꽃를 따서 물끄러미 남쪽산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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