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우리고장 옥천사람 권대진(權大進)을 현혹한 인조조의 떠돌이 요승 양천식(楊天植)은 출가와 환속을 3번씩이나 반복할 정도로 생활 자체가 불안정했다. 뿐만 아니라 이름을 역시 3번씩이나 개명하는 등 뭔가를 감추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그 가운데 '양병(楊丙)이라고 하는 자는 바로 양천식이며, 양팽(楊彭)은 바로 양정식이다. 병 등은 세 번이나 그 이름을 바꿨는데, 10년 동안에 세 번이나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했다.' 하고….'- 인용문의 양정식은 양천식과 이부동모(異父同母)의 형제간으로 출가와 환속을 함께 했다.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나, 양천식은 외견상 관상(觀相)과 풍수(風水)를 보는데 능했다. 권대진이 첫 만남부터 양천식에게 설득당한 것은 이 때문으로 파악된다. 양천식은 권대진을 보자 "백마장군이 될 관상"이라고 유인하는 말을 던졌다. 민속에서는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인물을 '백마장군'으로 호칭하고 있다. 의 공손찬(公孫瓚)이나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을 백마장군으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선검(先儉)은 공초하기를, "기사년에 자칭 관상을 잘 본다는 어떤 승려가 대진의 집에 와 관상을 보고 매우 좋다고 하였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철…
[충북일보] 인조 9년(1631) 2월에 정한(鄭澣·?-1631)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지금의 충북 옥천사람 권대진(權大進) 등이 합천인 정한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시도를 같은 옥천인 조흥빈(趙興賓)이 고변[밀고]하면서 일어났다. '옥천인(沃川人) 조흥빈이 정원에 나아가 고변하였다. 상이 그 글을 빈청(賓廳)에 내리는 한편, 금부도사를 보내 권대진·권계·권락·권순·정담·양천식·양정식·이찬희·정후엄, 박선검·박후검 등 16인을 잡아오게 하고, 국청을 설치하여 국문하였다.'- 이 사건의 성격은 잔존하던 대북파들이 자파 인물을 국왕으로 옹립, 세력을 복원하려는데 있었다. 당시 당색이 대북(大北)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옥천인 권대진은 '출신'(出身) 신분으로, 스스로를 중병영장 혹은 권천총(權千摠)으로 칭했다. 출신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아직 보직을 받지 못한 유생을 일컫는다. 선조의 아들 광해군(1575-1641)은 대북의 지지를 얻어 보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한 인조반정에 의해 실각, 강화도로 유배된 끝에 제주도로 이배됐다. 당연히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이 이끌던 대북
[충북일보] 나말여초에 극성을 부렸던 왜구는 정규 군인에 가까운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공민왕은 왜구의 노략질을 피하기 위해 백두대간에 원관(院館)을 세운 후 경상도 지역의 세곡을 '초점'(草岾)을 통해 운송토록 했다. '초점'이 새재와 조령의 지명어원이 됐다. 순우리말 '새'는 풀을 의미하고, 그 사례로는 '이엉새'와 '억새'가 있다. 지붕 위에 얻는 풀이 '이엉새'이고, 억센 풀이 '억새'이다. '조령'은 순우리말 '새'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지금도 조령 문경 사면의 지명은 '초곡'(草谷) 또는 '푸실'로 부른다. '초곡'은 '푸실'을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래는 '풀실'이었으나 ㄹ음 탈락현상으로 '푸실'이 됐다. '풀'은 '草,' '실'은 골짜기(谷)라는 의미다. 《고려사》에는 2인자 신돈(辛旽·?-1371)이 수도를 개경에서 우리고장 충주로 몰래 옮기려다 공민왕에게 꾸지람을 듣는 장면이 등장한다. 신돈은 충주가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안전하고, 또 남한강 물길을 통해 경상도 세곡을 용이하게 운반할 수 있는 점을 고려했다. 조선 초기의 정부는 강경책보다는 온건책을 구사하여 부산포·내이포(지금의 진해)·
[충북일보] 1728년(영조 4)의 이인좌와 1755년(영조 31)의 유수원 역모사건은 30년 가까운 시간차가 나고 있으나 그 뿌리는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노론대 비노론의 정치적 대결이었다. 이때의 비노론은 소론과 남인들의 정치적인 연합을 의미하고 있다. 지난 회를 끝으로 영조 연간을 휩쓸었던 두 정치적인 사건을 성깃성깃 하게 살펴봤다. 그 와중에 엄벙둠벙 하면서 빼먹은 인물이 있다. 황진기(黃鎭紀)라는 인물이다. 그는 1728년(영조 4) 선전관(宣傳官)이라는 중앙정부의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그해 발생한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 선전관은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무반직으로 종9~정3품의 품계를 지녔으나, 그가 어느 단계에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가 김일경(金一鏡·1662∼1724)의 문인(제자)으로 추정되는 만큼 골수 소론계 인물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이명언(李明彦) 부자와 함께 밀서(密書)를 꿰맨 호복(胡服)을 입고 역모를 도모하였는데,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청나라로 망명했다. 흔치 아닌 망명사건이 발생하면서 영조 정부는 바짝 긴장했다. 당시 조정은 망명한 황진기(黃鎭紀)가 처벌된 무리와 연락, 후에 다시 2차 역
[충북일보] 조선 영조-순조 연간을 산 인물로 성대중(成大中·1732-1809)이 있다. 그는 서얼 출신이었으나 영조 탕평책의 일종인 서얼통청운동에 의해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박제가·박지원 등 당대 실학자들과 교유했다. 서얼청통(庶孼通淸)은 서얼이 청요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것을 의미한다. 청요직(淸要職)은 홍문관·예문관·춘추관 등 지위는 그리 높지 않지만 학식과 덕망이 있어야만 오를 수 있는 직책이었다. 성대중의 저서 가운데 《청성잡기》(靑城雜記)가 있다. '청성'은 그의 호이다. 청성잡기에는 조서후기 심약이라는 인물과 기생 첨섬(翠蟾)에 얽힌 이야기가 등장한다. 취섬은 함양 출신 기생으로 미모와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서울로 뽑혀갔다. 그녀가 서울에서 지낸 지 몇 년 만에 협객과 한량들 간에는 취섬이 사는 골목을 모르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길 정도였다. 취섬이 서울 생활을 마치고 함양에 돌아올 때 심약이 이웃 고을 수령으로 있으면서 그녀를 소실로 삼았다. 그러나 얼마 뒤 심약이 그의 형 심악의 역모에 연루되어 먼 북쪽 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됐고, 그러자 취섬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그곳까지 따라가 정성을 다해 심약을 섬겼다. 심약이 남해로
[충북일보] 한때 국가 개혁을 위해 귀머거리가 된 자신과 필담(筆談)을 나누던 일국의 지존. 유수원(柳壽垣)은 그 지존(영조) 앞에서 처음에는 춘천 교영계 역모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부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답변을 기록한 실록 기사는 '마침내 형신하니, 유수원이 승복하여 공초하기를'(영조실록 31년 5월 25일자)로 시작된다. 형신은 죄인을 형구(刑具)로 고문하면서 신문(訊問)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조사 방법을 일컫는다. 이 단계는 심한 고문이 아닌 주로 정강이 부분을 때렸다. 과도한 고문으로 인한 살인을 예방하기 위한 방책으로 국문도 하루 세 차례 이상 형신을 할 수 없었다. '무릇 형신은 하루에 한 차례를 넘지 못하며, 추국에서는 두 차례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심문의 첫 단계로, 자백이 나오지 않으면 고문의 강도는 급속히 강해졌다. 심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유수원은 이렇게 답했다. "신은 신치운·박사집과 친밀하게 사귀어 침체된 바가 신치운과 다름이 없게 되었는데, 이는 오로지 조제(調劑)한 소치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성상을 비방하고 아래로는 조제한 여러 신하를 욕하여 몰래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쌓아왔습니다."- 유수원의 입
[충북일보] 1755년(영조 31)에 발생한 춘천 교영계(敎英契) 역모사건의 명단에 어찌된 이유에서 인지 유수원(柳壽垣)의 이름이 등장했다. 당연히 유수원은 국문장으로 끌려 나왔다. 조선시대에는 반란·모역 등의 중대 범죄가 발생할 경우 왕의 명령에 의해 임시 심문기구인 국청(鞠廳)을 설치하고 죄를 캤다. 이때의 '鞠' 자는 '국문할 국' 자이다. 국문은 대개 2종류로 분류됐다. 임금이 친히 심문을 하면 친국(親鞫), 임금이 빠진 채 의금부·사헌부가 심문을 하면 정국(庭鞫)이라고 불렀다. 모반 등 국왕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건은 주로 친국이 이뤄졌다. 여기에는 의금부 당상관 ·사헌부 및 사간원의 관원, 좌 ·우포도청의 대장 등이 배석했고, 이 가운데 대신 한 사람을 위관(委官)으로 명하여 시행하였다. 송강 정철도 정여립사건 때 위관을 맡았다가 두고 두고 영남사림(동인)의 원망을 산 바 있고, 실제 그 때문에 적지 않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영조는 내사복에서 유수원을 친국했다. 내사복은 본래 임금의 말과 수레를 전담 관리하던 관청이나 때때로 친국 장소로도 사용됐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다. 유수원·조재민(趙載敏) 등에게 물었는데, 조재민은…
[충북일보] 유수원은 그의 나이 50살이 되는 해인 1744년(영조 20) 벼슬길에서 물너났다. 이후 10년 동안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초야에 묻혀 야인 생활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가 노론이 득세하면 시기인 점을 감안하면 타의에 의해 야인생활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이 실록에 다시 등장한 것은 1755년(영조 31) 5월 무렵이었다. 이 해 과거시험 답안지에 정답대신 영조를 부정하는 글을 써내는 심정연(沈鼎衍·?-1755)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1728년 이인좌의 난(무신란)에 연루돼 처형된 심성연(沈成衍)과 심익연(沈益衍)이 그의 형들이었다. 당시 두 살배기였던 심정연은 자라면서 형들의 얘기를 들었다. "익명서는 과연 신이 만들었고, 그 가운데 몇 사람은 바로 신의 원수입니다. 신은 심성연과 심익연의 아우로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훈척(勳戚)인 사람과 임금의 권우(眷遇)를 받는 사람은 모두 미워하여…."- 그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뒤에 교영계(敎英契)라는 춘천지역의 사당조직이 자리잡고 있음이 밝혀졌고, 당시 훈장은 유봉성(柳鳳星)이라는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훈장은 일정 수준의 학식과 교
숙종대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된 것은 젊은 서인들이 남인에 대한 정치 보복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유교의 도리이 맞느냐, 안 맞느냐를 논쟁하는 사문(斯文) 시비가 일어났다. 그러나 경종대 들어 왕통에 관한 시비가 본격화됨으로써 기존의 사문시비는 충역(忠逆)시비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소론은 창당정신을 저버리고 노론에 대한 극심한 정치 보복을 자행했다. 이것은 노론도 마찬가지여서 승리한 자가 충(忠)이 되고, 패비한 자는 역(逆)이 되면서 공존의 정치는 사라지고 독존만이 횡행하였다. 숙종~경종 연간은 사화의 절정기였다. 1721년(경종1)에는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노론은 연잉군(후에 영조)의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조선시대에는 두번의 왕세제가 탄생했다. 태종 이방원이 정종 때, 그리고 영조가 경종 때 세제로 책봉됐다. 노론은 나아가 병약하며서 후사가 없는 경종을 대신해 연잉군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리청정은 왕이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에 세자나 세제가 왕 대신 정사를 돌보는 것을 일컫는다. 경종은 이를 수용했지만 조태구(趙泰耉·1660-1723), 유
[충북일보] 충주목 출신 유수원(柳壽垣·1694-1755)의 주장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초등교육 기회 균등론'이다. 조선의 교육은 서원과 서당이 중심이었지만 구한말이 되면 그 명칭이 달라진다. 변천사를 살펴보면 1895년 '소학교', 1906년 '보통학교', 1941년 '국민학교' 등의 명칭이 등장했다. 일제는 '충량한 일본국의 신민(臣民), 곧 국민(國民)'을 만들려는 교육적 목적으로 1941년 3월 '보통학교'를 '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이 명칭은 반세기 넘게 사용되다가 1996년 3월 1일부터 지금의 '초등학교'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18세기 중반까지 생존했던 그가 초등학교라는 명칭을 구사했을리는 없다. 그는 '나이 4-5세', '15세 이전' 등 학령(學齡)의 개념을 구사했다. 그의 초등교육 기회 균등론은 중국과의 비교에서 출발한다. 유수원은 중국의 교육관습 가운데 공부를 하다가 그쪽에 장래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농(農)ㆍ상(商)ㆍ공(工)으로 전환하는 것을 무척 높이 샀다. 한 마디로 모두가 선비가 되려는 것은 국가적으로 손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아들의 나이 4~5세가 되면 곧 글방 선생에게 나
[충북일보] 한국의 자본주의가 언제 시작되었는가라는 물음은 지금도 논쟁이 되고 있다. 일부 사학자는 구한말에 자본주의 맹아(싹)가 움트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론내지 자본주의 내적 발전론이다. 반면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군은 일제가 자본주의를 이식했다고 보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그러나 충주목 출신이면서 단양군수를 지낸 유수원의 《우서》(迂書) 일고나면, 적어도 구한말의 한반도에서 자본주의의 '새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유수원은 점포 자본주의라는 매우 독특한 이론을 주장했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점포를 육성·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이 주장의 골자이다. 그는 《우서》에서 '마판자(馬販子)와 배부상(背負商)들이 하루가 다하도록 분주히 다녀도 별로 팔지 못하고, 서울 입전(立廛)의 상인들이 눈이 빠지도록 손님을 기다려도 팔을 내젓고 지나가는 사람이 10이면 8~9나 되니, 이로써 보아 비록 공상(工商)을 성행시키고자 해도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우서 제1권)라고 자문했다. 인용문의 마판자는 말짐장수, 배부상은 등짐장수를 의미하고 있다. 그는 영세 규모로는 상업을 번창시킬 수 없다고 봤다. 나아가 그는 점사(점포)가 있어야
유수원이 언제부터 귓병을 앓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의 나일 30대 중반 무렵일 가능성이 높다. 영조는 무신란(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후 본격적인 탕평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영조는 소론의 경세가인 유수원을 경상도사, 태천(지금의 평북)현감 등에 잇따라 임명했다. 그러나 유수원은 귓병과 노모 숙환을 이유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청각 상실로 인한 실의를 《우서》 저술 등으로 극복했다. 《우서》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유수원의 또 다른 저서로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이 있다. 관료 선발에 대한 내용을 다룬 이 책은 1741년(영조 17)에 쓰여졌다. 특히 그 내용이 탕평책과 관련돼 있으면서 영조의 즉각적인 주목을 받았다. 영조는 유수원을 경연(經筵) 에 참석하게 했다. 경연은 임금이 신하와 더불어 유교 경전이나 국정 현안을 논의하던 제도를 일컫는다. 영조와 유수원 사이에 대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이때의 유수원은 청각을 완전히 잃은 상태로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임금이 말을 하면 배석한 신하가 한자로 써서 유수원에게 보이고, 유수원 역시 답변을 붓으로 한자를 써보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임금이 유수원을 소견하였다. 유수원은 유봉휘(柳鳳輝)
[충북일보] 조선의 실학파는 대략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학파와 상업을 중시하는 중상학파로 대별된다. 유형원·이익·정약용 등은 중농학파, 유수원·박지원·박제가·홍대용 등은 중상학파로 분류된다. 중상학파는 달리 이용후생학파 또는 북학파라고 불렀다. 이용후생은 중국 고문헌 《상서》에 나오는 표현으로 풍요로운 경제와 행복한 의·식·주 생활을 뜻하고 있다. 중상학파와 이용후생학파는 달리 북학파라고 칭했다. 북학파의 북학은 청나라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알기 쉬우나 그렇지는 않다. 『맹자』의「등문공장구(騰文公章句)」에서 유래했다. 남쪽의 낮은 문명 지역에 살던 초나라 사람인 진량(陳良)이 북쪽의 선진 문명을 배웠다는 의미에서 '북학'(北學)이란 표현이 생겨났다. 박제가가 자신의 실학서를 《북학의》(北學議·1778)로 이름지은 것은 이것과 관련이 있다. 박제가의 《북학의》와 유수원의 《우서》는 모두 조선후기 중상주의를 대표하는 실학서이나 약간의 차이가 있다. 박제가의 《북학의》는 대륙을 방문하고 와서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 청나라를 롤모델로 했다. 이에 비해 유수원의 《우서》는 스스로의 탐구와 직관을 바탕으로 서술했으면서도 한층 진보적인 상업이론을 담고 있다. 유수원이 《우서》
[충북일보] 조선시대 사간원 소속의 정언(正言)은 정6품으로 관품은 비교적 낮은 편이다. 그러나 임금에게 간쟁과 봉박을 하는 것이 주된 임무로, 권력은 막강했다. 따라서 정언으로 벼슬을 시작하면 고속 승진이 보장되면서 관료들 사이에 엘리트 코스로 인식됐다. 간쟁은 임금의 옳지 못한 처사나 잘못에 대해 직언하는 행위, 봉박은 임금의 잘못된 지시를 되돌려 공박하는 것을 일컫는다. 뿐만 아니라 정언은 임금과 국정을 논하는 자리인 경연에 참여했고, 인사문제와 법률 제정에도 관여했다. 유수원이 문과에 급제하고 처음 나간 벼슬자리가 정언이다. 그는 정언이 된지 얼마 안 되어 당시 영의정이자 소론의 거두인 조태구(趙泰耉)를 공격했다. "조태채(趙泰采)가 복법(伏法)될 때는 감히 천 리 길에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짐바리에 가득하게 부의물을 보냈으니, 만약 일분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을 차마 했겠습니까. 결단코 조적(朝籍)에 둘 수 없으니, 빨리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법을 베풀게 하소서."- 조태채라는 인물이 죄를 지어 사형(복법)을 당했는데, 그런 범법자에게 어찌 부조를 짐바리 가득히 할 수 있느냐는 뜻이다. 조태구와 조태채는 사촌간이다. '사
[충북일보] 오늘부터 농암(聾菴) 유수원(柳壽垣·1694-1755)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새로운 주제이지만 1728년 무신란(이인좌의 난)과 정치·사회적인 흐름이 연결돼 있다. 그는 조선후기 이용후생(利用厚生) 학파의 선구적 인물로, 《우서》(迂書)라는 실학서를 남겼다. 유수원은 호를 '농암', 즉 귀머거리라고 지을 정도로 신체적 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충추 출생, 단양·문의현감 역임 등 우리고장과 큰 인연을 지니고 있으나, 지역 차원의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유수원의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남로(南老)이다. 그는 형조정랑을 지낸 유성오(柳誠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간 유상재(柳尙載)이고, 아버지는 유봉정(柳鳳延)이며, 어머니는 김징의 딸이다. 이처럼 유수원家는 명문사족의 DNA를 지니고 있었으나, 문제는 당색(黨色)이 소론 그 가운데서도 준론(峻論)이라는데 있었다. 서인은 숙종대에 이르러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노장파인 송시열의 노론과 소장파인 소론으로 분화됐다. 이후 소론은 다시 영조에 강경했던 준론(혹은 준소)과 완론(완소)으로 나뉘었다. 유수원은 충청도 충주목에서 유봉정의 맏아들로 출생했으나 유년기는 한양에
[충북일보] 영조 39년(1763) 이번에는 내륙이 아닌 섬 제주도에서 이른바 '심내복(沈來復) 역모사건'이 발각됐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심내복, 조영득(趙榮得), 유동혼(柳東渾), 이익좌(李翼佐), 윤몽정(尹夢鼎), 신정관(申正觀) 등 십 수 명이 결탁,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심내복은 과거 답안지에 역모의 글을 적어낸 심정연의 조카이고, 경술년 사건으로 흑산도에 유배된 심익년의 아들이다. 경술년 사건은 무신란 사건과 관련에 그 잔존세력이 또 다시 국문을 받고 절도 등으로 유배된 사건으로 당시 아버지 심익년은 흑산도로, 아들 심내복은 제주도로 유배됐다. 심문 과정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장사치로 위장시켜 바다를 건너가서 먼저 호남의 고을을 습격하고 거기에서 군기와 군량을 취득한 다음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서 묘사(廟社)를 범하여 불을 지르고 귀양가 있는 종신 이훈(李壎)을 추대키로 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서두에 거론한 인물은 대부분 연좌죄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를 온 인물들로, 이중에는 신정관이라는 이름도 보인다. 그는 1728년 무시란 때 이인좌에 의해 충청병사에 임면된 신천영(申天永)의 조카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른바 '연불만지율'(年不滿之律)이라는 법이
[충북일보] '과거시험 답안지에 정답대신 역모의 글을 써내다.' 이 희대의 사건은 나주괘서 사건이 정리된 영조 31년(1755)에 발생했다. 그것도 임금 영조가 친림하여 과거를 보는 가운데 발생, 당시 조정에 엄청난 충격파를 안겨줬다. "임금이 바야흐로 친림하여 시사(試士)하는데 한 시권(試券)이 처음에는 과부(科賦)를 짓는 것처럼 하다가 그 아래 몇 폭에다가는 파리 머리만한 작은 글씨를 썼는데 모두 난언패설이었다. 고관이 앞으로 나와 그 글을 진달하니, 임금이 열어 보기를 명하였는데…."- 인용문의 시권은 과거시험 답안지를 의미하고 있다. 이날 과거에서는 시권 뿐만 아니라 역모의 내용을 적은 상변서(上變書)도 함께 발견됐고, 이 내용을 본 영조는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또 위소(衛所)의 하리(下吏)가 시권을 축(軸)으로 만들 때 과제(科題)를 쓰지 않은 한 종이를 보았는데 첫 행에 '상변서(上變書)'라 쓰여 있었으나 그의 이름은 없었다.(…) 임금이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며…."- 회한과 분노의 감정이 뒤범벅이 된 영조는 "종이 가득히 장황하게 쓴 것이 음참(陰慘)하기가 헤아릴 수 없어 비단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이…
[충북일보] 무신란(영조 4년·1728)은 일단락 됐으나 여진은 계속 됐다. 영조 31년(1755) 전라도 나주에서 괘서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1월 20일 나주객사 망화루(望華樓)의 동쪽 두번째 기둥에 흉서가 내걸렸다. 괘서에는 "백성들은 곤궁한데 더욱 침학을 당하고 있으니 구제하고자 한다. 군사를 움직일 것이니 백성들은 놀라지 말라"는 내용이 익명으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전라감영은 윤지(尹志·1688∼1755)라는 인물을 괘서의 범인으로 자연스레 지목했다. 마을 사람들이 윤지의 짓이라고 수군거렸고, 가노(家奴)들 또한 자기 상전의 짓이라고 진술했다. 윤지는 소론의 가문으로 낙인찍혀 제주에서 10년, 나주에서 20년 등 당시 30년 가까이 유배생활을 하던 인물이었다. 소론의 영수였던 그의 부친 윤취상(就商·?-1725)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김일경 당여(무리)로 지목돼 국문을 받고 처형됐다, 그는 유배생활이 길어지자 점술사 정수헌(丁壽憲)이라는 인물을 가까이 하면서 유배에서 풀려나는 시기를 예상해 보는 점을 자주 쳤다. 《추안급국안》이라는 당시 수사 기록에 의하면, 술사 정수헌은 윤지가 '田'자를 고르자 "'口' 자가 '十'자를 머금고 있으니 10년 동안 헛
분무원종공신이 선전된지 1년 후 영조 임금에게는 《서정록》이라는 책자가 올려졌다. 이 책자는 분무원종공신에서 제외된 사람들을 추가로 공신에 포함시키는 명담을 담고 있다. 공신 제외자들의 불만을 달래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당시 우의정 이태좌(李台佐)는 관료로서 불만을 쏟아냈다. "조정에서 공을 논하여 상(賞)을 행한 것이 이미 충분한데도 군교(軍校)들이 모두들 별단자(別單子)에 들지 못한 것을 가지고 원망하고 있으니, 상을 바라는 것이 너무 지나칩니다."- 영조는 이에 대해 "전례에 따라 만들어 군정(軍情)을 위로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로 《서정록》을 작성하도록 하명했다. 그 결과 무신란의 본산지인 청주지역 등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공신록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또 다시 크게 증가했다. 그 유형은 ①현재의 관품에서 승진하는 경우(가자·加資), ②노비 등 천민의 위치에서 면천되는 경우, ③국가부역을 일정기간 면제받는 경우, ④중인에서 양반이 되는 경우 등으로 분류됐다. ①과 관련된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청주(淸州)의 토포 군관 고윤창(高允昌)에게는 가자하며, 군뢰 이왕산(李往山)에게는 미포를 제급하라."-. 인용문 가운데 '토포'는…
공신은 국가에 공이 있는 자에게 내리는 칭호로, 정공신(正功臣)과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구분된다, 정공신은 대개 3등으로 나뉘고, 그 수는 적으면 5~6인 많으면 100여명까지 이르렀다. 정공신은 등급에 따라 공신에게 내려지는 특전·토지·노비 등의 지급 정도가 차이가 있었다. 이에 비해 원종공신은 그 공이 정공신에 미치지 못하나 다소의 공이 있는 자들을 역시 3등급으로 나눠 녹훈하였고 그 수는 적으면 9백여명, 많으면 최대 9천여명에 이르렀다. 조선 태조(이성계) 집권기에 발생한 개국원종공신의 경우 그 수가 무려 1천2백여명에 이르렀고 1등급에게는 토지 30결과 노비 3口가 주어졌다. 전통시대에는 노비를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에 名이 아닌 口로 호칭했다. 이밖에 개국원종공신 2등급에게는 토지 15결, 3등급에게는 물질적인 혜택은 없고 특전만 내려졌다. 그러나 이후로는 원종공신에 대한 토지와 노비의 지급은 없어지고 특전만 3등급으로 나누어 내려졌다. 영조 4년(1728) 무신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에게는 분무공신(奮武功臣)의 공신호가 주어졌다. 분무공신 1등에 오명항(吳命恒·1673~1728), 2등에 박찬신(朴纘新)·박문수(朴文秀)·이삼(李森
"전전하여서 문의의 茂陵亭에 갔었는데, 또한 李愼의 집 앞뒷산에 피난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았 습니다. 內外 松谷의 5, 6 촌락이 소요스러웠던 일이 과연 있었습니다. 兵營에서 저를 체포한 것은 제가 이 말을 전한 때문인 것 같은데 이는 너무나 원통한 일입니다. 저는 박취림에게서 들었습니 다만, 言根은 12인을 거쳤습니다."-인용문은 문의 괘서사건 혐의자의 한 명인 우규장이 신문 과정에서 진술한 내용이다. 그는 향리 출신의 사족으로 '松谷의 5, 6 촌락이 소요스러웠다'고 밝혔다. 그의 공초에서 보듯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확산됐으로 최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대략 두 가지가 그 이유로 꼽히고 있다. 첫째, 저항을 준비하고 실행함에 있어서 조직체계를 전혀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괘서 후에 구체적으로 저항을 이끌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둘째, 자금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거사실행을 담보할 수 있는 군사적 뒷받침이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이지서는 20년 전에 청주에서 일어난 무신란(이인좌의 난)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고, 또 이를 부분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는 '무신란'이라는 명칭을 두 번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이지서가 말하기를, '
1748년(영조 24) 문의 이지서(李之曙) 괘서사건에는 다양한 인물의 군상이 등장하고 있다. 이영손(李榮孫), 박민추(朴敏樞), 박철택(朴哲澤), 박험백(朴驗白), 김재형(金再炯), 순세재(順世才), 오수만(吳遂萬), 오명후(吳命·), 이항연(李恒延), 박취문(朴就文), 이태위(李泰渭), 우규장(禹圭章). 당시 영조는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이들을 친국(親鞫)했고, 거명된 이름들은 그 과정에서 불거져 나왔다. 이영손은 이지서의 아들이다. 박민추는 문의향교를 출입하던 교생(校生), 즉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박철택·김재형 등은 신분이 확인되지 않으나 신문 과정의 언어 구사력을 보면 사족(士族)으로 추정된다. 박험백은 박민추의 배다른 동생인 서얼이었고, 순세재는 역노(驛奴)였다. 오수만과 오명후는 부자간으로 사족층이었다. 이항연도 문의의 사족이었고 박취문과 이태위는 박민추의 사촌으로 무신란에 참여했다가 도망한 인물들이다. 이지서는 괘서사건을 일으킨 이유를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런 계획을 세운 것은 첫째는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에서 나라에 해를 끼치게 하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인심을 동요시켜 피란하게 되면 부자들의 곡식을 가난한 사람들이 얻어 먹을 수 있
영조 24년(1748) 3월에 발생한 이지서(李之曙) 괘서사건은 궁궐투서→와언 유포→청주 소요→문의 괘서 등의 순으로 전개되었다. 3월 17일 한양도성 궁궐에 괘서가 던져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4월 중순에는 충청도 청주에 "왜구가 곧 쳐들어온다"는 와언이 유포되면서 남부여대(男負女戴)의 피난행렬이 길을 메웠다. 곧이어 청주 인근 문의지역에 "문의 백성들은 어육(魚肉·물고기 밥)이 될 것이다. 倭人 같은데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오는데 물도 이롭지 않고 산도 이롭지 않고 弓弓이 이롭다"는 비기(秘記)가 유포되면서 고을이 텅 빌 지경이 됐다. 지금까지의 내용 전개는 누군가가 사건을 면밀히 기획하고 이를 행동에 옮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충청감영이 수사에 나섰고 그 결과, 이지서라는 문의지역 50대 사족(士族)이 범인으로 체포됐다.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호서의 요적 이지서(李之曙)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대궐에 투서한 적은 끝내 추포하지 못했는데, 여름에 청주·문의 사이에 괘서의 변이 발생하여 몇 고을에 계속 소요가 일었으므로 짐을 싸서 지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려(州閭)가 모두 텅 비었다. 이지서가 감영에 의해 기포되었는데,…
[충북일보] 정감록(鄭鑑錄)은 약간 개념이 모호한 예언서이다. 감결(鑑訣), 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東國歷代氣數本宮陰陽訣), 역대왕도본궁수(歷代王都本宮數) 등 역대의 비기를 통칭하여 정감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내용의 중심을 이루는 감결만 가리켜 정감록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중 정감록의 원전으로 인식되고 있는 감결은 이심(李沁)·이연(李淵)이라는 인물이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과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沁이 말하기를 백두산에서 내로운 맥운이 금강으로 옮아가고 태백산맥에 이르게 되니 산천鍾氣가 계룡산으로 흘러들어가서 鄭氏의 팔백년 도읍지가 될 것이고, 그후에 가야산으로 흘러들어가니 趙氏의 천년 땅이 되고, 다음으로 전주 范氏(범씨)의 육백년 땅이 된다. 송악에 이르면 王氏가 도읍을 부흥할 것이다."- 정감록은 단순 예언서를 뛰어넘어 역성혁명의 구체적 대상, 각 왕조의 교체순서, 왕조의 존속시간 등을 풍수지리를 곁들여 자세하게 설정하여 놓았다. 정감록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존속기간은 300~500년 사이로 18세기에 이르면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는 것으로 예언돼 있다.문의현 이지서의…
1748년(영조 24) 한양도성의 궁궐투서 사건이 일어난 그 해에 청주와 문의현 지역에서는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하였다. "왜구가 또 처들어온다"는 소문이 돌면서 男負女戴(남부여대대)의 피난민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남부여대는 남자는 짐을 등에 지고, 여자는 짐을 머리에 인다는 뜻이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호중(湖中)에 한 괴인이 있어 요망스런 말을 창도하기를, '왜구가 곧 쳐들어 온다.' 하여, 인심이 소동되는 것은 물론 가족을 이끌고 피하여 달아나는 사람까지 있다고 합니다." 하고….'- 인용문 가운데 湖中은 청주지역 일대를 지칭하고 있다. 여느 속담의 표현처럼 발(足) 없는 말(言)이 천리를 갔다. 소문은 경기도 지역으로까지 확산되면서 산골짝으로 숨는 사람도 생겨났다. "좌윤 홍상한(洪象漢)은 말하기를, "들리는 바에 의하면 상하의 인원들이 모두 짐을 꾸려 메고서 서 있는가 하면, 산골짝으로 숨는 자도 있다고 합니다. 호중만 그럴 뿐이 아니라 기내(畿內)가 더욱 극심하다고 하니, 마땅히 기포(譏捕)해야 될 것입니다."- 인용문 가운데 畿內는 경기도를 지칭한다. 그러자 영조가 "이는 익명서와 마찬가지이니, 엄히 방지하는 방도가 없을…
[충북일보] "이렇게라도 나서야 60년 이상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풀릴 것 같아요." 해마다 4월이 오면 가슴에 맺혀 있는 한(恨)을 풀지 못해 몸살을 앓는 80대 어르신들이 있다. 1960년 청주공업고등학교 2학년 학생신분으로 4·19 학생혁명운동을 주도하고도 국가로부터 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한 김태형(83·옥천읍), 김영한(82), 강건원(83), 곽한소(83), 이영일(82)씨가 그들이다. 김 씨 등은 지난 17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국가보훈부 정문 앞에서 청주지역 고등학생 4·19 연합시위 공적재심사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날 성명서 발표 자리에 곽한소 씨는 병환으로 입원 중이어서 참여하지 못했다. 이들은 이영일 씨가 낭독한 '4·19학생혁명운동 전국 3대 발원지 청주공고'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1960년 당시 청주공고 2학년생이던 우리들은 4월 3일 청주시 수동 213번지 김태형의 자취방에 모여 자유당 독재정권의 3·15 부정선거규탄 학생시위운동을 모의하고, 4월 13일 시위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또한 "4월 16일, 4월 17일에도 시위를 벌였으며 4월 18일 청주지역 학생연합 시위운동에 참여했다"며 "4·18 청주지역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속보=청주시와 시내버스 준공영제 참여업체, 노조위원회의 임금인상 논의가 오는 6월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지난 17일 충북지방노동위원회가 임금인상을 위한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 준공영제 협약사항을 개선하라고 청주시준공영제 관리위원회에 권고했기 때문이다. 준공영제 협약사항이 정하고 있는 임금체계에 대해 각계의 이야기를 듣고 변경을 검토하라는 취지다. 현재는 준공영제 시행협약서와 '청주시 시내버스 준공영제 운영에 관한 조례' 중 9조 16항에 '인건비 지원액은 공공기관 임금인상률의 ±20%를 초과하지 않는다'라는 조항이 담겨있어 임금인상에는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권고안에 따라 준공영제 관리위원회는 자체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공론화를 위한 준비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위원회에 소속되는 위원들은 시에서 2명, 업체에서 2명, 노조에서 2명, 시의회에서 2명 등 모두 13명 정도로 구성된다. 이들은 청주지역 시내버스 운수종사자들의 노동환경 등을 조사하고 임금인상이 타당한 지 검토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또 임금인상의 경우 시민들의 세금을 통해 지원되다보니 시민들에게 위 사안을 알리고, 의견을 청취하는 활동도 할 것으로 보인다. 충북지방노동
[충북일보] 송기섭 진천군수가 진천군 살림을 맡은 지 9년 차에 들어섰다. 3선 군수지만 '아직 진천을 위해 하고 싶은 게 많다'며 남다른 지역 사랑과 지역발전에 대한 사명감을 자랑하고 있다. 취임 8년과 민선 8기 반환 포인트를 목전에 둔 송기섭 군수를 만나 취임 당시 목표로 한 군정의 진행 상황과 평가, 남은 시간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들어본다. ◇진천군수로서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떻게 평가하는가.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는 게 숫자를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9만 명 진천군민의 선택을 받은 지난 2016년부터 개인보다는 지역의 발전과 군민의 삶을 우선순위에 두고 몰입하다 보니 정신없이 일만 했던 것 같다. 내가 판단한 작은 부분이 지역주민에게는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공직자의 시선에서 결정한 내용이 군민 눈높이에 맞는 것인지 현장에 나가 군민과 대화를 나눠야 했으므로 항상 시간은 부족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철도와 인구, 경제 등 어느 지방정부보다 비약적인 성장을 군민, 군 공직자와 함께 이룰 수 있었고,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지난 8년간 가장 값진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