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년의 유례없는 기근이 있었고, 1811년에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그 이후 국정 주도권은 외척간의 경쟁에서 승리한 김조순에게 돌아가면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부패한 정치로 평가받는 세도정치가 시작됐다. 1826년(순조 26). 나라 안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덩달아 청주는 어수선했다. 그해 4월 김치규(金致奎)라는 인물이 청주읍성 북문에 시국을 비판하는 내용을 적은 괘서를 과감히 실명으로 투척했다. 그런 어수선함이 가시기도 전에 그해 10월 비슷한 성격의 괘서투척 사건이 청주읍성에서 또 일어났다. 범인을 잡고 보니 요언은 정상채(鄭尙采)라는 인물이 처음 만들어 냈고, 이를 괘서에 적어 투척한 인물은 아전출신 박형서였다. 따라서 훗날 이 사건은 '박형서 역모사건'으로 명명됐다. 조선시대 아전은 달리 향리로도 불렸던 중인계층으로 관청의 일을 보는 등 식자층에 속했으나 경제적으로는 늘 쪼들렸다. 사회나 국가에 대해 제도적으로 원한이 깊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괘서가 그렇듯이 박형서 것도 미래에 대한 허왕된 내용인 도참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①홍경래는 죽지 않았다느니, 서적(西賊)은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부류에 지나지 않는다느니, ②병화가…
1804년(순조 4) 청주목이 다시 서원현으로 강등되고 충청도는 광역행정 지역은 공충도바뀌있다. 청주목에 거주하는 한해옥(韓海玉)이라는 사람이 대역죄에 해당하는 흉언(凶言)을 지어냈기 때문이었다. '이조에서 청주목을 서원현으로 강등시키고 충청도를 공충도로 바꿀 것을 아뢰었으니, 죄인 한해옥이 거주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청주에서 일어났던 여러 역모사건과 달리 한해옥 건은 그 전모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16자로 이뤄진 흉언'이라는 것만 『순조실록』을 통해 확인된다. "본래 효경의 뱃속에 항상 귀역의 마음을 품고 있던 차에 이번 여름 역적 권유·정재민 무리들의 국옥(鞫獄)이 있고 난 연후에 몰래 원망하는 마음을 쌓아오다가 감히 제멋대로 후매하는 계획을 짜서 소회를 읊은 16자의 흉언을 지어냈으니, 견준 것은 망측하였고 그 뜻은 음흉·사특하였습니다.'- 인용문 중 '효경'의 '효'는 어미를 잡아 먹는 올빼미, '경'은 아비를 잡아 먹는 파경이라는 짐승을 말한다. 즉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됐다. '귀역'은 귀신과 수상곤충의 일종인 물여우를 일컫는 표현으로 음흉한 사람을 일컫고 있다. 정리하면 △권유 무리의 사건이후 그…
1777년(정조 1) 청주목이 다시 서원현으로, 그리고 충청도는 공충도로 행정지명이 바뀌었다.(사진) 홍상범(洪相範·?-1777)이 역모를 도모했고, 그 어머니인 효임(孝任)의 태생지가 청주때문이었다. 홍상범의 역모사건은 그 아버지인 홍술해(洪述海·1722-1777)의 유배가 발단이 됐다. 그는 황해도관찰사 재직중 부정한 돈 4만냥, 세곡 2천5백석, 소나무 2백60 그루를 사취한 사실이 드러나 흑산도에 위리안치됐다. 이 유배형은 죄인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주로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 상범이 아버지의 치죄에 불만을 품고 거주지인 전주에서 상경, 홍인한·정후겸 등 벽파(僻派)와 제휴, 정조를 시해하고 은전군 '찬'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였다. 아버지를 유배지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직접 정조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벽파는 정조의 탕평책을 반대한 당시의 정치집단으로 세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홍상범의 역모 기도는 사전에 발각되어 그 뿐만 아니라 아우 필해·지해·찬해 및 조카 상간 등도 함께 주살당하였다. 주살은 죄를 물어 사형시켰다는 뜻으로, 그 방법은 다양했다. 홍술해의
조선시대 청주는 역모사건이 일어나면 '청주목'에서 '서원현'으로 읍호 강등을 당했다. 청주목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역모는 숙종6년(1689)의 박상한(朴相漢) 기우제 제문 사건이다. 17세기는 조선뿐만 아니라 전지구가 기상이변을 겪었다. 기상학자들이 '소빙기'라고 말할 정도로 1만년이래 지구의 기온이 가장 낮았다. 청주지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소빙기에 따른 가뭄이 찾아왔고 따라서 청주목은 자연재해를 주술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기우제를 지내게 됐다. 이때 제문을 작성한 사람이 유생 박상한이다. '하늘이 가물게 하는 가뭄은 오히려 기도해 물리칠 수 있으나, 나라에서 가물게 하는 가뭄은 누구로부터 이것을 풀 것인가. 오로지 이러한 가뭄은 가물게 한 것이 사람으로 말미암았고, 사람이 스스로 가물게 한 것이니, 기도해 물리칠 바가 없다.'- 인용문 중 '나라에서 가물게 하는 가뭄은 누구로부터 이것을 풀 것인가'라는 부분이 특히 문제가 됐다. '나라에서 가물게 하는가뭄', 이 대목이 당시 임금 숙종이 정치를 잘못한다고 비유적으로 지칭한 것으로 해석됐다. 다음 문장도 문제가 됐다. '사람이 생각에 없어서 스스로 하늘을 단절하였고, 나라에서는 정사(政事)가 없어서 이미 백성
목은 이색(李穡·1328~ 1396)의 영정은 전국적으로 최소 7곳 존재하고 있다. 우리고장 청주시 주성동의 목은영당을 비롯해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충남 서천시(그림), 예산군 삽교읍, 부여군 홍산면, 서울 종로구 수송동,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등에 위패와 함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처럼 이색이 추앙받는 인물이 된 것은 빼어난 문장실력과 함께 성리학적인 요소도 작용했다. 그는 우왕의 사부이자 권근(權近·1352~1409)의 스승이기도 하다. 이색은 이런 환경을 통해 조선 성리학이 이념·통치적으로 본궤도에 오르는데 주춧돌 역할을 했다. 이색은 충남 한산 출신이고 주로 수도 개성에서 생활했으며 경기도 여주의 여강에서 졸했다. 그는 고려말 청주옥에 잠깐 갖혔던 것을 제외하고는 청주에 장기체류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색은 우리고장 청주를 소재로 빼어난 시를 여러 수 남겼다. 다음은 '돌아가기를 생각하다'라는 시다. 청주에 놀러 왔다가 개성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한다는 의미다. '유포에 가을 기운 깊고 비가 잠깐 개니(柳浦秋深雨乍晴) / 수촌과 산중 별장 경치가 더욱 깨끗하네(水村山墅景彌淸) / 천심은 다 드러나서 나락 풍년이 들었고(天心盡露嘉禾熟) / 시
고려 관리들의 최고 바람은 은퇴 후 별장의 일종인 '별서'(別墅) 생활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지금의 전원생활를 동경하는 것과 비슷한 일면이 있어, 시대를 뛰어넘어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목원대학교 역사교육과 이정호 교수에 따르면 이규보, 이색 등 고려 문인들이 남긴 각종 문집에는 별서생활에 대한 동경심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별서는 '4가지를 갖췄다'는 뜻에서 '사가재'(四可齋)로 개명했다. '사가'는 밭, 뽕나무, 샘, 땔나무를 갖췄다는 뜻으로, 그 자체가 별서생활을 상징하고 있다.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전집』에 관련 내용이 전해진다. '밭이 있으니 갈아서 식량을 마련하기에 가하고, 뽕나무가 있으니 누에를 쳐서 옷을 마련하기에 가하고, 샘이 있으니 물을 마시기에 가하고, 나무가 있으니 땔감을 만들기에 가하다.'- 이규보는 이어지는 내용을 '내가 이 집에 거하면서 만일 전원의 즐거움을 얻게 되면 세상일을 팽개치고 옷을 떨쳐 입고서는 옛동산으로 돌아가 늙으면서 태평성세의 농사짓는 늙은이가 되리라'(〃)라고 적었다.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로는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이 있고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사진)에는 일지홍(一枝紅), 봉황지(鳳凰池), 이름없는 기녀 등 청주의 기생도 다수 등장한다. 수양대군 세조가 쿠데타(계유정난)를 일으킬 때 오른팔과 왼팔 역할을 한 인물이 한명회와 권람이다. 한명회는 당시 청주목 땅(지금의 천안시 수신면), 권람은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잠들어 있는 등 우리고장과 인연이 깊은 인물들이다. 이들이 수양대군을 만나기 전 청주를 찾았고, 이때 권람은 일지홍이라는 기녀를 좋아하게 됐다. 그러나 몇년 뒤 권람이 다시 청주를 찾았을 때 일지홍은 저승으로 간 뒤였다. 권람은 마음 한 구석의 허전함을 이렇게 읊었다. '지난 무오년에 놀던 일 생각하면(憶昔來遊戊午年) / 일지홍의 요염한 자태 선비의 간장 녹였지(一枝紅艶惱儒仙). / 오늘 다시 찾아오니 감개가 무량하나(今日重遊還有感) / 가련하다 외로운 무덤 인간을 등졌구료(可憐孤塚隔寒烟).'- 권람은 그후 동시대 문신 강중(剛中·김수온의 자)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기회가 있었고, 이때 청주기생 일지홍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김수온은 "나도 청주 율봉역의 봉황지라는 기녀를 좋아했는데 몇년 뒤 다시 찾으니 이승에 없었다"라고 화답했다. 그러면서 김수온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1927)에는 충북과 연고가 있는 기녀들이 10여명 등장한다. '한지와 봉매', '전목과 충주기생 금란', '보은현감 성원제와 춘절', '윤현과 청주기생', '송상현과 김섬' 등은 본란에 소개됐거나 비교적 널리 알려진 편이다. 이에 비해 '배극렴과 설매', '신광수와 영춘기생 계화', '충주 교리석(校理石) 전설', '서원기생 일지홍', '송인과 서원기생' 등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진천 인물 배극렴(裵克廉·1325~1392)은 이성계 휘하에 들어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공양왕을 폐한 공으로 조선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됐다. 『조선해어화사』에 의하면 당시 정승 배극렴이 연회석상에서 기생 설매(雪梅)에게 "들으니 너는 동쪽에서 먹고 서쪽에서 잔다더구나. 오늘은 노부(老夫)를 위해 천침(薦枕)하는 것이 어떨까"(제 31장)라고 유혹의 말을 던졌다. 노부는 배극렴 자신, 천침은 첩이나 시녀 등이 잠자리에서 시중을 드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자 설매는 "동쪽 집에서 먹고 서쪽 집에서 자는 천한 기생의 몸을 가지고 王씨를 섬겼다가 李씨를 섬기는 정승을 모시는 것이 사리에 꼭 맞습니다"(〃)라고 독설했다. 모시기는 모
도내에서 구한말~일제 강점기를 산 역사적 인물로는 단재 신채호의 지명도가 가장 높은 편이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하는 인물로 괴산출신 이능화(李能和·1869∼1943)가 있다. 이능화는 당시 괴산군 이도면 수진리(현 괴산읍 서부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원긍(李源兢·1849-1919)은 문과에 급제한 후 경상도관찰사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국내 학계의 연구는 1990년대 후반에야 시작됐다. 권평 씨는「이능화와 조선기독교及외교사」(1999, 연세학술논집)에서 이능화의 생애 마디를 ①어린시절(1869-1889), ②외국어 공부 시기(1889-1897, ③외국어 교수 시기(1897-1910), ④한국종교사 연구 시기(1912-1920), ⑤조선총독부의 조선사 편수관 또는 편수위원 역임(1921-1937) 등으로 분류했다. 그는 ①에 대해 '이 시기의 이능화는 한문을 공부하며 과거를 준비하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가학으로 공부를 한 셈으로 훗날 수많은 한문전적의 분석과 방대한 한문저술의 초석이 이때 이뤄졌다'고 밝혔다. ②에 대해서는 '상경하여 영어, 중국어, 불어 등 3개 국어를 배워 능통하게 된다. 그가 양반의 자제로서 외국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한지(韓祉·1675-?)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월악서소』(月嶽書疏)라는 저서를 남긴 문장가이자, 청렴강직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이른바 '팔포'(八包)의 법을 엄히 지키도록 한 것이었다.팔포는 조선시대 때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여비(旅費) 등으로 쓰기 위해 가져가는 8개의 포대를 말한다. 각 포대에는 인삼 10근씩이 담겨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사신들은 이 팔포를 당나라 사행길에 가지고 가 여비 또는 물품구입 자금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여비를 풍족히 쓰는 것 외에 당나라 물품을 구입, 국내에 들여와 되팔면 적지 않은 차익이 발생했다. 대신 인삼자원은 고갈됐다. 이를 과감히 금지시킨 인물이 바로 한지였다. 그는 1727년(영조 3)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팔포의 법을 엄히 지켜 역관(譯官)이나 비록 대관(大官)이라도 이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의 청렴강직한 성품은 관료적인 것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윤리적인 것에도 같이 적용됐다. 조선시대 관찰사(감사)는 임기 2년이 기본으로 처자를 고향에 남겨두고 대개 홀몸으로 부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관찰사 등 당시 외관들이 합법적으로…
몇해전 청주 상당공원에 위치하고 있는 충북 도민헌장탑을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난 적이 있다. 관리가 어렵고 시대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상당공원 도민헌장탑은 '시멘트+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적어도 3년에 한 번씩 흰색 페인트칠을 해야 한다. 탑을 설계·시공한 청주출신 김경화(전 공주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 조각가는 이에 대해 "도민헌장탑을 만들 당시인 1970년대에는 국내 조각가들 사이에 석재를 다루는 기술력이 현재처럼 발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은 탑에 새겨진 글과 조각 형상에서 비롯되고 있다. 도민헌장탑의 글은 탑 전면과 뒷 공간의 부속 조각 등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탑 전면에 새겨진 글 내용은 전회에 밝힌 바 있다. 탑 부속 조각의 글은 전면의 슬로건을 풀어쓴 것으로, 주장은 비슷하다. '이러한 전통은 가즈런히 오늘에 전승되어 우리 품성의 바탕이 되고 행실의 기조가 되어 교육과 문화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거니와 온후 순박한 인심 속에서 소극적이고 피동적이며 보수에 흐르기 쉬운 도민기질을 하면 된다는 신념아래 부지런히 일하고 협동단결하여 남보다 앞서가려는 적극적인 기질로 일신시켜 가고
중앙공원에 이어 청주시민들이 즐겨찾는 곳은 상당구 수동 283-3번지 위치한 상당공원이다. 상당공원은 1만9백여㎡의 그리 크지 않은 면적으로, 공원내 주요 시설로는 충북도민 헌장탑, 한병수(韓鳳洙, 1883~1972) 동상, 충북 4.10학생혁명 기념탑 등이 있다. 그러나 상당공원은 지난 1930년대에 조성된 중앙공원과 달리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상당공원은 지난 1974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됐다. 청주 향토문화대전 자료에 따르면 이곳에 금수장 여관과 동아극장 등이 있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우암산(牛岩山·338m)을 가린다고 하여 철거하고 공원을 조성했다. 상당공원은 지난 1979년 충북도민헌장탑이 건립되면서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 도민헌장탑은 공원의 많은 면적으로 차지하고 또 도심 중앙에 우뚝 솟아 있어 단번에 시민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러나 도민헌장탑에는 언제, 누가 이 탑을 세웠고 또 조형물이 의미하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한 줄의 설명문도 만날 수 없다. 현 충북도민헌장탑은 1979년 전국소년제천 청주대회를 앞두고 이를 기념하는 기념물로 세워졌고, 당시 충북지사는 정종택 씨였다. 당시 충북체육은 소년체전 7연패를 하는 등 전국의 부러움을…
청주 중앙공원은 조선시대는 청주목 관아,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는 충북도청이 위치하던 자리였다. 중앙공원은 충북도청이 지금의 문화동 자리로 이전하면서 조성됐지만, 공원 건립을 위한 공간 확보는 1911년부터 시작됐다. 일제는 1911년 4월 이른바 시구(市區)의 개정, 즉 도시계획에 착수했다. 『청주연혁지』를 보면 일제는 사방의 성벽을 허물도록 하고 그 돌을 이용하여 새롭게 하수도를 건설하고 일직선으로 석교에서 북문으로 통하는 간선도로를 개수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본정통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종횡에 가로를 계획하여 가로 세로를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함으로써 바둑판의 모양과 유사한 시가지를 만들게 되었고, 1915년(대정 4)에 이르러서는 그 대부분의 공사를 준공하였다.(55쪽) 그 이전에 충북도청이 1908년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해 오면서 청주읍성 관아의 각 건물에는 과(果)들이 분산 배치됐다. 본건물인 근정전(勤政殿)에는 지방, 통군루에는 회계과, 공손수(압락수) 아래의 건물에는 학무과, 근정전의 동쪽에 있는 건물에는 재무과가 배치됐다. 1922년에 편찬된 『대청주』라는 자료를 보면 일제는 이때부터 서공원과 동공원 외에 별도의 공원을 청주 도심이 조
공원은 공공녹지로서 자연지(自然地)나 또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후생적 조경지로 정의된다. 전자를 자연공원, 후자를 도시공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공원이 역사적으로 언제 출현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근대공원은 중세 이후 영국의 왕후·귀족이 소유·독점 사용하던 수렵장이나 대규모 정원을 19세기 중반에 일반에게 공개한 것에서 비롯됐다.청주의 근대적 의미의 공원은 일제 강점기 때 등장했다. 일본인 오쿠마온보(大雄春峰)가 1923년에 쓴『청주연혁지』에는 '서공원'(현 사직동 충혼탑 자리·사직산)과 '동공원'(현 당산 일대·명장사 뒷산))에 대한 설명이 동시에 등장한다. 따라서 최소한 1920년대 초반부터청주에도 공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공원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먼저 『청주연혁지』는 서공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무렵에는 청주에 공원이 없었기 때문에 鈴木 장관은 부하에게 명령하여 땅을 깍아 도로를 개척하고, 여러 종류의 수목을 재배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돌을 운반하여 벤치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오처옥(吳妻屋)을 설계하여 휴식장소로 삼도록 하였는데, 동공원과 함께 성대하게 설비되어 있었다. 櫻井 장군도 이에 동조하여 재향군인들
단양은 산이 많고 들이 적기 때문에 쌀 생산량이 매우 적었다. 이런 환경에서 전세(田稅)를 쌀 등 현물로 내는 것은 고욕이 아닐 수 없다. 쌀 생산량이 적다보니 타지에서 쌀을 사다가 전세를 내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를 해결한 인물이 당시 관찰사 이석규(李錫奎)다. '단양군의 전세(田稅)·대동미와 군포(軍布) 등을 영원히 전량 돈으로 대납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도백 이석규가, 산간 고을에서는 쌀과 베가 매우 귀하여 멀리 타도에서 사와야 하고 수송의 길도 험하여 매양 전복된 배가 많다는 이유로 돈으로 대납하기를 청하니, 묘당에서 복계(覆啓)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한 것이었다.'- 그의 충청도 관찰사 재임시절에 연풍현에서 이희윤(李喜允)이라는 인물에 의해 전패(殿牌)훼손 사건이 일어났다. 전패사건이 빈발한 탓인지 순조실록은 이 사건을 소략으로 기록했다. '공청감사 이석규가 연풍현의 전패를 가지고 변을 일으킨 죄인 이희윤을 처형할 것을 아뢰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것으로 종결되지 않았다. 순조실록은 20여일 뒤 또 하나의 관련 기사를 기록해 놓았다. 이희윤의 아들도 연좌제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연풍현에 전패를 가지고 변을 일으켰던 죄인 이희윤의 아들…
조선시대 우리고장의 전패훼손 사건은 충주, 황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빈번히 발생했다. 조선후기가 되면 전정, 군정, 환정 등 이른바 삼정의 문란으로 서민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된다. 전패 훼손사건은 음성, 단양, 연풍, 괴산 등에서도 일어났다. 그러나 이때의 훼손 사건은 다른 지역과 달리 정치적,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왔다. 이는 사건이 나름대로 독특한 배경을 지니고 있는 데서 비롯됐다. 먼저 음성현 객사의 전패훼손 사건이다. 현종실록 3년(1662) 2월 4일자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음성현에서 전패를 도난당했다고 감사가 계문하였는데 예조가 회계하기를, "그 읍만 혁파하고 수령에게는 죄를 묻지 말아서 간악한 백성이 계획적으로 수령을 몰아내는 일을 막도록 하소서." 하니 (…) 이에 상이 따랐다." '수령을 골탕 먹이려는 전패훼손 사건이 너무 자주 일어나니 고을만 강등시키고 수령을 파직하지 말아달라'는 건의 내용이다. 현종은 이를 수용, 당시 수령은 파직하지 않았으나 음성현은 10년 동안 그 이름이 사라졌다. '호서의 음성현(陰城縣)을 혁파하였는데, 전패(殿牌)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성현 전패훼손 사건을 기점으로 전패에 대
국왕을 상징하던 전패(殿牌)는 조선후기 들어 각종 사건에 휘말렸다. 그 사연은 정치적인 동기, 개인 비리에 의한 훼손 등 매우 다양했다. 조선시대 최초의 전패 훼손사건은 효종 6년(1655)에 전라도 나주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주에는 경현서원이 존재했고, 그 운영권이 전패 훼손사건의 발단이 됐다. 비(非) 서인계가 서원(書院)의 원장이 되자 당시 나무목사 정기풍(鄭基豊·1594~?)은 이를 옹호했다. 그는 본관이 초계로 1642년 신계(新溪·지금의 황해도 신계군) 현령으로 재직하던 중, 암행어사 정치화를 통해 그의 선정이 보고되어 임금으로부터 의복을 하사받을 정도로 유능한 관료였다. 또 우리 고장과도 인연이 있어 1650년(효종 1) 옥천군수(沃川郡守)로 재직하던 중 문학(文學·정5품)에 임명되기도 했다. 아무튼 당시 나주의 서인 집단은 이를 빌미로 목사 정기풍을 축출하려 했다. 전패가 훼손되면 그 책임의 일부가 목사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미리 계산한 사건이었다. 전패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던 지능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일성록 헌종 11년(1845)에 관련 기록이 적혀 있다. 이 때는 우리 고장 청주와 관련된 인물이 등장한다. 청주사람 박용수는 유한원이
조선 조정은 국가차원에서 두 개의 위패를 관리했다. 하나는 궐패(闕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전패(殿牌)이다. 제후국을 자처했던 조선 조정은 황제국인 명나라를 향해 정초, 황제생일, 동짓날 등에 절올리는 의식은 망궐례를 행했다. 이때의 위패는 '궐패'(闕牌)라고 불렀다. 궐패가 국외용이라면, 전패는 국내용이었다. 조선 조정은 또 전국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殿(전)'자를 새긴 나무 패를 봉안했다. 바로 전패이다. 고려 시기까지의 객사는 말 그대로 공무로 출장온 관료들의 숙박 장소로 사용됐다. 조선 조정은 지방에서도 국왕 권위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15세기 후반 무렵부터 이 객사 내부에 전패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사극을 보면 '전하'(殿下)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원래 이 전하는 신하가 임금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신하가 자신의 방문을 알리는 이른바 '인기척 표현'이다. 감히 신하가 임금을 부를 수는 없었다. 아무튼 전패나 전하의 '전'은 일국의 최고 통치권자를 상징했다. 전패는 국왕의 상징물이었으므로 그 보관 및 관리가 매우 엄격하였다. 이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자는 대역죄에 해당되어 본인은 물론 일가족까지 처형되었고 그 고을은 10년간 혁파되어 이웃 고을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부터 처음 들어온 담배는 특유의 중독성을 발했다. 17세기 후반의 하멜은 표류기의 일부를 이렇게 기록했다. '현재 조선인들은 사이에는 담배가 매우 성행하여 어린이들까지도 4,5세 때에 이미 이를 배우기 시작하여 그래서 남녀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국왕 중에서도 '골초 임금'이 등장했다. 정조가 지은 문헌 중에 '남령초 책문'이라는 것이 전해지고 있다.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오로지 이 남령초에서만 도움을 얻었다. 화기(火氣)로 차가운 담(痰)을 공격하니 가슴에 막혔던 것이 자연히 없어졌고, 연기의 진액이 폐를 윤택하게 하여 밤잠을 편안히 잘 수 있었다.' 뒤에는 '갑이냐 을이냐를 교정하여 붓방아를 찧을 때에 생각을 짜내느라 고심하는 고뇌를 편안하게 누그러뜨리는 것도 그 힘이다'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가 번역한 글이다. 그런 정조는 '백성들에게 담배의 혜택을 주겠다'는 사명감에 불탓다. 말 그대로 전국민의 흡연화로, 역시 '책문'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이 풀이 이 시대에 출현한 것을 보면, 천지의 마음을 엿보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 따라서 남령초를 월령에 싣고 의
담배는 포르투갈어 '토바코'(TOBACCO)가 일본에서 '다바코', 그리고 이 '다바코'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담바구'로 불리다가 '담배'로 정착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토바코'에 대해서는 △서인도제도의 섬이름이라는 설 △그곳 원주민이 사용하던 담뱃대 이름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정설화된 것은 없다. 이밖에 담배는 조선시대에는 남령초(南靈草), 연초(煙草), 다연(茶煙) 등으로도 불렸다. '남령초'는 남쪽의 신령스러운 풀, '연초'는 연기나는 풀, '연다'는 연기나는 차라는 뜻이다. 담배의 원산지는 어디이고, 또 우리나라에는 언제·어떤 경로를 통해 들어왔지도 궁금한 대목이다. 담배의 원산지는 중아메리카로,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때 담배에 약효능이 있다고 생각해 유럽으로 가져갔다. 이것이 유럽에서 한반도로 유입 경로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있다. 첫째, 포르투칼-필리핀-일본-조선 순으로의 전래설, 둘째는 비단길-청나라-조선 유입설, 셋째는 두 가지 모두, 즉 한반도 남북으로부터 비슷한 시기에 동시에 들어왔다는 설이 있다. 현재는 첫 번째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 경우 담배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들어왔다는 설이 보다 유력해 진다. 조
음악, 무용, 기예가 어울리는 일본 전통연극으로 가부키(歌舞伎)가 있다. 16∼17세기 에도시대에 서민 예술로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고, 200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고려대 최관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이 가부키에 임진왜란 제 1차 진주성 전투의 맹장으로, 우리고장 괴산 출신인 김시민이 '모쿠소'라는 캐릭터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 주도의 조선관민이 보여준 필사의 항전은 적인 왜군에게도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때문에 당시 왜군들은 김시민을 '모쿠소'라고 불렀다. 이때의 모쿠소는 '진주목사' 할 때의 '牧使'(목사)를 일본식으로 발음이고, 표기는 '木曾'으로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입신출세를 다룬 작품으로 '다이코키'(太閤記)가 있다. 이 다이코키에 '모쿠소'가 실리면서 일본 전역으로 광범위하게 유포됐고, 그 영향으로 가부키에 조선군의 맹장이자 충신이면서, 원한을 품고 일본을 전복하려는 원귀 캐릭터로 그려지게 됐다. 모쿠소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가부키 작품은 지카마츠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의 혼쵸산고쿠시(本朝三國志·초연 1719년 2월 14일)이다. 여기에서 모쿠소는 조선에서 가장 신뢰받는 장군으
임진왜란 당시 같은 성(城)에서 8개월의 시차를 두고 '2차 전투'가 발생한 것은 진주성이 유일하다. 1592년 음력 10월에 벌어진 7일 밤낮의 진주성 1차 전투에서 조선인은 1천여명, 일본군은 1만3천여명이 사망했다. 이처럼 왜군의 사망자가 많이 발생한 것은 무리하게 성벽으로 기어오르다 진주성 안 조선인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김시민은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대비하고 있었다. '김시민은 화구(火具)를 미리 준비하고 화약을 종이에 싸서 풀로 묶어 성 위에 감춰두게 하고 대포 및 대석(大石)을 나누어 설치하게 하였으며, 여장(女墻) 안에는 가마솥을 비치하고 물을 끓여 대기하도록 하였다.'- 인용문 뒤에는 '김시민은 무리를 지휘하여 활과 쇠뇌와 포를 쏘고 돌을 굴려 내리니, 적병이 이르는 곳마다 죽어 넘어져 쓰러진 시체가 삼대처럼 즐비하여 일단 공격을 완전히 좌절시켰다.'(〃)라고 기록돼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진주성 1차전투 패배에 대해 극도의 분노와 함께 복수를 곱씹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진주성 1차 전투는 승승장구하던 왜군 정병이 육지에서 당한 최초의 대규모 참패였다. 그 후유증이 매우 심해 호남 진출에 실패했고, 또…
시호(諡號)는 왕이나 왕족 그리고 신하들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한 호를 가리킨다. 이 시호는 그때마다 무원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용할 3백여자의 글자가 미리 정해져 있었다. 이중 자주 사용된 글자는 문(文)·정(貞)·공(恭)·양(襄)·정(靖)·양(良)·효(孝)·충(忠)·장(莊)·안(安)·경(景)·장(章)·익(翼)·무(武)·경(敬)·화(和)·순(純)·영(英) 등 120자 정도였다. 즉 시호는 이들 글자의 조합인 셈이다. 조선시대 시호는 4글자로 된 사자성어 형태로. 그 뜻이 어느정도 정해져 있었다. 가령 문(文)에는 박학호문(博學好文·널리 배운 것이 많고 글 읽기를 좋아한다), 충(忠)은 위신봉산(危身奉上·자기 몸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든다), 무(武)는절충어모(折衝禦侮·적의 창끝을 꺾어 외침을 막는다)의 뜻이 담겨져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만이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지닌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조영무(태종), 남이(세조), 이준(세조), 김시민(선조), 김응하(광해군), 이수일(인조), 정충신(인조), 구인후(효종) 등 9명에 달하고 있다. 이중 우리고장과 연고를 갖고 있는 인물로 적지 않아, 남이는
우리고장 충주 출신인 이수일(李守一·1554∼1632)은 비교적 늦은 29살에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그는 밀양부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남도병마절도사, 길주목사겸 방어사,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는 등 무관의 요직을 섭렵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 초기전투(예천·용궁)를 제외한 야인토벌과 반란군 진압 등의 싸움에서 대부분 승리를 거뒀다. 특히 그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안도병마절도사겸 부원수를 겸해 길마재(鞍峴)에서 반란군을 무찌르고 한성을 수복, 그 공으로 진무공신 2등과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논할 때 그 실체를 '솔선수범'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매우 많다. 이수일 장군이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데도 분명히 그만의 리더십이 작용했다. 현존하는 여러 문집이나 관찬자료 등에는 이수일 장군의 생전 행적을 읊은 시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고, 그 리더십의 공통점은 여러 곳에서 인(仁), 즉 '어짐'으로 표현돼 있다.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중 한 명으로 계곡(谿谷) 장유(張維·1587-1638)가 있다. 그는 시문집 '계곡집'(谿谷集)을 남겼고, 그 안에 '계림부원
조선 후기에 보이는 대상을 사실대로 묘사하는 진경산수화가 유행했다. 그 이전까지는 중국화풍의 관념산수화가 유행했으나, 이는 미술 사대주의의 다름이 아니었다. '진경주의' 정신은 미술만이 아닌 문장에서도 시도됐고, 담헌 이하곤도 이를 의식적으로 추구했다. 따라서 "담헌은 문장을 윤택하게 하거나 조탁하는 것은 올바른 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문학 평론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물빛은 산 그림자 거꾸로 모사해 내고(湖光倒寫峰頭月) / 물에 비친 하늘 산그림자 다시 비추어내네(山影橫侵水底天) / 위아래로 점하나 공명 가린 것 없으니(上下空明無點·) / 바로 내 몸이 옥호에 있는 신선이 아닐까.(直疑身世玉壺仙).'- 담헌은 달빛, 나무그림자, 일렁이는 밤물결 등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지극히 쉬우면서 조탁없는 시어로 묘사했다. 담헌은 1972년 10월 장인 송상기를 뵙고 완위각이 있는 진천으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남원 광한루를 찾았다. 전통시대 겨울 여행은 조금은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담헌은 특유의 산수애호 사상과 역마살(驛馬煞)적인 성격을 앞세워 그해 12월 한겨울에 광한루를 찾았있다. 여기에도 달과 함께 조탁없는 쉬운 시어들이…
[충북일보] "이렇게라도 나서야 60년 이상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풀릴 것 같아요." 해마다 4월이 오면 가슴에 맺혀 있는 한(恨)을 풀지 못해 몸살을 앓는 80대 어르신들이 있다. 1960년 청주공업고등학교 2학년 학생신분으로 4·19 학생혁명운동을 주도하고도 국가로부터 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한 김태형(83·옥천읍), 김영한(82), 강건원(83), 곽한소(83), 이영일(82)씨가 그들이다. 김 씨 등은 지난 17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국가보훈부 정문 앞에서 청주지역 고등학생 4·19 연합시위 공적재심사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날 성명서 발표 자리에 곽한소 씨는 병환으로 입원 중이어서 참여하지 못했다. 이들은 이영일 씨가 낭독한 '4·19학생혁명운동 전국 3대 발원지 청주공고'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1960년 당시 청주공고 2학년생이던 우리들은 4월 3일 청주시 수동 213번지 김태형의 자취방에 모여 자유당 독재정권의 3·15 부정선거규탄 학생시위운동을 모의하고, 4월 13일 시위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또한 "4월 16일, 4월 17일에도 시위를 벌였으며 4월 18일 청주지역 학생연합 시위운동에 참여했다"며 "4·18 청주지역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속보=청주시와 시내버스 준공영제 참여업체, 노조위원회의 임금인상 논의가 오는 6월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지난 17일 충북지방노동위원회가 임금인상을 위한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 준공영제 협약사항을 개선하라고 청주시준공영제 관리위원회에 권고했기 때문이다. 준공영제 협약사항이 정하고 있는 임금체계에 대해 각계의 이야기를 듣고 변경을 검토하라는 취지다. 현재는 준공영제 시행협약서와 '청주시 시내버스 준공영제 운영에 관한 조례' 중 9조 16항에 '인건비 지원액은 공공기관 임금인상률의 ±20%를 초과하지 않는다'라는 조항이 담겨있어 임금인상에는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권고안에 따라 준공영제 관리위원회는 자체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공론화를 위한 준비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위원회에 소속되는 위원들은 시에서 2명, 업체에서 2명, 노조에서 2명, 시의회에서 2명 등 모두 13명 정도로 구성된다. 이들은 청주지역 시내버스 운수종사자들의 노동환경 등을 조사하고 임금인상이 타당한 지 검토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또 임금인상의 경우 시민들의 세금을 통해 지원되다보니 시민들에게 위 사안을 알리고, 의견을 청취하는 활동도 할 것으로 보인다. 충북지방노동
[충북일보] 송기섭 진천군수가 진천군 살림을 맡은 지 9년 차에 들어섰다. 3선 군수지만 '아직 진천을 위해 하고 싶은 게 많다'며 남다른 지역 사랑과 지역발전에 대한 사명감을 자랑하고 있다. 취임 8년과 민선 8기 반환 포인트를 목전에 둔 송기섭 군수를 만나 취임 당시 목표로 한 군정의 진행 상황과 평가, 남은 시간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들어본다. ◇진천군수로서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떻게 평가하는가.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는 게 숫자를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9만 명 진천군민의 선택을 받은 지난 2016년부터 개인보다는 지역의 발전과 군민의 삶을 우선순위에 두고 몰입하다 보니 정신없이 일만 했던 것 같다. 내가 판단한 작은 부분이 지역주민에게는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공직자의 시선에서 결정한 내용이 군민 눈높이에 맞는 것인지 현장에 나가 군민과 대화를 나눠야 했으므로 항상 시간은 부족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철도와 인구, 경제 등 어느 지방정부보다 비약적인 성장을 군민, 군 공직자와 함께 이룰 수 있었고,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지난 8년간 가장 값진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