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불교의 믿음은 상생(上生) 신앙과 하생(下生) 신앙으로 구분된다. 죽었을 때 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것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상생신앙이다. 반면 메시아가 강림해 내가 살고 있는 땅을 극락으로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생신앙이다. 지난날 석가모니는 제자 미륵에게 장차 성불을 해, 사바세계(현재의 땅)의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할 것을 수기(授記)하였다. 수기는 부처가 수행자에게 미래의 깨달음에 대하여 미리 지시하는 예언이나 약속을 일컫는다. 불교 경전의 하나인 《미륵삼부경》에 따르면 현재 미륵은 성불을 한 후 도솔천에서 하생 시기를 기다리며 선정에 들어 있다. 이것을 조각으로 표현한 것이 그 유명한 미륵반가사유상이다. 이 땅의 '가짜 지도자들'은 현재의 삶에 지친 백성을 현혹하기 위해 미륵의 강림사상을 자주 교묘히 이용했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그러했고, 《정감록》에 등장하는 진인(眞人)도 미륵의 메시아 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11년 평안도에서 난을 일으킨 홍경래가 내세운 메시아도 정진인(鄭眞人)이었다. 미륵사상이 등장하는 배경에는 시간적으로 공통점
선조들은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이치로 산세는 물[강]에 이르러 그 흐름을 멈추고,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물은 산을 뛰어넘지 못한다. 이 같은 현상은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연이어 흐르기 때문에 비롯된다. 모든 강은 수계가 같으면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진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같은 수계(水系)라 해도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이 같은 '부분칭'은 교통 미발달로 사람들의 행동반경이 좁았고, 따라서 산 넘어 저 먼 곳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몰랐기 때문에 비롯됐다. 임진왜란 때 경상도 군량미를 운반하는 것과 관련하여 《선조실록》에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충청도 금강(錦江) 일대의 물이 위로는 형강(荊江)과 연결이 되고 아래로는 바다에 닿아 있어 조운할 수가 있는데, 물이 많을 때면 형강 이상까지 올라갈 수 있고 물이 얕더라도 연기(燕岐)까지는 댈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경상도 초입인 금산 지방까지는 수삼일 일정에 불과하고 길도 그리 험준하지는 않아, 조령에 비하면 자못 편리하고 가깝습니다.'- 인용문의 형강은 많이 듣던 강이름이 아니다. 연기 상류에 위치하는 것으로 여겨지나 구체적인 위치는…
조선 영조 9년(1753) 단양 읍내에 우화교(羽化橋)라는 다리를 세운 인물은 당시 군수 이기중(李箕重·1697~1761)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영조 10년 다리 건립을 기념해 우화교 신사비(新事碑)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이는 당시 우화교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그만큼 컸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당시 우화교는 죽령과 한양을 잇는 도로, 즉 봉화대로에 위치하면서 경상도 북부 사람들에게 상경과 귀향에 따른 교통 편의를 제공했다. 현재 우화교 비문의 일부에는 '圻湖之客循竹嶺而左者 必由是達焉 然登橋而望 林峀幽O O沙脩潔 如入天台武陵之路 故好事者名之曰羽化'(기호지객순죽령이좌자 필유시달언 연등교이망 임굴유O O사수계 여입천태모릉지로 고호사자명지왈우화) 명문이 보인다. 대략 '기호의 나그네가 죽령을 넘으려면 이곳(우화교 지칭)을 반드시 거쳐야 하고 다리에 올라 바라보면 산림은 그윽하고 개울 모래는 깨끗하니 마치 천태 무릉도원에 이르는 길과 같다. 호사가들은 이 다리의 이름을 우화라고 부른다' 정도가 된다. 우화교 신사비는 화강암 재질에 높이는 115㎝ 정도이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옛 군청 자리로 옮겼다가 1990년 하방리에 수몰이주기
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과 돌계단. 그 계단을 오르면 손오공 이미지를 지닌 돌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시선을 좌우로 돌리면 계단 면석에 돋을새김(양각)을 한 화문(花紋), 즉 꽃문양을 만날 수 있다. 전통건축에서 시선과 수평되게 볼 수 있는 석부재는 면석(面石), 반면 시선을 아래로 향해야 볼 수 있는 면은 갑석(甲石)이라고 한다. 사람은 직립하는 까닭에 거북의 등을 보려면 시선을 아래로 향해야 한다. 그래서 갑석이다.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따라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법주사 대웅보전 계단면석의 문양을 연꽃으로 여기고 있다. 법주사 종무소 관계자도 전화통화에서 "지금까지 연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 꽃문양을 연꽃으로 보기에는 납득되지 않는 면이 있다. 연꽃은 꽃잎이 겹을 이루면서 수직으로 핀다. 국보 제 64호인 법주사 석연지의 연화문도 그런 문양으로 돋을새김을 하였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이 꽃문양을 법주사 창건설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길상초(吉祥草)로 보고 있다.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인 길상초는 여름과 가을에 걸쳐 연한 자주색의 꽃을 10cm 정도의 꽃대 위에 피운다. 고대 불교경전
현재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수몰기념관 경내에는 도유형문화재 제 80호인 '우화교 신사비(羽化橋 新事碑)'가 위치한다. 독특한 이름의 이 비는 '우화교를 새롭게 놓고 세운 비'라는 뜻을 지닌다. 비는 화강암 재질에 높이 115m의 크기의 제원을 지니고 있다. 우화교는 조선시대 경상도 사람이 죽령을 넘어 한양으로 향할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매우 중요한 교량이었다. 그런 우화교의 '우화'는 설화에 의하면 다리를 건널 때 날개가 돋아난다, 즉 선인(仙人)이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충주댐이 수몰되기 전의 일대는 주변 숲과 단양천이 어울어지면서 마치 선경(仙景)의 모습을 연출했다. 이때 다리를 건너는 모습은 마치 날개가 달린 선인같다고 해서 우화교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우화교는 조선시대 언제인가 대홍수로 인해 파괴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 우화교가 그려져 있는 것을 감안하면 구한말까지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우화교 곁에 있었던 우화교 신사비는 충주댐이 완공되면서 지난 1985 옛 군청 자리인 단성면 상방리 97번지로 옮겨졌다. 이후 다시 수몰기념관 경내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때 우화교를 세운 인물은 당시 단양군
'꽃은 5∼8월에 검은 홍자색으로 피는데, 잎겨드랑이에서 자란 긴 꽃자루 끝에 위를 보고 1개씩 달린다. 열매는 달걀 모양이며 꽃받침과 암술대가 남아 있다. 종자는 물 속에서 익는다. 우무 같은 점질로 싸인 어린 순을 식용한다. 어린 잎은 지혈·건위·이뇨에 약용한다.' 제천 의림지의 명물인 순채(蓴菜)에 대한 식물학적인 설명이다. 제천 순채는 문헌상 조선 전기부터 등장한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제천의 토산(土産)으로 신감초(辛甘草)·순채·홍화(紅花) 등을 기술하였다. 그러나 《세종실록》 지리지는 순채와 제천 의림지와의 관련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의림지와의 관련성은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처음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순채[蓴] 의림지(義林池)에서 난다"라고 표현, 그 출처를 분명히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제천 의림지 순채는 조선 문인들의 단골 시주제가 됐다. 조선후기의 문신학자로 《농암집》을 지은 김창협(金昌協·1651∼1708)이 있다. 그는 '자익과 함께 의림지에서 시를 짓다'라는 시에서 제천과 의림지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넓디넓은 푸른 못 그리 아니 맑은데 / 교룡이며 어류들 생명 부쳐 살아가네 /
고려 성종 때의 제천 별호(別號·특별 명칭)인 '의천(義川)'과 전통시대 축조된 의림지(義林池)는 '의' 자를 어두에 공유하고 있다. 이는 두 지명이 상관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은 이와 관련하여 "의림지의 본래 지명은 '임지(林池)'였는데 여기에 '의(義)' 자가 붙어 의림지가 됐다"고 서술하고 있다. 대전은 이때의 '의' 자를 성종 때의 별호인 '의천'에서 비롯된 것으로 부연 설명하고 있다. 만약 이 설을 따른다면 제천 의림지의 본래 이름은 '임지'였으나, 별호 '의천'이 생겨난 후 지금의 이름인 '의림지'를 갖게 된 것이 된다. 의림지의 작명 시기가 곧 축조 연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 있으나 의림지의 역사성은 그만큼 짧아지게 된다. 조선 세종~성종 연간의 인물로 홍윤성(洪允成·1425~1475)이 있다. 그는 수양대군(후에 세조)이 일으킨 계유정란 때 한명회의 살생부대로 철퇴를 휘두른 인물로 우리고장 보은 회인 출신이다. 그가 경연(經筵)에 나가 성종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조선시대 경연은 임금과 대신이 국정의 현안과 유교 경전에 대해 이야기는 나누는 정학(政學) 토론의 공간이었다. 성종: "연안(延安)의 남대
[충북일보] 돌계단은 전통 건축에서 디딤돌, 계단면석, 소맷돌, 지대석 등으로 구성된다. 디딤돌은 발바닥이 닿는 면으로 한 칸 한 칸 디디고 올라가는 돌, 계단면석은 양측면을 막은 판석을 말한다. 그리고 지대석은 계단 맨아래 위치하는 돌로 땅과 접촉하고 있고, 소맷돌은 계단면석 위에 올려져 있는 양쪽의 돌난간을 말한다. 소맷돌은 40도 내외의 경사를 이루는 것이 보통이나 이를 설치하지 않는 계단도 있다. 그러나 경사가 심하고 디딜돌의 수가 많을 경우 보행자 안전을 위하여 소맷돌을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소맷돌 아래쪽 끝에는 법수(法首)로 불리는 기둥석이 세워지기도 하고 그 위에 귀면, 동물, 연꽃 등의 조각이 장식되는 사례가 많다. 충북 불교의 종가인 속리산 법주사를 찾으면 대웅보전을 만날 수 있고, 여기에도 여느 대형 사찰 건물처럼 돌계단이 설치돼 있다. 그리고 대웅보전 돌계단을 무심코 오르다 보면 소맷돌 끝에서 원숭이 조각상과 마주친다. 원숭이는 동남아시아와 일본에 분포하고 있는 포유동물로 우리나라에는 살지 않는다. 따라서 법주사 경내에 불쑥 들어와 있는 원숭이 조각상은 묘한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인도신화에 '하누만'(Ha
병자호란(1636) 때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국제정세를 보는 눈이 달랐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유입된 서양문물을 보고 개방과 개혁만이 조선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동생 봉림대군에게 청나라는 오랑캐 국가로 단지 복수의 대상일 뿐이었다. 소현세자의 급서와 부왕 인조의 승하로 보위에 오른 봉림대군(후에 효종)은 포병 10만명 양성을 계획하는 등 북벌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색(色)도 멀리할 정도였다. 나아가 같은 북벌론자인 우암 송시열을 이조와 병조판서에 동시 임명, 북벌을 진두지휘토록 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의 북벌은 이른바 관념론적인 북벌로 효종의 군사적인 북벌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이는 효종 서거 후 예송논쟁이 두 차례나 일어난 것에서 그대로 입증된다. 우암은 속으로 전전긍긍하였다. 당시 정치 지형은 효종과 송시열이 이끄는 산당(山黨)이 군사적인 북벌을 매개로 암묵적인 연합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북벌의 반대는 곧 두 권력 관계의 파탄을 의미했다. 당시 송시열·송준길 등은 산당, 한양을 거주지로 했던 김육(金堉) 등은 한당(漢黨)으로 불렸다. 전자는 대동법 시행을 반
[충북일보] 속리산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을 둘러싸고 최근들어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사용된 재료에 따라 시멘트 미륵대불, 청동미륵대불, 금동미륵대불 순으로 불리워져 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인 김복진은 1939년 시멘트 미륵대불을 제작했다. 그리고 월탄스님이 주지로 있던 1987~1990년 사이에는 청동미륵대불, 석지명 스님이 주지로 있던 2000년에는 청동에 금박을 입히는 개금불사가 진행됐다. 이후 청동색 녹이 배어나오면서 금년 4월까지 3번째 개금불사가 진행됐다. 금동미륵대불은 말 그대로 금동+미륵+대불의 조합어이다. 일련의 진행을 보면 법주사는 불가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이것들에 집착(?)을 보이고 있다. 금동은 곧 황금색을 의미하고, 따라서 석불, 철불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불상은 황금색을 나타내고 있다. 황금색에는 부처의 이른바 32길상(吉相)이 관여한다. 32길상은 《중아함경》과 《방광대장엄경》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른바 부처님 외모에 관한 규정이다. 정유육계(頂有肉髮), 나발우선 기색감청(螺髮右旋 其色紺靑), 액광평정(額廣平正) 등의 표현이 있다. 순서대로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 '소라같은 머리칼
대한불교조계종 산하에는 25개 교구가 존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속리산 법주사(法住寺)는 제 5교구 본사로, 도내에만 60여개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종갓집격인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이 창건하였고, 776년(혜공왕 12)에 진표(眞表)가 중창했다. 법주사의 법주는 '법이 머무른다'는 뜻을 지니고 있고, 이는 창건 설화와 관련이 깊다. 창건주 신라의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고, 따라서 '법주사'라는 사찰명을 지니게 된 것으로 구전된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설화로, 사찰명 '법주사'가 역사 기록에 집중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고려시대부터 이다. 법주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철기(鐵器)에는 '統和二十四年歲次 / 丙午正月▨▨成幢 / 棟法▨▨▨▨▨▨'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해석하면 '통화(統和) 24년째 되던 해인 병오년 정월 일에 당(幢)을 주조하여 만들었다. 동량(棟樑)은 법▨(法▨)이다. ▨▨▨▨.' 정도가 된다. 명문 '法▨' 가운데 뒷글자가 마모돼 있어 '住' 자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나 전문가들은 '住'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통화 24년째의 병오년은 고려 목종…
통일신라시대 내제군(奈堤郡), 고려시대 제주군(堤州郡), 조선시대 제천현(堤川縣), 대한제국 이후 제천군(堤川郡), 현 제천시(堤川市). 이상에서 보듯 제천의 지명은 전통적으로 '둑'〔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는 의심할 것도 없이 의림지(義林池)의 유명성이 지명으로 옮겨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삼국사기》 지지리를 보면 제천은 삼국시대 때는 '내토군'(奈吐郡)으로 불리었다. 어문학자들은 이와 관련하여 '내'는 흐르는 '내'〔川〕, '토'는 '둑'〔堤〕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역시 삼국시대 제천의 지명 '내토군'도 의림지에 포섭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제천은 고려시대에는 의천(義川), 의원(義原), 의주(義州) 등의 별호(別號)를 갖고 있었다. "제주는 본래 고구려의 내토군으로 신라 경덕왕이 내제군으로 했으며,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 14년(1483)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목종 8년에 이를 없앴으며, 현종 9년(1668)에 내속하였고 예종 원년에 감무를 두었다. 별호를 의천(義川)이라 하며 또 의원(義原)이라고도 불렀다."- 별호는 글자 그대로 본래 명칭 외에 다르게 불려지는 호칭을 의미하고 있다.…
현재의 경상도 지역의 지리적 경계는 마치 삼태기 모양을 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태백산맥, 서쪽으로는 소백산맥〔백두대간〕 줄기가 아구리가 좁은 U자 모양으로 감싸고 있고, 그 가운데를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이같은 닫힌 구조의 지형에서는 배타적이고 폐쇄성이 강한 문화가 발달하기 쉽다.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에서 보듯 팔도 가운데 경상도 사투리는 유독 발음이 강하다. 어문학자들은 이같은 원인을 경상도의 닫힌 지리구조에서 찾고 있다. 신라는 고대부터 이같은 환경탓에 백두대간을 늘 의식했다. 신라는 아달라왕 3년(156) 충주~문경 사이에 위치한 계립령을 처음으로 열었다. 다른 지역 입장에서 보면 고갯길 하나 뚫은 것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라는 이를 역사적인 일인 양 《삼국사기》에 기록하였고, 이후부터 계립령에는 '우리나라 역사문헌에 등장하는 제 1호 고개'라는 서술어가 따라다니고 있다. 신라는 6세기 진흥왕대부터 백두대간을 돌파하려는 노력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마치 병아리가 달걀껍질을 쪼고 나오려는 모습과 같았다. 그 결과, 신라는 550년 백두대간 죽령(689m)을 넘어 단양에 적성비(赤城碑·국보 198호)를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충북일보] 조선 왕실은 태(胎)는 국운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명당자리를 고른 후 해당 예법에 따라 정성스럽게 매장했다. 그 시설물이 태실(胎室)이다. 나아가 왕실은 태실의 주위에 금표(禁標)를 세워 채석·벌목·개간·방목 등의 행위를 금지시켰다. 금표를 세우는 범위는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어, 왕은 300보(540m), 대군은 200보(360m), 기타 왕자와 공주는 100보(180m)로 정했다. 우리고장에는 진천군 진천읍의 김유신 태실, 충주 엄정면 괴동리의 경종대왕 태실, 청주 낭성면 무성리의 영조대왕 태실, 보은 속리산면 사내리의 순조대왕 태실, 청주 문의면 산덕리 태실 등 5개 태실이 존재한다. 왕명과 인명이 부여된 것에서 보듯 이들 태실은 주인이 모두 확인된다. 이에 비해 충청북도기념물 제 96호인 청주 문의면 산덕리 태실은 지명으로 표시돼 있다. 이는 태실의 주인이 분명하지 않다는 의미다. 그러나 지역 학계는 대체로 선조의 7번째 아들로,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인성군(仁城君)을 산덕리 태실의 주인으로 보고 있다. 태실비는 높이 98㎝, 너비 46㎝, 두께 14㎝ 등의 제원을 지니고 있고, 그 뒷면에…
[충북일보] 전어(錢魚)는 가을 이후가 제철로, 지금이 그런 시기에 해당한다. 전어의 어원이 재미있다. 백과사전은 전어에 대해 '등쪽에 갈색 반점의 세로줄이 여러 개 있고 아가미 부근에는 커다란 흑색 반점이 존재한다'고 쓰고 있다. 바로 전어는 흑색 반점이 '동전'〔錢〕과 비슷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어와 관련된 속담으로 '봄 도다리, 가을 전어' 그리고 '가을 전어는 깨가 서말이다' 등이 있다. 전어는 산란기인 봄에서 여름까지는 맛이 없지만, 가을이 되면 체내에 지방질이 축적된다. 따라서 생선으로 구울 때 지글거리며 특유의 냄새가 난다. 그 내음이 매우 고소하기 때문에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가던 며느리가 돌아온다"라는 속담도 생겨났다. 최근 모 방송인이 고소를 많이 한다고 해서 '고소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조선시대에도 상소를 많이 하는 '상소남' 선비들이 적지 않았고, 그중에는 조헌(趙憲·1544-1592)이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조헌은 임진왜란 가능성을 예상하고 전쟁 발발 1년전 도끼를 메고 한양 궁궐로 올라가 그 유명한 '지부상소'(持斧上疏)를 했다. 지부상소는 나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면 도끼로 쳐달라는 의미를 지닌다
[충북일보]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가 주최한 '젓가락 페스티발'이 청주 예술의 전당과 백제유물전시관 등에서 내달 17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 이어령 조직위 명예위원장(전 문화부장관)은 국제 학술심포지엄에서 "젓가락의 종주국을 따지는 것은 중요치 않다. 어느 나라가 더 젓가락 문화를 보존하고 젓가락 정신을 잘 알고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밝혔다. 현재 젓가락 문화는 한·중·일 삼국과 베트남·타이·미얀마 등 동아시아에 집중적으로 퍼져 있지만, 그 기원은 대략 3천년전 중국에서 제사와 관련해서 태동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갑골문의 '鄕' 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손가락으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갑골문 존재하던 시기, 즉 중국 은나라(BC1600~BC 1046) 때는 젓가락이 사용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중국 역사에 젓가락이 처음 등장한 것은 춘추전국시대(BC 770~BC 440년)였다. 당시 제관(祭冠)은 신에게 바치는 공물(供物)을 옮길 때 감히 손으로 함부로 쥘 수 없어 젓가락을 사용했다. 이후 중국의 지배층들이 이 같은 모습을 모방해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젓가락을 사용하면 정인(淨人·깨끗한 사람), 그렇지
[충북일보] 농업은 전근대 사회를 통틀어 국가재정의 밑바탕을 차지했고, 따라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리 시설의 개설과 유지·보수는 국정의 우선순위를 차치하였다. 수리시설 가운데 제언(堤堰)은 벼 재배와 불가분의 관계인만큼 그 등장 시기가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많이 듣던 수산제·벽골제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고대국가 단계인 삼국시대 들어서면 제언에 대한 기록이 부쩍 증가한다. 이는 삼국이 공통적으로 미곡을 조세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통일 신라시대에는 인공 제언을 통해 농업용수를 공급받는 논을 '오답(奧沓)'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수리시설이 발달하면서 고려시대에는 산전(山田)이 개간되었고 고려 후기에는 저습지와 연해지 개발이 가능해졌다. 조선시대 역시 제언은 축조와 관리에 많은 비용과 노동력, 그리고 기술이 투입되었고, 따라서 제언의 건설 및 유지 관리는 보통 국가가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의 문헌과 지도에는 제언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를 보면 당시 관내에는 남일면, 북강내일면, 산외일면, 북강외일면, 북강외이면, 북강내이면, 수신면(현 천안시), 서강외이면, 서강외일면, 서강내이면, 남이면 등에 11개의
[충북일보] 조선시대 전국 각도에서는 식년시(式年試), 즉 3년마다 한번씩 문과 초시에 해당하는 향시(鄕試)를 치뤘다. 이때 과거 시험장의 감독관은 관찰사나 도병마사가 맡았다. 그러나 응시생이 많은 지역에는 서울에서 경시관(京試官)이 파견됐다. 조선 선조~인조 대의 인물로 김시양(金時讓·1581-1643)이 있다. 그의 호는 하담(荷潭)으로 비인현감을 지낸 인갑(仁甲)의 아들이다. 그가 광해군 대에 충홍도 경시관이 돼 우리고장에 파견됐다. 당시 충청도는 어떤 역모사건이 있었는지 도명(道名 )이 '충홍도'로 개호돼 있었다. 그는 이때 향시의 제목으로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臣視君如仇讐]'를 냈다. 이 표현은 맹자 '군시신여초개 신시군여구수(君視臣如草芥 〃)의 뒤 부분이다. 해석하면 '임금이 신하를 초개와 같이 보면, 신하도 임금을 원수같이 본다'는 뜻이 된다. 초개는 풀과 티끌이라는 의미로, 임금은 절대 권력을 지녔지만 신하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뒷부분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만을 취하면 국왕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응시생들의 항의가 빗발치는 등 시험장에서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충홍도의 경시
[충북일보]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의 이성산성(已城山城)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굴산성(屈山城)일 가능성이 거의 확실해졌다. 옥천군과 국강고고학연구소는 최근 발굴 성과를 발표, "이성산성의 서쪽 성벽 25m를 발굴 조사한 결과 성벽의 흙에서 섞여 나온 유물로 미뤄 5세기 신라 토성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성산성은 해발 115∼155m의 구릉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1천1백40m이다. 이밖에 성벽의 너비는 하단부를 기준으로 최대 15.4m이고, 높이는 약 3.5m에 이르고 있다. 굴산성에 대한 역사시록은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8년조에는 "정월에 이찬 실죽을 배하여 장군으로 삼고, 일선 땅의 정부 3천명을 징발하여 삼년·굴산의 두 성을 고쳐 쌓았다(春正月 拜伊·實竹爲將軍 徵一善界丁夫三千 改築三年ㆍ屈山二城)"라는 기록이 있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는 "기산현은 본시 굴현으로서, 경덕왕이 기산으로 개명했고 지금은 청산현이다"(耆山縣 本屈縣 景德王改名 今靑山縣)라고 기록했다. 두 문헌기록은 △신라가 소지마립간 때 굴산성을 개축하였고 △그 굴산성은 청산현에 위치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굴산성은 문헌
조선시대 색(色)의 물질은 얻는 것은 국가대사의 하나였다. 건축물의 외관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의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영조가 재위 16년(1740)에 종묘의 신탑(神榻)을 모두 당주홍(唐朱紅)으로 고쳐 칠하라고 명하였다. 신탑은 위패를 올려놓는 상, 당주홍은 중국 당나라에서 수입한 붉은색 안료를 의미한다. 그러자 예조참판 이익정(李益炡)이 "각실의 신탑을 처음에는 번주홍(燔朱紅)으로 칠하였는데 수개(修改)할 때마다 당주홍으로 고쳤으므로 각실의 신탑은 그 색이 같지 않습니다"(영조실록 16년 4월 19일자)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영조는 "달라서는 안 되니, 모두 당주홍으로 고쳐 칠하고 이 뒤로는 정식(定式)으로 삼으라"(〃)라고 하명하였다. 위패를 모신 공간은 가장 신성한 제례의식 공간이고, 따라서 변색이 잦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조선시대 지방정부도 색물질을 얻는 것을 무척 중요시하였다. 조선시대 청주목 월경지의 하나로 지금의 대전광역시 동구에 주안향(周岸鄕)이 위치했다. 마치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와 같은 모습으로 주안향은 문의현을 뛰어넘은 곳에 위치하였다. 대전시 동구의 대청호 일대가 대체로 그 지역이다. 주안향은 구한말까지 그대로 존속됐고,…
[충북일보] 지난 1998년 청주 명암동에서 출토된 '단산오옥명 고려 먹'(丹山烏玉銘 高麗 墨)이 보물 제 1889호로 지정되었다. 이 먹은 당시 청주시 동부우회도로 건설공사를 하던 과정 중 고려시대 목관묘에서 출토되었다. '단산오옥'은 '단산'과 '오옥'의 합성어다. 단산(丹山)은 단양의 옛 이름으로, 1018년(고려 현종 9)부터 단양군(丹陽郡)으로 승격되는 1318년(고려 충숙왕 5)까지 사용되었다. 그리고 오옥(烏玉)은 먹의 별칭인 오옥결(烏玉O)의 약칭이다. 따라서 단산오옥은 '단양 먹(丹陽 墨)'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발견 당시 이 먹은 무덤 주인의 머리맡 부근 철제가위 위에 반으로 조각난 채 놓여 있었고, 단산오(丹山烏) 아래 일(一)자만 보였다. 그럼에도 '一'을 '玉'자로 추정한 것은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충주목 단양군 조는 단양의 토산을 설명하면서 '墨 最良 號爲丹山烏玉'라고 기술하였다. 의역하면 '단양의 먹, 최고 품질로 단산오옥으로 불려진다'가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조도 《세종실록》 지리지와 똑같은 문장으로 기술돼 있다. 고려시대 단양에서 최고 품질의
[충북일보] 괴산은 고려시대에는 괴주(槐州)로 불리었다. 지금의 지명 괴산(槐山)은 조선 태종대에 등장하였다. 본래 '州'(주) 자 지명은 '牧'(목) 이상에만 붙이는 행정 위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고려 후기들어 '주'자 인플레이션 현상이 강하게 일어났다. 고려의 국사(국사)나 왕사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에 '주' 자를 붙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시들도 중국을 갔다온 후 그 기념으로 자신의 출생지에 '주'자 지명을 끌어다 붙였다. "혹은 환시(宦寺)가 중국에 들어가 입시하였다가 사명을 받들고 환향하거나, 혹은 중이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되면,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 고을은 내가 난 땅이라.' 하여, 권세를 타서 요구하고 청하여, (…) 혹은 군과 현을 승격하여 주를 만드니, 이 때문에 군과 현의 이름이 날로 뛰어오르게 되었으나…."- 선초의 태종은 이같은 주자 지명 인플레이션 현상에 대해 메스를 가했다. 이 과정에서 괴주는 지금의 괴산으로 개명됐다. 들이 넓고 물이 풍부한 곳은 천(川) 자가 붙었으나 괴산처럼 산이 많은 곳에는 山자가 붙여졌다. 전자의 예로는 우리고장 제천·옥천·진천 등이 해당된다. 현재 괴산군은 감물면·문광면·불정면·사리면
[충북일보]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하였다. 그는 1864년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자 크게 당황하였다. 이때 국내 입국해 있던 천주교 선교사 가운데 일부가 "천주교도의 힘을 빌어 한 · 불 · 영 3국동맹을 체결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이 조언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장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져나갔다. 그는 왕권유지 차원에서 천주교 탄압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는 1866년(고종 3) 천주교 탄압의 교령(敎令)을 내렸고, 그 결과 프랑스 선교사 9명과 국내 신자 8천여 명이 학살을 당하는 대참극이 발생하였다. 바로 병인박해다. 병인년의 박해로 신자들은 산속이나 오지로 피신해 다니다가 수많은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병과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같은 사실이 중국 천진에 주둔해 있는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알려지면서 그 보복으로 병인양요(1866)가 일어났다.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탈출하지 못하고 국내 숨어지내던 인물로 스타니슬라스 페롱(Stanislas Ferron·1827-1903) 신부가 있었다. 그는 리
[충북일보] 조선시대 10여명의 희생자를 낸 옥천 권대전 역모사건(일명 정한 역모사건)은 조흥빈(趙興賓)이라는 인물의 고변(밀고)으로 시작됐다. 권대진에게는 '낙'(絡)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는 조흥빈의 아들 '완'(浣)에게 권대진의 역모를 흘리며 "곧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니 이 기회를 놓히지 말라"는 식으로 동참을 꼬드겼다. "지금 호남과 영남에 8대장이 있는데 동시에 군대를 일으켜 대사를 도모하려 한다. 네가 나와 같이 행동하면 부귀를 얻을 것이니, 절대 전파시키지 말고 남몰래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조흥빈의 아들 '완'은 무시무시한 대화가 잘 믿기지 않았는지 며칠 뒤 발설자인 권대진을 직접 찾아가 사실 여부를 다시 확인했다. 권은 성공을 확신했는지 역모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낙이 간 뒤에 신이 동생 조희빈과 함께 대진을 찾아가 물어 보았더니, 대진이 말하기를 '우리 집 검은 말이 흰색으로 변했는데, 참기(讖記) 가운데에 백마장군에 관한 설이 있으니, 이야말로 우리 집이 일어나는 좋은 징조이다.' 하고, 8대장에 관한 이야기는 감추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권대진의 역모 의도를 재차 확인한 조완은 이를 아버지(조흥빈)에게 알렸고, 그가
[충북일보] 조선 인조 때의 옥천지역 역모사건과 관련해 권대진, 정한, 양천식 위로로 서술을 했다. 그러나 인조실록, 승정원일기, 추안급국안 등을 종합하면 당시 역모사건에는 총 32명이 연루된 것으로 확인된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옥천 10명, 합천 6명, 나머지는 전라도, 경상도, 청주 등이다. 청주에서는 조철이라는 인물이 당시 역모사건에 가담했다. 옥천 가담자가 가장 많은 것은 권대진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가장 컸음을 의미한다. 옥천 가담자 가운데 권대진, 권락, 권계, 권순, 영이, 박선검, 박준검 등 7명은 처형됐다. 권락, 권계는 권대진의 아들이고 권순은 조카이다. 이밖에 영이는 권대진가의 노비이고 박선검, 박준검 권대진가의 보인이었다. 보인은 대신 병역의무를 지는 것을 말한다. 권락, 권계 형제는 아버지(권대진)의 역모 도모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들이 말하기를 '양천식·양정식 및 이찬희 등이 모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도당들이 매우 많다. 그런데 먼저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병사를 일으켜 왜적들이 쳐들어온다고 하면 우리 아버지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왜적을 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곧장 경성을 치기로 약속이 되었다.' 하고….'- 인용문의 '그
[충북일보] ◇더불어민주당 이강일 후보, 법 개정으로 지역 부흥 더불어민주당 이강일 후보는 법 개정에 무게를 뒀다. 이 후보는 '대한민국을 당당하게', '상당구를 상당하게' 등 공약을 크게 2개 파트로 분류했다. 첫 번째 부분인 대한민국을 당당하게 공약에선 △판·검사 등 국가 공무원과 변호사를 분리 선발하는 시스템 마련 △검찰청의 기소청 전환 △검사의 특활비 축소 △저출생 정책 수립 추진 등을 제시했다. 이처럼 이 후보는 주로 사법시스템 개혁 방점을 찍었다. 대체로 현행 법을 개정해 잘못된 국가 시스템을 바꾸겠다는 것이 골자다. 공약 중에 또 눈에 띄는 부분은 SK하이닉스 지원 등 미래 산업 육성이다. 청주 지역경제의 한 축인 SK하이닉스의 AI 반도체 공정(M15, M17) 증설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공약이다. '상당구를 상당하게' 부문에는 지역경제 활성화, 일자리, 교육 등의 공약이 담겼다.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규제완화와 상업지역 공동주차구역 관리제를 도입하는 공약과 근로자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한 '상조휴가법' 신설 등이 눈에 띈다. 또 △아동수당으로 월 20만원을 지급 △기업 대상 청년인력 유지지원금 혜택 부여 △다함께 돌봄센터 설치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의 한 경로당에서 노인을 폭행하고 흉기로 위협한 60대가 검찰에 넘겨졌다. 청주상당경찰서는 특수협박·폭행 혐의로 A(61)씨를 구속 송치했다고 27일 밝혔다. A씨는 지난 23일 오후 2시 30분께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한 경로당에서 노인 B(77)씨를 폭행하고 흉기로 위협한 혐의를 받는다. 그는 술을 마시고 경로당을 찾았다가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출입을 거절당하자 "왜 나는 이용을 못 하냐"며 폭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가 계속해서 소란을 피우자, 경로당 안에 있던 B씨가 "왜 욕을 하냐"며 제지했고, 이에 격분한 A씨는 주먹으로 B씨를 폭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B씨가 폭행을 당한 뒤 112신고를 하자 흉기를 들고 "죽여버리겠다"며 난동을 부린 것으로도 파악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A씨를 긴급 체포했다. / 임성민기자
[충북일보] "지역경제와 회원사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여기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차태환 청주상공회의소 회장은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 지역 상공인 권익 향상을 위한 본연의 기능과 역할에 더욱 충실하겠다는 다짐을 담담한 어조로 밝혔다. ◇청주상공회의소가 확산시킬 신(新)기업가 정신은. "기업의 역할에 있어서 사회적 가치 창출이 중요해졌다. 기업이 가진 혁신역량과 기술, 자본, 아이디어를 활용해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시대와 국민이 요구하는 기업의 새로운 역할에 부응하겠다. 국민 안전을 책임지는 소방관들을 위한 쉼터버스 제작, 위기청소년 심리상담과 일자리 제공, 저출산 극복을 위한 돌봄환경 개선사업 등 기업의 다양한 사회공헌활동뿐 아니라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아이디어가 비즈니스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선순환 생태계를 조성하겠다." ◇지역내 소비 침체가 길어지고 있다. 촉진방안에 대한 구상이 있나. "소비 촉진을 위한 다양한 우리 지역의 행사에 저희들이 이제 적극적으로 동참해서 좀 도움을 드리거나 힘을 실어줄 수 있도록 하겠다. 지난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소비 촉진 챌린지에 동참했다. 이같은 방향으로 청주상의에 대기업, 중견, 중소기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