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의장풀에서 하늘을 보다

2022.09.25 15:47:30

이정희

수필가

닭의장풀이 파랗게 우거졌다. 잎은 물론 꽃잎까지 푸른빛이다. 가을을 수놓는 한 폭 난(蘭)이었을까. 닭의장풀은? 꽃 중에 물망초가 푸른 줄은 아는데, 어느 날은 또 청보랏빛 느낌에 반했다. 삐죽삐죽한 잎을 보면 누군가 초록 꿈을 휘갑쳐놓았다. 빛깔 고운 양란도 향기 그윽한 동양란도 아니지만 먹구름에 붓을 찍은 바람살 일필휘지가 꽃잎으로 착착 피어났으리.

달개비 닭의장풀, 이름까지 정겹다. 무성하게 뻗어갈 때는 닭의장풀이고 청초한 꽃잎을 보면 달개비라고 불러야 될 성 싶다. 남색 꽃은 청사초롱 같고 자주달개비는 홍사초롱 닮았다. 그 위에 흰색까지 종류도 많다. 일찍 필 때는 한여름 뜰을 밝히고 9월에는 초가을 골짜기를 비춘다. 닭의장풀은 하늘을 부려놓고 나는 추억을 마름질한다.

닭의장풀을 직역하면 닭의 장에서 크는 풀이다. 닭장은 보통 헛간에 잇대서 짓는다. 유황 냄새 때문에 어지간한 풀은 죽어버리는데 혼자 특별한 이름으로 태어났다. 밟을수록 쳐드는 잡초도 거기서는 아웃이다. 구구구구 소리에 시끄럽지만 바닥에는 쇠비름조차 없다. 철망을 얽은 자리에 크는 닭의장풀만 빼고는…….

문을 열어주면 닭의장풀을 뜯어먹거나, 또 다른 녀석들은 양은대야의 물을 찍어먹는다. 가끔은 하늘까지 쪼아대는 녀석들. 뒤따라오던 녀석도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본다. 어쩜 그렇게 흡사한지 쿡쿡 웃음이 난다. 기억의 창고에 둥지 틀어 있던 닭장의 모습이다.

꽃잎 한 장 따서 보면 새파란 귀를 닮았다. 가을로 물드는 날은 쫑긋 세워서 우주의 소리를 듣는다. 이루어지면 더는 꿈일 수 없다는데, 청남색부터가 보라색도 같고 군청색도 같아서 묘하다. 무한정 뻗어나가던 것이 닭장 옆이라 주춤했겠지만 푸르께한 청남색이 볼수록 예쁘다. 미완의 꿈이 생각날 만치.

들녘의 꽃이라도 들국화니 석죽화 등 화려한 꽃은 많았다. 뭐 그런 꽃도 좋기는 했으나 쓰담쓰담 추어주고 싶은 그런 꽃이다. 누구든지 미완의 꿈은 오래도록 짠하다. 이루지 못한 아쉬움에 먼 산도 보고 하늘도 보고 그러는 게지. 부화되기 전의 달걀에는 달개비 푸른 잎과 새파란 꽃이 들었으니까. 병아리에서 닭이 될 동안 푸른 하늘과 천둥소리까지 새겼으려나·

내 인생의 닭장도 웬만한 풀은 죽어버리겠지만 창백한 꽃이나마 피우면서 나만의 닭의장풀 서식지를 구축해야 하리. 내가 본 달개비는 자갈자갈 소리 나는 돌밭 또는 황폐한 둔덕에서 피었다. 그래서 더 좋았던 걸까. 슬퍼도 씨앗을 뿌리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고, 슬퍼도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있다.

꽃대는 닭 벼슬처럼 뻣뻣한데 꽃은 애잔해 보인다. 우리도 사는 것은 개똥밭에 구르듯 필사적이어도 소망은 아름답고 청초해야 하리. 지독한 운명의 탑에서 떠오르는 초여름 향기라도 좋겠다. 장미도 백합도 아닌 소박한 나로서는, 비탈에 언덕바지에 사는 닭의장풀이 분수에 맞는다. 닭장 속의 병아리와 닭의장풀도 너나들이하면서 하늘을 보고 그랬으니까. 흉내를 내듯, 달개비 한 잎 두 잎 쪼아 먹을 때는 하늘색 닮은 유달리 청색이었던 것을.

해거름, 도서관에서 달구비를 만났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 또한 달구비였다. 어쩐지 달구비에서 달개비로 바뀐 것 같은 느낌· 억측이라 해도 전라도 방언으로는 닭을 달구라고도 했다지. 하필 닭의장풀이고 달개비였던 것을 보면 웬만치 관련은 있었다. 시냇가 달개비는 달구비 속에서도 여전히 푸르렀으니.

누군지 닭의 장 닭의장풀 하다가 땅을 버르집는 닭을 보고는 달구를 생각했으리. 달구는 집터를 다지거나 묘 터를 다지는 돌덩이다. 닭장 주변이 단단한 것도 버르집는 닭들 때문이었다. 닭이 쪼아댄 것은 모이도 되고 소망도 되었던 것처럼, 수많은 닭의장풀 중에도 새뜻한 꽃 한 송이가 반짝이듯 하루쯤 빛나는 소망을 구도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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