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주변 교통이 복잡하고 위험하다 보니 자가용으로 등교시키는 가정이 많다. 특히 학기 초에는 주차장이 정말 어수선하다. 저학년 학부모들은 차를 세워놓고 아이 손을 잡고 교실까지 간다거나 아이가 눈앞에서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다 차를 출발하는 사람도 많다. 되도록 아이들이 혼자 교실로 가게 해달라는 부탁을 해도 잘 안된다. 통로를 가로막고 차를 세워놓는 사람이 있는 날이면 주차장은 전쟁터 같다. 입학식 다음 날, 아침 교통지도를 하며 아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차에서 방금 내린 한 아이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새 책가방을 멘 것을 보니 1학년이다.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불어 추운데 빨리 교실로 들어가지 왜 저렇게 두리번거리나 궁금했다. "얘야, 추워. 얼른 교실로 들어가자."하고 다가갔다. 아이는 나를 보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교장 선생님, 저 길을 잃은 것 같아요." 학교에서 길을 잃었단다.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등교하는 아이들이 중앙현관을 향해 쭉 걸어가고 있는데 이 아이는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무릎을 굽히고 학교 건물을 바라봤다. 학생이 뒤섞여 정신없는 넓은 운동장, 거대한 학교 건물을 키 작은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무척 거대하게 느껴졌다. 주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다니다 처음 학교에 온 학생에게는 무척 낯선 풍경일 수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입학식에는 부모의 손을 붙잡고 강당으로 바로 올라갔다가 담임선생님들이 교실로 인솔했으니 교실로 가는 동선도 달라졌다. 길을 잃었다는 아이의 말에 공감이 갔다. "1학년 몇 반이니? 교장 선생님이 도와줄게." 지나가는 3학년 학생을 불러 손을 잡고 교실로 데려다주게 했다. 아이는 이제야 안심한 듯 쭐레쭐레 언니를 따라갔다. 요즘 아이들이 아무리 똑똑하고 영리하다 하더라도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은 두렵고, 낯선 공간에 가면 어리둥절할 거다. 그래서인지 입학생 중 몇몇은 부모와 떨어지기 싫다고 운동장이나 현관에서 엉엉 소리내어 울기도 한다. 다행인 것은 아이들은 새로운 공간에 금방 적응한다는 것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차에서 내리면 뒤도 안 돌아보고 교실을 향해 달려가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면서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가장 큰 일이고 보람된 일이라고 한다. 길을 잃은 아이의 경우처럼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부모의 태도가 중요하다.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도움을 요청하고 교실까지 잘 찾아간 아이를 칭찬하고 격려하면 되는 일이다. 또 그런 일이 발생할까 봐 몇 날이고 아이들 바래다주기 시작하면 의존적인 아이가 되기에 십상이다. 오늘 길을 잃은 아이는 내일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혼자 잘도 갈 거다. 부모가 한 번 더 믿어주고 격려해주면 말이다. 다만 부모도 학교도 아이들의 시선에서 한 번 더 생각하고 배려하여야 함을 인지할 수 있는 날이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모든 일을 배려하라는 말을 많이 하면서도 이렇게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부족했음을 느끼곤 한다.
선배 교장선생님들의 퇴임 축하 모임이 있었다. 여러 행사 중 축하 무대를 꾸며준 후배 교사들의 시간이 가장 인상 깊었다. 축가를 부탁하고 어떤 곡을 준비했을까 궁금했는데 제목을 듣는 순간 '그래, 바로 이 노래야.' 했다. 뮤지컬 『지킬 앤드 하이드』에서 조승우가 부른 「지금 이 순간」이었다.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 나만의 꿈이, 나만의 소원이 이뤄질지 몰라. 참아온 날, 힘겹던 날 다 사라져 간다. 연기처럼 멀리~" 한 구절 한 구절 가사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들었다. 긴 세월 교직의 길을 걸어오신 선배님들의 지금 이 순간은 간절히 바라고 원하던 꿈을 이룬 순간일까? 힘겹게 참아온 일들이 사라지는 순간일까? 예전엔 아직도 너무 젊으신데 떠나야만 하는 선배님들을 보며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졌었다. 지금 이 순간은 교직을 떠나 새롭게 걸어갈 길에서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다는 부러움이 더 크다. 내가 바뀐 건지, 세상이 그렇게 만든 건지 애써 웃어보지만, 달라진 세월에 허탈함이 머문다. 노래를 듣는 내내 선배님들의 교직 생활의 궤적들이 그려졌고, 끝을 향해 걸어가는 나와 이제 시작하는 후배들이 걸어갈 미래의 순간들을 상상하니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다음 날 인근 절에서 주지 스님의 강의를 들었다. 공교롭게도 강의의 주제가 "지금 이 순간"이었다. 우리는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고 있지나 않은지, 겪지 않을지도 모를 미래를 걱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라고 하셨다. 사람들의 걱정은 90%가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며, 이미 지나간 일에 얽매여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어제의 나를 꾸짖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언제 끝을 보고 달려왔나!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 않은가! 힘겨웠던 날도 있었고 참아야 했던 일도 많았지만, 걱정의 크기만큼 어려웠던 일은 없었다. 미래를 위해 힘든 날을 참은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즐기며 최선을 다했던 거였다. 그 속에서 행복했고 즐거웠으며 보람도 많았다. 나의 삶의 순간에는 늘 아이들의 시간이 함께 했다. 아이들의 삶에 등불이 되고 디딤돌이 되며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는 깊은 사명감을 가졌다기보다는 내가 맡은 40명의 소중한 순간에 의미를 더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었다. 3월이다. 학교는 새로운 순간을 맞이했다. 새 학년을 준비할 때마다 교육공동체 모두에게 말한다. 우리는 아이들의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이끌지만, 오늘의 행복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행복한 하루하루가 모여 행복한 삶의 여정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행복한 학교였으면 좋겠다. 어떻게· 별거 없다. 아이들을 위해, 또 자신을 위해 오늘, 이 순간을 의미 있게 생각하며 언제나처럼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거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약간의 불안과 떨림 그리고 상당히 많은 기대감으로 설렌다. 시작으로부터 이만큼 걸어온 나의 이 순간도, 언젠가 맞이할 그 순간에도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연기처럼 멀리 날려 보내도 편안한 마음일 테니 걱정은 내려놓으련다.
새 학년을 준비하며 가장 긴장되는 날이 1학년 예비소집일이다. 읍면 단위 학교는 반 편성 기준이 25명이라 51명이 되어야 3개 반이 된다. 다행히 1학년은 3학급을 배정받았고 걱정이었던 5학년도 1명이 늘어 3학급이 되었다. 작년 4학년 땐, 딱 50명으로 2학급이 되어 다들 걱정이 컸다. 25명이 꽉 찬 과밀학급이라고 말이다. 가끔 선배님들이 "지금은 한 반에 몇 명인가?" 물으신다. 급당 25명이 과밀학급이라고 하면 옛날이야기를 하신다. 우리 때는 한 반에 60명, 70명이 넘었다며 무용담을 늘어놓듯 그 시절 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교단 바로 앞까지 책상을 놓고도 공간이 모자라 딱딱 붙여놓으면 학생들이 드나들 길이 없어서 책상 위로 오르내리기도 했단다. 그래도 그 시절엔 낭만이 있었다고 덧붙인다. 내 초임 시절도 학생 수가 40명이 훨씬 넘었다. 매일 숙제나 일기 검사를 할 때, 학기 말엔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노라면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학생 한 명 한 명을 다 챙기지 못했다는 거다. 화장실 한 번 제대로 못 가고,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도 집에 가서 가만히 생각하면 한 번도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학생들도 많았다. 수업 시간에 조용한 학생 또는 별 탈 없이 지낸 학생들은 오늘 학교에 왔었나 싶은 날도 있었다. 참 미안한 일이었다. 옛날에 비하면 지금은 급당 학생 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그런데도 교사들은 25명이 꽉 찬 학급에서는 너무 힘들단다. 농촌의 작은 학교는 열 명도 안 되는 학급이 대부분이지만 우리 학교만 해도 보은군에서 제일 큰 학교라 학급당 학생 수가 18명~25명이다. 다른 반에 비해 5~7명이 많은 학급은 업무량을 배려해 줘도 부담이 된다고 꺼렸고 실제로도 힘든 1년을 보내야 했다. 예전엔 40명, 아니 60~70명이었던 학생 수가 지금은 고작 25명인데도 왜 이렇게 힘든 걸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다. 아이들 개개인 한 명 한 명이 손이 많이 가고 챙겨야 할 것이 많아졌다. 학교에서는 돌봄과 방과후교육까지 책임져야 하니 일이 점점 많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다. 발전하는 과학기술에 인터넷 기반 정보화 교육, 스마트교육에 지금은 디지털교육과 AI 교육까지 하라는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다. 온전히 아이들과 함께하라고 업무지원팀도 꾸리고 업무량을 줄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도 만족할 만큼 줄어들지 않는다. 학생도 학부모도 교사도 지역사회도 아무도 이만하면 됐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해도 충분하지 않고 줘도 줘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 얼마나 더 해야 하고 얼마만큼 더 줘야 할까. 새 학년, 아이들이 알찬 교육과정 속에서 행복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낙후된 교실 리모델링과 외벽공사도 서둘러 마무리 하느라 바쁘다. 사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꽉 찬 25명이 함께 한다고 하더라도 서로 너무 욕심내지 말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며, 사소한 것에 감사함을 표현할 줄 아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러면 조금은 덜 힘들 거다.
겨울산은 의외의 풍경을 선사할 때가 있다. 이번 송년 산행이 그랬다.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을 만났다. 태기산에 핀 빙화, 얼음꽃이 그랬다. 겨울 산행을 갈 때면 늘 멋진 눈꽃이나 상고대를 기대한다. 태기산은 고도가 높은 곳에서 산행을 시작하기 때문에 상고대나 눈꽃을 잘 보여주는 산이다. 기대가 컸지만 얼음꽃은 상상도 못했다. 산대장도 평생 두 번째 보는 거라며 신기해했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만난 얼음꽃은 가지도, 열매도 얼음 속에 갇혀 있었고, 꽃눈도 투명한 얼음 속에서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딱 요즘 길거리에서 눈을 현혹하던 과일 탕후루 같았다. 눈꽃, 상고대, 얼음꽃은 차이가 있다. 하얀 눈이 나뭇가지에 쌓이면 눈꽃, 서리가 찬 기온에 하얗게 얼면 상고대라고 한다. 얼음꽃은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녹다가 낮은 기온에 꽁꽁 얼어서 생긴 현상이었다. 눈이 많이 와야 하고 살짝 녹았다가 다시 꽁꽁 얼어야 한다. 바닥도 아닌 공중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산길을 접어드니 숲속은 얼음공주 엘사가 꽁꽁 얼려버린 듯 나뭇가지 터널 전체가 얼음이다. 이 동화 같은 장면에 여기저기서 튀어나온 말이 "대박"이었다. 이렇게 독특한 모습을 보게 된 것은 우연한 행운이었다. 매번 산을 갈 때마다 특별한 풍경을 기대하지만 기대가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한 번은 철쭉이 예쁘다는 산을 갔다. 버스에서 산대장은 SNS에서 어제 올라온 사진을 보면 절정이었다고 기대해도 좋다고 했다. 웬걸 도착하니 만개한 철쭉꽃은 고사하고 붉은 기운도 없었다. 밤새 태풍이 몰아쳐 꽃을 다 휩쓸고 가버렸단다. 상고대도 마찬가지다. 버스에서 바라볼 때만 해도 하얗게 서리꽃이 내린 풍경에 마음 설레며 올라갔는데 어느새 올라온 햇살에 다 녹아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적도 많았다. 어떻게 하면 얼음꽃도 보고, 상고대도 만나고, 온 산이 지천인 진달래, 철쭉도 볼 수 있을까· 답은 쉬지 않고 꾸준히 가는 것이다. 꽃이든 단풍이든 해돋이든 눈꽃이든 우리가 최고의 풍경을 만나려면 가고 또 가면 된다. 자꾸, 자주, 꾸준히 가다 보면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을 만나기도 하고 최고의 설경, 붉은 꽃산을 만나기도 한다. 우리들의 묵묵한 걸음이 오늘처럼 얼음꽃을 만나는 행운을 안겨준 것처럼 말이다. 기대하던 일을 한 번 실패했다고 멈추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 가던 길을 조금 늦었다고 포기해 버리면 결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행운이라고 아주 쉽게 주어지거나 그냥 오지는 않는다. 눈 쌓인 길을 눈보라를 맞으며 걸었고, 점심도 눈 덮인 숲에서 컵라면으로 해결했다. 때론 발이 시려 동동거리기도 하고 끊어질 듯 시린 손을 비비며 오돌오돌 떨기도 했다. 다만 이렇게 만나게 되는 신비한 풍경, 함께 걷는 사람들과의 행복한 시간들은 그 어떤 고통도 수고로움도 충분히 감내할 만큼 멋진 일이다. 새해다. 새롭게 시작하는 갑진년의 내 길에는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여기저기 숨겨져 있는 아이템을 찾으러 부지런히 걸어보자.
글을 쓴 지 딱 5년이 되니 처음이 떠오른다. 우연한 시작이었다. 2018년 연말 어느 날, 보은 교육장님이 전화하셔서 글을 써 보라고 하셨다. '내가 글을 쓴다고· 그것도 신문에 필진으로·' 평소에 일기와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외에 글을 써 본 적이 없는 나였다. 겁이 나서 선뜻 수락할 수가 없었다. 내가 글을 쓸 수 없는 이유를 주저리주저리 나열했지만, 교육장님은 너 아니면 없다고 말씀하셨고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한 달에 한 편, 1년만, 주제도 내용도 마음 가는 대로 쓰면 된다는 말에 용기를 냈다. 일기 쓰듯, 편지 쓰듯 편하게 시작했다. 실상은 한 달에 한 편이 아니라 2편이었고 1년이 쌓이고 쌓여 5년이나 되었다. 지금은 차곡차곡 100여 편의 글을 모았고 내 삶의 마중물을 만난 덕분에 나는 글 부자가 되었다. 글을 쓰면서 내가 글 쓰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깨달은 것이 아니라 글을 읽은 선배, 친구, 후배가 알려주셨다. 재미있다는 말에 힘이 났고 비슷한 경험에 눈물이 났다는 전화에 감사했다. 미사여구 대신에 담백한 표현이라서 좋고 무엇보다도 쉬워서 읽기 편하다고 해주셨다. 주변의 격려가 지금까지 계속할 수 있게 한 또 하나의 마중물이다.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에 열광하지만 담담하게 이야기하듯 노래 부르는 가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듯이 내 글도 그런가 보다. 다음은 또 하나 내 인생의 마중물 이야기다. 교직 생활 11년째 되던 해, 청주에서 괴산의 작은 학교로 옮겼다. 출퇴근길도 멀었고 6학년을 맡아 정신없이 보내던 3월이었다. 교장선생님이 부르셔서 갔더니 내 인사 기록 카드를 보고 계셨다. "어떻게 10년 동안 개인 연구가 한 편도 없나요?"라는 말씀에 당황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나에게 연구 점수나 승진에 대해서 말한 사람이 없었다. 아니 누군가 말했는데 관심이 없거나 몰라서 알아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청주에서의 8년간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정말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했다. 교실에선 미술지도와 창작동요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졌고, 각종 미술대회에 우수한 실적을 거두기도 했다. 결혼했고, 아이 둘을 낳았고, 대학원 파견 2년간은 공부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승진을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날 교장선생님은 연구계획서 2편을 작성해서 내라고 지시하셨고 난 그 말을 따랐다. 덕분에 그 해 특별연구교사 1등급을 받았고 다음 해에 교총 연구논문 2등급을 받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금 나는 교장이 되었다. 삶은 많은 부분 운이 좌우한다는 생각이 든다. 삶에 마중물이 되는 사람을 만난 것은 내 행운이었다. 글을 써 보라고 해주신 교육장님과 인사기록카드까지 살펴보며 내 앞길을 챙겨주신 교장선생님처럼 말이다. 내가 한 일은 나에게 온 행운을 덥석 잡았고 실천에 옮겼다. 마중물을 받아 펌프질하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깊은 우물물을 길어올려 시원하게 마시려면 누군가의 조언에 귀 기울이고 받아들여야 한다. 내 삶의 마중물일 수 있으니까.
오랜만에 보석함을 열었다. 낡은 쌍가락지 한 쌍이 다정하다. 시어머니의 유품이다. 시부모님과 11년을 같이 살았고 89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는 내게 든든한 지원군이셨다. 딸 둘 출산 후 5주간이나 며느리 손에 물 한 방울 닿지 않게 살뜰히 보살펴 주셨고, 아기 울음소리에 눈을 뜨면 어느새 어머니가 젖병을 흔들고 계셨다. 감사한 마음에 목걸이 하나 해드렸더니 내가 무슨 목걸이가 필요하냐고 하시며 끝내 며느리 것으로 바꿔오신 오로지 주시기만 하신 분이었다. 어머니가 지닌 유일한 귀금속이 어머니의 주름진 손처럼 닳고 닳아 실금이 가고 가늘어진 금가락지 한 쌍이었다. 어머니가 반지를 끝까지 끼고 계셨다면 내 것이 되지는 못했을 거다. 동서들도 있고 손위 시누도 셋이니 막내며느리인 내 차지가 될 리 만무했다. 그 쌍가락지가 내 손에 들어온 건 순전히 안전상의 이유였다. 연세가 들수록 살이 빠지시더니 여든 살이 되셨을 즈음에는 헐렁거린다고 가락지 두 개를 무명실로 두껍게 동여매어 끼고 계셨다. 손에 물 마를 날 없으셨던 어머니의 가락지에 감긴 무명실은 늘 얼룩지고 더러워져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어느 날 어머니가 쌍가락지를 나에게 건네셨다. "며늘아가, 고생했다. 이것 하나는 꼭 너에게 주고 싶구나!" 뭐 이런 말이라도 하셨다면 훨씬 그럴 듯하겠지만 울어머니는 그럴 분이 아니셨다. 부끄러움이 많으셨던 어머니, 육남매 낳아 기르셨고 아들 둘을 교사로 키워내셨지만, 집에 손님이라도 오면 어느새 방으로 숨으셨다. 불평을 늘어놓는 법도 없으셨지만, 입에 발린 칭찬 한마디도 없으신 담백한 분이셨다. 그런 어머니가 가늘어진 손에서 반지가 쑥 빠져버려서 잃어버릴 뻔하자,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우니 네가 가지고 있으라며 맡기신 것이다. 반지를 다시 돌려드리지 못했다. 사그라드는 꽃처럼 점점 왜소해지던 어머니의 손가락엔 아무리 무명실을 감아도 더는 반지를 낄 수가 없었다. 우리 며느리 예쁘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으셨어도 넘치는 사랑을 다 느낄 수 있었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들어가면 깜깜한 거실에서 TV를 보시다가 "이제 오니? 밥은?"이라고 물어보시고는 무심하게 방으로 들어가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걱정과 염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들과 며느리의 의사결정을 존중해주셨고 시아버님 말이라면 토 다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의 모든 일상은 오로지 가족에게만 향해 있었다. 손녀들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세상에 저렇게도 예쁠까 싶도록 온갖 정성을 다하셨다. 딸아이가 "할머니, 물!"이라고 하면 코를 골며 주무시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가셨다. "할머니 주무시는데 엄마한테 달라고 해야지."라고 했더니 "나 안 잤다."라며 말이다. 어머니의 쌍가락지는 어머니와의 추억을 소환하는 스위치다. 요즘처럼 추웠던 날, 퇴근하는 며느리에게 "춥다. 아랫목에 누워라." 하시며 이불을 당기시고 베개를 쓱 밀어주시던 그 날로 데려다 준다. 아직은 어머니의 손가락에 쌍가락지가 끼워져 있던 그 시절이 무척 그리운 오늘이다.
아침에 현관에서 등교하는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정말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다. 밝은 목소리로 "교장 선생니~~임, 안녕하세요?" 또는 "교장 선생님, 좋은 하루 되세요."라고 인사하며 들어오는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면 저절로 엄마 미소, 교장 미소가 지어진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아이들 얼굴을 보지 못한 지난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다. 사실 이름을 알고 있는 학생은 많지 않다. 예전에는 한 번만 들어도 외워졌는데 지금은 몇 번을 들어도 기억하지 못한다. 매번 이름을 묻는 것도 미안한 일이라 웃으며 인사하다가 자주 마주치는 아이에게 이런 말을 덧붙이며 이름을 묻는다. "교장 선생님이 잘 기억하지 못해서 그러는데 다음에 만나면 이름 또 물어봐도 돼? 한 열 번쯤 물어도 이해해 주렴!" 이렇게 이야기하면 대부분 아이는 "네~" 라든가 "얼마든지 물어도 돼요."라며 총총총 교실을 향해 달려가곤 한다. 오늘 아침에도 현관에서 자주 봤지만 이름은 모르는 아이를 만났다. 3학년이다. 반갑게 인사하고 얼굴 한 번 보고 돌아서려는데 아이도 가던 걸음을 멈추고 손까지 흔들며 뭐라고 말했다. 알아듣지 못한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보니 아이는 큰소리로 다시 말했다. "교장 선생님, 일 열심히 하세요." 내가 평소에 듣던 아침 인사말과는 다른 이 느낌은 뭐지? 아이가 어른에게 인사말로 일 열심히 하란다. 농땡이 치지 말고 일 잘하라는 뜻 같기도 하고 지금 보다 더 잘하라는 말 같기도 하면서 왠지 부담이 가는 말이었다. 아이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어른들이 늘 아이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니 아이는 어른에게 적당한 인사말을 찾은 거다. 그런데 내 마음이 썩 좋진 않았다. "일 열심히 하세요."라는 말을 곱씹다 보니 아이들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자주 "공부 열심히 해~" 라고 말하곤 한다. 부모도 이모, 고모도 오랜만에 만난 친척도 너무나 쉽게 하는 말이다. 용돈을 주면서도 명절날 덕담으로도 동네 아주머니가 예쁘다고 관심을 표현하는 말로도 자주 하는 말이다. 늘 이 말을 듣는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래, 결심했어. 난 정말 열심히 공부할 거야. 어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라며 결연한 의지를 다질까? 어른이 아이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는 것은 관심의 표현이고 격려의 말이며 너희가 지금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해주기 위해 마음을 전달하는 거다. 그런데 과연 다른 말은 없을까? 아이가 교장에게 정중하게 "일 열심히 하세요."라고 했다. 아이가 출근하는 아빠나 엄마에게 "아빠, 일 열심히 하세요."하고, 학생이 하교하면서 담임교사에게 "선생님, 일 열심히 하세요."라고 한다면 무슨 마음이 들까? "교장 선생님, 일 열심히 하세요."라는 말을 들었으니 아이가 들으면 좋은 다른 인사말이 뭔지 알아보는 "일"도 열심히 해 봐야겠다. 교사가 들으면 교직원이 들으면 기분 좋아지는 인사말도 함께 말이다.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회의나 연수에 가보면 항상 앞자리는 비어있다. 강의자나 사회자의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것은 주목받고 싶지 않은 사람의 본성인가 보다. 내가 참여자일 때는 어찌 됐든 구석에 앉고 싶어 했었다. 내가 회의나 연수를 주관하는 사람이 되니 마음이 달라졌다. 구멍이 뚫린 것처럼 텅 빈 앞자리들이 신경 쓰이고 어떻게 채워야 하나 고민이었다. 앞으로 당겨 달라고 부탁하면 몇몇 분은 자리를 이동해주기도 하지만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옮겨주기를 기대하고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이럴 땐 정말 난감했었다. 한 연구 결과에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앞에서 두세 번째 자리에 앉는다고 하니 학부모들은 내 자녀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내 자녀에게 그토록 바라는 일도 내 일이 되면 하지 않는다. 내 상황이 달라졌다고 모른 체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난 앞자리에 앉으려 노력한다.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도 주최한 사람이 더 앞으로 당겨주기를 요청하면 바로 옮겨주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얼마 전, 유치원 겸임원장 연수에 참여했다. 크게 늦지도 않았는데 남은 자리는 맨 앞자리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강사 코앞이라 졸기라도 한다면 정말 미안할 자리라 돌아봐도 빈자리가 없었다. 이틀간 다행인 것은 연수과목도 강사님들도 훌륭해서 졸음이 찾아오지 않았다. 마지막 강의를 끝낸 한 교수님이 인사를 하시더니 슬그머니 내 앞으로 오셨다. "맨 앞자리에서 적극적으로 경청해주셔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셨다. 난 그저 훌륭한 강의라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을 뿐인데 감사 인사까지 들으니 얼떨떨했다. 그리고 오늘 학교장 교육과정 연수회에서 재즈 공연프로그램이 있었다. 우리 세대면 다 아는 노래라면서 박수를 요청했다. 박수가 절로 나오는 신나는 노래에 어깨를 들썩이며 맘껏 즐겼다. 노래를 끝낸 가수는 우리 테이블 사람들이 손뼉을 신나게 쳐줘서 고맙다며 책 선물을 줬다. 내일은 동광 다모임이 있는 날이다. 듣는 태도가 유난히 좋고 호응도 잘하며 신나게 참여하는 학생들과 만나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외부 강사가 오면 아이들의 집중도에 놀랐다고 말해줄 때가 많다. 그러면 교장인 나는 어깨가 으쓱해지고 정말 기쁘다. 늘 아이들에게 말했다. 1학년 말하기 듣기 시간에 배우는 '말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이것만 잘 실천해도 우리는 평생 잘살 수 있다. '황금보다 지금이 더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에 하는 일에 집중하고 즐기자.' 아이들은 노력하고 있고 변화하고 있다. 학생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수업 시간에, 친구와 대화할 때, 부모님이 말씀하실 때 말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간단한 추임새를 넣으며 듣는다면 어떨까? 이것이 공감이고 소통이며 좋은 관계를 만드는 기본이면서 지름길이다. 아이들에게 말했으니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손뼉을 열심히 쳤을 뿐인데 감사 인사도 듣고 선물도 받았다. 내일 아이들에게 해 줄 말이 생겼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니 어디에서든 나의 역할이 있기 마련이다. 사회구성원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책임지고 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어렸을 때는 나에게 주어진 역할, 맡은 일만 완수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한 선배님을 보고 마음이 달라졌다. 초임 시절이었다. 주말에도 2인 1조로 일직 근무를 했었다. 일요일 일직이라 정시에 출근했는데 큰언니 선생님이 교무실 유리창에 매달려 지저분한 유리창을 닦고 계셨다. 어느새 교무실 냉장고도 깨끗하게 정리해 놓으셨다. 우리 학교 교무실 분위기가 늘 깨끗했던 것이 보이지 않는 선배님의 노력 결과였다는 것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왜 혼자 하셨냐고 했더니 뭐 큰일이라고 하시면서 눈에 보이니 한다고 하셨다. 아직 어렸던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일이다. 반대로 교육청에서 장학사로 근무할 때였다. 아침부터 출장을 다녀오는데 손님이 와 계셨다. 한여름이라 시원한 음료를 대접하려고 냉동실 문을 열었는데 얼음통에 얼음이 하나도 없었다. 반면 젊은 주무관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있는 얼음판에는 투명한 얼음이 있었다. 출근하면 얼음을 얼려놓는 것을 버릇처럼 했던 때다. 그녀는 얼음통이 비어있으면 한 번쯤 자기 얼음 얼릴 때 공용에도 물을 받아두면 좋을 텐데 통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가 모범을 보이면 언젠가 알아챌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은 거다. 학교에서는 많은 사람이 협력하여 일한다. 큰 행사를 치를 때는 혼자만의 힘으론 어림도 없다. 지금은 많이 다르지만, 예전의 가을운동회, 학습발표회, 장학지도나 학부모 수업 공개, 연구학교 발표회 등은 아주 큰 행사였다. 각자 주어진 일을 다 하고 나면 함께 힘을 합해서 천막도 치고 걷고, 의자를 놓고 거두고, 자료를 만들고 전시하는 일 등을 전 직원이 함께하곤 했다. 서로 협력해서 일하다 보면 힘은 들어도 즐겁고 재미있었다. 모두 협조를 요청하면 달려가서 도왔다. 요즘 사람들은 좀 힘든 일은 용역을 사서 하자고 한단다. 학교 일이라는 게 용역을 사야만 하는 일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일도 많다. 개별로 처리할 수 있는 것과 별개로 쪼갤 수 없고 힘을 합해서 할 수 있는 일도 많다. 학교마다 큰 행사를 앞두고 교사들이 각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복무를 달고 가버려 난감할 때도 많단다. 그들은 내가 맡은 일 다하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데 어떠냐고 말한다는데 과연 그럴까? 나에게 딱 떨어지는 일만 내 일이 아니라 함께 하는 일의 일부도 내 몫이라는 모르는 것 같다. 학기 초 교실에 놓인 학습 준비물이나 환경 물품, 교과서는 누가 옮겼을까? 업무 담당자가 각 교실로 배달하는 일까지 맡은 것은 아니다. 내 권리를 찾느라 내가 비운 자리에 남은 이들이 했을 테고, 내 눈에 보이지 않았겠지만 누군가가 알아차리고 내 일까지 대신 해준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우리 학급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대신 해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동료는 고마움을 표현해야 하고 관리자는 알아봐 주어야 한다.
추석 연휴 임시공휴일이 지정되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셋째 언니가 자매들만 청주에 모여 근교 여행을 하자고 제안했다. 딸 넷이 명절날 다 같이 모이기는 쉽지 않았었다. 시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시절이 바뀌니 이런 일도 가능하구나. 나는 물론 찬성이었고 남편과 형부들의 협조로 3박 4일의 일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엄마 없이 딸들만 모이려다가 조카 진주가 기특하게 할머니의 휠체어를 책임지겠다며 함께 모시자고 했다. 언니들과 명절을 보내게 된 기대감과 함께 시간이 다가올수록 뭘 해 먹일까, 어디로 갈까 걱정이 앞섰지만 그럴 필요가 없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연휴 첫날 엄마와 자매 넷, 딸들과 조카까지 모이니 여자 여덟에 남자는 남편 하나였다. 이 여행을 주도한 셋째 언니는 큰 형부의 찬조금을 받아왔고 각종 과일을 준비했다. 솜씨 좋은 둘째 언니는 떡과 김치, 알싸한 파김치도 맛있게 담가 왔고, 사위가 사준 한우와 와인까지 푸짐하게 챙겨왔다. 큰언니가 사 온 돼지껍데기 무침은 술안주로 제격이었다. 모인 첫날부터 왁자지껄 끝없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만날 때마다 듣던 이야기는 듣고 또 들어도 재미있었다. 잊고 있던 어릴 적 이야기도 꺼내고 나는 모르는 추억 이야기들도 흥미로웠다. 언니의 슬픔에 함께 울기도 하고 형부들 흉보기도 신이 났다. 엄마는 옆에서 가끔 자식들의 잘못된 기억도 바로잡으셨고,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 견뎌준 딸들에게 고맙다고 하셨다. 셋째 언니는 우리 중에 아흔의 엄마가 가장 총기가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는 엄마의 딸에서 남의 집 며느리가 되었고, 사위의 아내, 손주들의 엄마로 살아왔다. 바쁘다고, 멀리 산다고, 힘든 일이 있다고 핑계 대며 1년에 한두 번 보는 것도 어려웠다. 이렇게 엄마와 딸 넷이 함께 시간을 보내니 엄마의 딸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추석 명절 내내 우리는 그 긴 세월 겪어온 우리들의 기쁨과 슬픔의 추억 이야기로 채웠다. 첫 여행은 속리산 법주사 탐방과 세조길 걷기였다. 조카와 나는 복천암까지 차로 가서 용바위골 휴게소까지 휠체어를 밀고 가보자고 했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돌들과 경사가 심한 산길을 엄마를 태운 휠체어를 밀고 끌며 올라가는데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급경사에서 한계에 다다랐을 즈음 젊은 등산 커플이 도와주었다. 마지막 계단에서는 휠체어를 탄 엄마를 번쩍 들어 올려서 목적지에 도달했다. "야야, 힘들어서 못 간데이." 하시던 엄마도 안도하시며 유리알처럼 투명한 계곡물과 한결 시원해진 청량한 공기, 초록의 숲에서 마냥 행복해하셨다. 걸어서 늦게 도착한 남편과 언니들도 우리들의 도전에 깜짝 놀랐다. 바싹 감자전과 파전 안주에 동동주 한 잔씩 하며 어제 못다 한 이야기꽃을 피우며 또 하루를 엄마와 딸들의 시간으로 채웠다. 두 번째 일정은 청남대, 매운탕 맛집, 세종 호수공원 산책이었다. 청남대의 가을과 매운탕 맛집은 모두의 눈과 입을 만족시켰다. 아랫녘 사람들이 세종 호수공원을 걷는 것도 새로워했고, 남편이 꼭 보여주고 싶어 했던 금강 보행교의 야경도 아름다웠다. 3박 4일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휠체어 탄 엄마와 딸들 그리고 그 딸들이 함께 평범한 풍경 속에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설악산 여행을 다녀온 큰언니가 선물로 필통을 사 왔다. 나는 진파랑을, 바로 위 셋째 언니는 고동색을 골랐다. 표면은 빌로드 천으로 부드러웠고 안쪽엔 작은 거울까지 달린 세련된 디자인이라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 필통으로 평생 남을 억울함이 생길 줄은 몰랐었다. 하루는 셋째 언니가 씩씩거리며 달려오더니 "너, 내 돈 훔쳐갔지?"라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이지?' 난 알지도 못한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필통에 넣어둔 돈이 어디로 갔냐며 같은 방을 쓰는 나를 의심하고 내가 가져갔다고 우겼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았고 엄마에게 이른다며 홱 돌아서 가버렸다. 너무 억울했던 나는 혼자 방에서 엉엉 울었다. 어디서 잃어버리고 와서 나한테 누명을 씌우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하는데도 믿어주지 않는 것이 더 속상했다. 언니가 던져둔 필통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필통 안쪽에 붙어있는 거울 뒤에 삐죽이 나온 것이 있어서 얇은 자로 쏙 밀어보았더니 잘 접은 천 원짜리 지폐가 거기서 나왔다. 필통에 넣어둔 것이 거울 뒤로 들어갔는지 처음부터 거울 뒤에 숨겨두고 다람쥐처럼 잊어버린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필통에서 돈을 찾았다. 의기양양하게 언니에게 돈을 건네며 거울 뒤에서 찾았다고 했다. 언니의 경솔함을 탓하고 내 억울함이 풀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더 억울해졌다. "나한테 들켜서 거울 뒤에서 찾았다고 한 거잖아."라며 우겼다. 적반하장이었다.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아 울고 또 울었다. 흔한 자매들의 일이라 생각될 수도 있지만 너무나 억울해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시절 내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우리 집의 절대권력자인 엄마도 개입하지 않으셨다. 더 황당한 것은, 세월이 지나고 지난 어느 날, 언니랑 얘기를 나누다 그 얘기를 했다. 고약한 언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속상했었는지 말했다. 그런데 언니는 그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억울해서 목이 쉬도록 울었던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코끝이 찡한데 "그런 일이 있었나? 미안하데이~."라며 웃었다. 그 일 때문인지 살면서 부당하거나 불합리하다 생각되는 일에는 그 일을 해결할 때까지 가슴이 벌렁거리고 극도의 불안감이 생긴다. 가족 안에서도 웬만한 일은 웃으며 넘길 수 있는데 억울한 일은 참을 수가 없다.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마음이 편해진다. 코로나가 시작될 무렵 해외여행 예약금을 호텔의 횡포로 환불거절을 당했을 때도 끝까지 항의하고 증명해서 돌려받았다. 딸아이가 방을 구할 때 임대인의 귀책 사유에도 예약금을 반환하지 않았을 때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담담하되 단호하게 자료를 찾아 설명해서 전액 돌려받았다. 작은 나의 경험은 학교 일도, 교직원의 일에도 적어도 억울함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관리자로서 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서 돕겠다고 약속했다. 학교 조직에서 합의된 결정이라면 한 사람만이 손해를 보게 해서도 억울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학교의 최종 결재권자로서 학생의 일도 교사의 일도 끝까지 책임을 지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내게 무슨 권한이 남았지?
폭풍 속 같았다. 몸 하나 숨길 곳 없는 광야에서 세찬 비바람에 온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작은 울림으로 시작한 '공교육 멈춤의 날'은 아우성이 되고 울분이 되어 학교를 초토화했다. 어떤 징계도 각오하고 멈춤을 선택한 교사에겐 함께 하지 못해 미안했고, 학교에 남아 추모하신 선생님의 슬픔과 고통에 가슴 아팠다. 그렇게 그날이 왔다. 9월 4일 아침, 학부모회 임원들이 현수막을 달고 캠페인을 하며 교권 회복 및 교사 존중의 마음을 표현했다. "선생님, 다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요."라는 말에 그냥 주르륵 눈물이 나서 고개를 돌렸다. 병가 낸 담임 학급의 보결상황을 확인하고 교장실에 앉았다. 학교는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활기차게 웃고 떠들었고 학교엔 공사도 있었는데 내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나 혼자만 남은 것만 같았다. 나는 90세 노모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시는 대한민국의 초등 교장이다. "내 손가락을 끊어서라도 니 공부시켜 줄끼다."하신 엄마에게 부끄럽지 않은 교사가 되어야 했다. 나에겐 무거운 책임감, 남에겐 너그러운 사람이고자 했고, 30년 넘는 교직생활 동안 몰라서 죄짓지 않으려고 늘 노력했다. 아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마음에 수많은 밤을 새웠다. 방과후 특기지도를 하며 즐거웠고 밤늦게까지 자료준비하고, 보고서를 쓰면서 보람을 느꼈다. 주말도 없이 미술대회 나가도 학생들의 실력이 쑥쑥 자라는 것을 보며 행복했다. 남의 자식 가르치느라 내 자식 단 하루 입학식, 졸업식, 공개수업, 운동회도 못 갔고 남편의 학위수여식도 못 갔다. 그때는 그게 맞는 줄 알았다. 그러다보니 교장이 됐다. 어디 나만 그랬을까? 내가 아는 교장 선생님들은 대부분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고 노력하신 분들이었다. 그런데 교장이 자랑스러운 자리가 아니란다. 관리자에게 아부하고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들이고, 수업은 등한시하고 승진만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란다. 정작 교장이 되어서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교사의 아픔은 나 몰라라 하고 각종 민원은 회피하고 축소하고 은폐하는 사람이란다. 묻고 싶었다. 내가요? 정말요? 언제요? "교사가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시달릴 때 교장은 숨었다고요? 교장실에 쳐들어온 학부모의 고함과 악다구니를 다 받아낸 것이 교장인 난데요? 어린 담임교사 놀랄까 내보내고 학부모 달래고 진정시키고 정작 나는 입술 꽉 깨물고 앉아 한참이나 움직이지도 못한 적도 있었답니다. 나는 교사와 학생 모두의 교장으로 보듬고 보살펴야 하는 사람이니까, 내일도 교육은 이어져야 하니까 참아왔던 겁니다." 교사가 회의감, 우울감이 짙어지는 만큼 교장 또한 슬픔과 우울을 느끼고 무기력한 교육 현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말하면 뭇매를 맞으려나! 멈춤 후에 다시 시작된 오늘, 교장은 재량권도 뺏겼고 권위도 내려앉았으며 남은 것은 자랑스러움 대신 부끄러움이다. 이제 폭풍이 지나간 자리를 정돈하고 새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기운이 없다. 짓누르고 위협하며 분열시켜놓은 학교를 다시 추슬러야 하는데 할 말이 없다. 난 대한민국의 초등 교장이라 선생님들과 함께 너무나 예쁜 우리 아이들 잘 가르칠 힘을 내야 하는데 동력이 없다.
어릴 적 시골집 엄마의 장롱 위에는 상자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언제 샀는지 얼마나 그 위에 있었는지 모르는 그릇 세트였다. 평소에 쓰는 엄마의 그릇은 낡은 사기그릇 몇 개가 전부였다. 딸들이 꺼내서 쓰자고 했더니 "느그 언니 시집갈 때 줄끼다"라며 건드리지도 못하게 했다. 없는 살림에 큰 딸내미 시집갈 때 빈손으로 보낼까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엄마의 애틋한 마음을 알면서도 늘 허름한 그릇만 쓰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릇의 행방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큰 언니 집에서도 못 봤다. 상자가 장롱 위에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유행도 바뀌고 물건도 흔해져서 특별한 의미를 찾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린 것 같다. 그릇에 대한 기억이 또 하나 있다. 처음 교감으로 부임한 해 여름방학이었다. 방학에도 쉬지 못하고 나오는 교직원과 방과후 선생님을 위해 간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경주 출장길에 여고 동창이 하는 찻집에서 사 온 향기 좋은 홍차가 생각났다. 바닐라 향이 달콤하고 깊은 맛이 나는 특별한 차였다. 차에 문외한인 내가 이름도 단박에 외웠을 정도로 인상 깊었다. 마리아쥬 프레르 웨딩임페리얼 긴 이름이었는데 말이다. 귀하고 좋은 사람에게 대접하고 싶어서 구매한 것이니 그날 사용하기 딱이었다. 여름 과일과 고급 과자도 준비했다. 교무실 싱크대 안쪽에 보관하던 깔끔한 찻잔과 예쁜 다과용 그릇들을 꺼냈다. 특별한 손님이 올 때만 사용하는 거란다. 손님용 그릇을 씻고 있으려니 옆에서 교무실무사가 물었다. "교감 선생님, 오늘 손님 오세요?" "네, 아주 소중한 분들이라 좋은 그릇에 대접하고 싶어서요." 예쁜 그릇에 온갖 정성을 다해 과일을 깎고 과자를 담았다. 찻물을 끓이고 홍차를 우려내니 교무실에 향긋한 차 향기가 퍼졌다. 예쁜 다과상을 다 차리고도 아무도 오지 않자 손님은 언제 오냐는 물었다. 웃으며 그날 근무하는 실무사님과 방과후 강사님들, 행정 주무관님을 불렀다. 모두 모이니 10명이었다. 오늘 오시기로 한 특별한 손님이 다름 아니라 자신들임을 알고 다들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둥글게 모여앉아 차향을 맡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잠깐이었지만 귀한 시간이었다. 손님을 위해서 보관만 하던 예쁜 그릇에 좋은 차, 맛난 과일과 과자를 먹으며 대접받는 기분이 든다고 좋아들 했다. 내가 귀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아껴둔 그릇에 담았을 뿐인데 다들 감동이라 했다. 그들은 몇 년이 지난 뒤에 다시 만났을 때도 그날을 정말 특별하고 행복한 날이었다고 기억했다. 엄마의 그릇은 옷장 위에서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세상이 바뀌어 더는 귀한 물건이 아니었다. 아껴둔 시간만큼 가족들이 사용했으면 훨씬 유용했겠지만 그 시절 엄마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학교의 손님용 그릇은 싱크대 안쪽에서 1년에 몇 번이나 의미를 찾았을까? 기꺼이 꺼내어 사용하자 모두에게 특별한 하루를 선물했다. 엄마의 그릇에 담긴 딸에 대한 마음만큼은 세월이 바뀐 지금도 변함이 없을 거다. 그러나 요즘은 변화하는 시대에 빠르게 적응하고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쌓아둘 필요도 아낄 필요도 없는 시대가 되었다. 좋은 물건도 좋은 말도 담아 두지 말고 전달하고 나누어야 의미가 생기는 법이다.
방학을 며칠 앞둔 학교에서 자신을 놓아버린 한 선생님의 죽음에 온 나라가 충격에 빠졌다. 수많은 교사가 거리에 나서 죽기 싫다고 제대로 가르치고 싶다고 외치고 있다. 그들이 쏟아내는 황당한 사례들은 '세상에 이런 일이'가 아니라 이미 나와 내 동료가 겪고 있는 일이기에 이대로는 안 된다고 울분을 토하고 있다. 고인을 추모하는 수많은 근조 화환들과 위로의 글 사이에 선생님들은 자신이 겪은 사연을 쪽지로 남겼다. 악성 민원과 아동학대 신고의 위협으로 손발이 묶인 교육자로서의 좌절을 토로했다. 피를 토하는 외침들이 활자로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교육감님, 제발 내 딸 사건도 조사해주세요. 내 딸은 죽어서 꽃 한 송이 받지 못했어요." 어느 아버지의 절규, "부임 첫날, 한 시간 수업하고 아동학대 신고를 당했다." 어느 기간제 선생님의 외침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우울증으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던 교사의 마지막이 힘없이 죽음으로 내몰린 억울한 사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혹시 내 주변에는 이런 억울한 사건은 없었을까? 최근 몇 년간 내가 겪고 들은 민원도 참 다양했다. 학생들끼리 놀이 중에 생긴 사소한 다툼이 학교폭력 사건으로, 법적인 처리로 이어지는 것은 특별한 일도 아니다. 작은 일도 교육청으로 찾아가고 국민신문고부터 찾는 것이 다반사다. 교장, 교감은 언제 무슨 일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학생 수만큼 짊어지고 다닌다는 농담을 듣곤 했다. 학교에 시정을 요청하거나 대화로 풀기보다는 먼저 법적인 처리를 요구하는 현실에 교사와 학교가 일상적인 학교 교육에 전념할 수가 없다. '내 아이 기분 상해죄'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란다. 일부 뉴스에는 교장, 교감을 비롯한 학교가 교사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고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질책했다. 이번 사건의 조사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고 수많은 사례마다 상황이 다 다른데 어떻게 알고 그런 말을 하는가? 언론이 한쪽의 억울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 내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초등보통교육을 안전하게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 역할을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교사이고 각종 교육적인 지원을 하는 사람이 교장, 교감이며 교직원이다. 정당한 교육활동에 대해 교사는 철저히 보호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란다. 아동학대 등의 민원에 학교는 철저히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악성 민원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처음부터 악성 민원으로 단정하고 시작할 수는 없다. 아무리 믿는 교사라 할지라도 말이다. 교장, 교감은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모두를 보호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악성 민원이나 교권 침해, 무분별한 아동학대 신고로부터 현장 교사들도 보호받아야 하고 교장, 교감을 비롯한 모든 교직원도 함께 보호받아야 한다. 학교가 안심하고 교육활동에 전념할 수 있어야 우리 학생들 또한 질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너무나 꽃다운 선생님의 희생으로 학교 교육 정상화를 위한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정당한 생활지도와 교육활동을 보호받을 수 있는 각종 법안 제정이 시급하다. 다만 또 다른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신중하게 접근해주기를 바란다.
여름방학이 돌아왔다. 평가 담당 교사가 학생 생활 통지표 「나의 배움과 성장 이야기」를 가져왔다.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참여한 교과 학습 평가, 출결 상황과 가정통신을 학부모에게 보내는 성장 기록지다. 아이들의 배움과 성장을 들여다보고 싶어 반별로 하나씩 넘겨 가면서 찬찬히 살펴보았다. 오늘은 특별히 가정통신이 눈에 들어왔다. 학급별로 읽다 보니 선생님들의 성격이 그대로 보였다. 학생 개인별로 잘한 점과 보충할 점에 대해 안내한 글이었다. 어느 선생님은 간결하고 간단하게 어떤 선생님은 세심하고 자세하게 적었다. 꼼꼼하기로 유명한 선생님은 과제를 하지 않은 횟수까지 정확하게 안내하고 2학기에는 좀 더 성실하게 과제수행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쓰셨다. 한 선생님은 학생의 행동 특성과 학습 태도를 다양한 나무에 비유해 시적으로 표현했는데 아이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기도 했다. 어떤 방법이 더 낫다, 못하다 하기는 어렵다. 다만 생활 통지표에는 학부모가 궁금하게 여기는 학생의 학교생활을 최대한 친절하고 자세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학생의 현재의 모습을 과정 중심으로 객관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성장 가능성과 잠재력까지 살펴서 기술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교사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의 배움과 성장을 끌어내는 교육 전문가임을 여기서 보여주어야 한다. 교장인 내가 읽어도 담임교사가 어떤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지 느껴지는데 오직 내 아이만 바라보는 학부모는 어떨까? 정성을 다한 글 한 줄에서 교사의 깊은 고민과 아이들을 위한 사랑의 마음이 보일 것이다. 교사 평가와 더불어 학생들은 「나의 학교생활 돌아보기」를 별지로 작성했다. 학교생활과 학습 태도로 구분해서 자기 평가를 했다. 기억에 남는 학습활동과 이유, 내가 성장한 점과 2학기를 위한 나의 다짐도 적었다. 아직 글쓰기가 서툰 1~2학년은 간단하게 작성할 수 있도록 하였고 3학년부터는 더 구체적으로 이유를 밝혀 쓸 수 있게 두 가지 버전이었다. 아이들의 글을 하나씩 넘겨 가면서 읽으니 한 학기 동안 어떤 활동을 가장 즐겁게 참여했는지 어떤 순간에 감동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들도 성향에 따라 달랐다. 자신에게 아주 후한 아이와 대조적으로 충분히 잘하고 있음에도 자신에게 매우 엄격하게 점수를 주는 아이도 있었다. 짧은 문장으로 아이의 전부를 파악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하나씩 넘기는데 3학년의 글씨가 눈에 띄었다. 또박또박 반듯하게 썼고 정성스러웠다. 얼마나 바르고 예쁘게 썼는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글씨는 자기의 얼굴이라고 했다. 예전보다 아이들의 필체가 많이 흐트러진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예쁜 얼굴이 어디 달라질까만 또박또박 쓴 글씨의 주인이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태도를 지닌 아이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선생님들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아이들은 한껏 들떠서 방학을 기다린다. 한 학기를 마무리하며 학생을 평가하는 교사도 자신을 돌아보는 학생도, 글과 글씨에서 지금까지 쏟아온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었기를 바란다. 글과 글씨는 자기의 마음이요 태도이며 얼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