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박재원기자]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에 '독립운동 마을'이 들어섰다. 청주시는 26일 덕촌리에서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주관 기념사업 공모에 선정된 독립운동가 마을 준공식을 했다. 청주 1호 마을 기록 보관소 사업이기도 한 덕촌리 독립운동 마을은 독립운동가 정순만 선생의 활동사와 덕신학교 역사를 기록화했다. 정순만 선생은 하동 정씨 집성촌인 옥산면 덕촌리 반곡마을에서 태어났고, 이승만·박용만과 함께 독립운동계의 '3만'으로 불렸다. 선생은 안중근 의사 의거 계획을 주도했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사회 지도자로 민족운동을 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덕신학교는 정순만 선생이 설립한 학교로 2016년 복원돼 전통문화체험 교육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국비 1억1천600만 원을 들인 독립운동 마을은 태극기 거리, 애국의 길, 정순만 선생 기념관, 3·1운동 만세광장 등으로 꾸며졌다. / 박재원기자 ppjjww123@naver.com
[충북일보 강준식기자] 독립의 염원으로 '민족혼'이 불타올랐던 1919년 3·1운동. 100년이 흐른 현재 독립 대한민국으로서 선조들의 염원이 이뤄졌지만, 충북경찰 내에서는 여전히 친일의 잔재가 남아있는 모양새다. 친일 행적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친일경찰들이 충북경찰 홈페이지에 이름은 물론 사진까지 남아있어서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반민족 행위로 총경 이상의 자리에 올라 경찰서장·경찰국장 등 경찰 조직 내 요직을 거친 친일파다. 먼저, 1945년 9월 17일부터 1946년 3월 19일까지 청주경찰서(현 청주청원경찰서) 1대 경찰서장을 지낸 이명흠 총경의 모습은 청주청원경찰서 홈페이지 내 '역대 서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서장은 만주사변 당시였던 1931년 9월부터 1934년 3월까지 일본군에 군용품 수송 작전, 철도·전선 보호 경비, 비적 소탕 등 친일을 일삼았다. 1935년 11월 평안북도 강계경찰서 경부로 재직하면서도 중일전쟁과 관련한 군대·군수품 수송, 국경대 특별경비 등 친일파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1932년 '조선쇼와5년국제조사기념장'을 받고, '지나사변(중일전쟁) 공로자 공적조서'에 이름을 올린 악질 친일파였다. 하지만, 광복을 앞둔 1945년 2월 경시로 승진하면서 청주경찰서장으로 부임해 해방 이후까지 1대 경찰서장을 지냈다. 이듬해인 1946년 충북경찰부 경찰부장 대리를 겸하다 제4관구 경찰청(충북지방경찰청 전신) 부청장 등을 역임했다. 1948년 12월 20일부터 1949년 6월 3일까지 8대 영동경찰서장을 지낸 김상규 총경도 대표적인 충북 출신 친일경찰이다. 김 서장은 1937년 경감 시절 영동경찰서에서 사상범이나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는 고등형사로 악명을 높였다. 그는 2대 보은경찰서장·청주소방서장·경찰학교장·청주시 문화동 동장 등을 지내 광복 이후에도 권력을 놓지 않았다. 한정석 2대 충북경찰국장·김영규 3대 충북경찰국장·김상봉 6대 충북경찰국장도 친일경찰이지만, 충북청 홈페이지에는 역대 경찰국장 명단에 남아있다. 청주 출신인 한 국장은 1937년 청주시내 유력자 20여명의 부인을 앞세워 판매한 떡값에서 실비를 뺀 잔액 전부를 황군위문금으로 헌납하고, 중일전쟁 당시 국채소화(國債消化) 군대 및 유가족 후원·국방헌금 및 애국기 헌납자금 모집 등 일본군을 위해 민족 반역을 저질렀다. 문제는 이들의 친일 행적이 그 어디에도 기록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정삼철 충북학연구소장은 "친일인사들이 역대 서장으로 소개되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있다"라며 "역사적 사실로 볼 것인지, 후대 평가를 기준으로 바라볼 것인지 등 관점에 따라 다른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곧 있으면 충북지역에 경찰서가 탄생한 지도 100년이 된다"라며 "이 같은 기록을 무작정 없애기보다 '과거 충북경찰은 이렇게 출발했지만, 앞으로 경찰은 어떻게 될 것이다' 등 이들의 친일행적과 함께 나아갈 방향을 기록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이지 않나 생각한다"고 조언했다. / 강준식기자 good12003@naver.com
[충북일보 윤호노기자] 충북북부보훈지청은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선정한 12월의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6.21~ 1932.12.19) 의사를 지역민에게 홍보하고 나섰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저술해 한글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1928년 부흥원(復興院)을, 1929년 월진회를 설립해 농촌계몽운동을 실시했다. 1930년 3월 의사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중국 상해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라는 보도를 접하고 의거를 결심했다. 의거 3일 전 1932년 4월 26일,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를 대변한다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의거 당일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했고 경계가 삼엄한 가운데,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 연주가 거의 끝날 무렵, 의사는 앞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 위로 수통형 폭탄을 던졌고,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 등은 중상을 입었다. 그 결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하며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어졌다. 체포된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1932년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2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돼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충주 / 윤호노기자
[충북일보 김병학기자] 증평 출신 애국지사에 대한 추모제가 열려 나라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군은 지난 16일 애국자시 연병환(1878~1926) 연병호(1894~1963) 연미당(1908~1981) 선생의 추모제를 도안면 석곡리 명덕정사에서 가졌다. 연병환 연병호 연미당 선생은 독립 운동가 집안으로 유명하다. 연병환 선생은 1910년대 초 중국 연길 용정에서 세관원으로 근무하면서 연병오, 연병호, 연병주 세 아우를 모두 불러 독립 운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독립군의 자금과 무기를 조달하다 일제에 체포돼 2개월의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을 위해 힘쓴 공을 인정받아 2008년 건국훈장 대통령표창에 추서됐다. 그의 동생인 연병호 선생은 19세인 1913년에 형 병환이 있는 용정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세계한인동맹회에서 활동하고 만주에서는 독립군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 임시정부환국준비위원회 영접부장으로 활동하는 등 건국에 힘써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됐다. 연병환 선생 딸인 연미당 선생은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나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용정과 상해에서 활동했다. 청년여자동맹, 애국부인회, 한인여자청년동맹에서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 항전으로 결집하기 위한 민족통일전선 형성에 기여했다. 1932년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가 일어났을 때는 도시락 폭탄을 싼 보자기를 직접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임시정부가 일제를 피해 상하이부터 항저우,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강, 충칭까지 8천km의 대장정을 하는 동안 김구, 이동녕, 이시영 등 임정 요인들을 모셨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증평군은 올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및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연미당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또 도안면 광덕리에 독립운동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는 등 보훈 관련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군은 지난 2016년에는 연병호 선생 생가(도안면 석곡리) 일대 3만304㎡부지에 연병호 항일역사공원을 조성하고, 그의 성장과정과 독립운동 자료, 1920년 3월 1일 독립신문에 기고한 글을 적은 상징조형물 등을 비치했다. 이날 추모제에는 홍성열 증평군수와 김장응 애국지사 연병호선생 기념사업회장을 비롯해 유족, 보훈단체 회원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증평 / 김병학기자
[충북일보 윤호노기자] 충북북부보훈지청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선정한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안중근 의사를 선정했다. 안중근 의사는 지난 1879년 9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나 1905년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산동(山東) 지방의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했지만 1906년 부친의 별세로 귀국했다. 이후 평안남도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해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 만들어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했다. 안 의사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1907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으며 1908년 연추에서 동의회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국내진공작전을 벌였다. 1909년에는 동지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조직, 단지를 하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했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를 처단할 결심을 했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에게 총탄을 명중시켜 사망에 이르게 했으며, 현장에서 체포돼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됐다.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으나 재판은 일본인들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됐고, 2월 14일 공판에서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 그는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공소를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 저술을 끝내고 '동양평화론'의 저술을 시작했다. 그는 저술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 작은 소망조차도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했고,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그는 '동양평화론'에서 이토의 처단은 사사로운 감정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한국 국권의 회복과 동양평화의 회복을 위한 부득이한 조치임을 주장했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충주 / 윤호노기자
[충북일보 강준식기자] "윤봉길에게 상해 지리를 알려주거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 숨은 공로자가 있다. 옥천 출신 곽중규(1891~1950·사진) 선생이다. 곽중규 선생은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옥천 이원면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해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대전형무소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1921년 9월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가던 중 중국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듬해인 192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비서로 취임했다. 이후 비서장으로 승진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4년 5월 상해교민회에서 설립한 인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며 교포 자녀들에게 민족사상을 교육하기도 했다. 1925년 3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돼 나창헌·최석순·강창제 등과 함께 임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의 탄핵안을 제출했다. 1927년 10월 상해 교민단의사회 선거에서 상해교민회 단장으로 선출된 뒤부터는 상해 교민들의 생활안정 등을 위해 활동하며 3·1절 기념식 등을 개최했다. 상해교민회 단장을 사임한 1929년 상해 프랑스 조계로 이사한 곽 선생은 성광사진관을 개업해 독립운동을 위한 연락장소로 제공했다. 1931년 9월부터 윤봉길 의사를 사진관에 은신하게 한 뒤 동생 곽중선(1907~1935)을 통해 윤 의사에게 상해 지리와 풍습을 알려주고 거사를 대비하도록 했다. 윤 의사는 곽중규 형제의 도움을 받아 이듬해 훙커우 공원 의거를 실행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된 곽 선생은 1933년 4월 상해로 돌아와 한족유일독립당촉성회 간부로 선출됐다. 같은 해 밀정의 제보로 체포돼 신의주형무소에서 2년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곽 선생은 1935년 5월 가출옥한 뒤 동생 곽중혁의 집에서 머물면서 상해에 남아있던 가족들과 비밀연락을 취하던 중 곽중선이 괴한의 총격으로 순국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하지만, 그는 신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1938년 석가장으로 이주해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정부는 1992년 곽중규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충북남부보훈지청은 곽 선생을 '9월 우리고장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 강준식기자 good12003@naver.com
[충북일보 김윤수기자] 충북도내 중학교 인문동아리 교사와 학생들로 구성된 60명이 중국·러시아에 있는 항일 독립운동지 탐방에 나섰다. 이번 국외체험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12~19일 7박 8일간 진행된다. 체험단은 중학교 인문동아리 12개 팀으로 총 60명의 교사와 학생들로 구성되며, 김병우 충북도교육감도 체험단과 일정을 함께한다. 체험단은 중국 연길, 용정, 백두산, 훈춘, 러시아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등을 찾을 예정이다. 또한 중국 윤동주 생가, 명동학교, 서전서숙, 러시아 안중근 의사 단지 동맹비, 신한촌, 이상설 선생 유허비 등을 찾아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지사들의 뜻을 기리는 헌화와 주변 청소를 할 계획이다. 특히 오는 15일 광복절을 맞이해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크라스키노) 앞에서 독립만세 삼창을 하면서 안 의사의 뜻을 기릴 예정이다. 또한 러시아, 중국, 북한 등 3국 국경이 만나는 두만강 접경 지역 탐방과 민족의 영산 백두산 등반에 이어, 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거리에서 학생들이 준비한 부채춤, 태권무, K-pop 댄스 등 합동 공연을 하기로 했다. 참가학생들은 고구려의 기상이 서려 있는 우수리스크의 발해 성터를 방문해 '발해를 내 삶으로'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고 태극기를 들고 넓은 평원을 달리는 멋진 장면을 연출하며 호연지기를 다질 예정이다. 이어 하바로프스크까지 운행하는 시베리아 횡단 야간열차 안에서는 지난 1937년에 열차를 통해 이뤄진 고려인 강제이주를 주제로 자유토론을 시행하기로 했다. 도교육청은 9월 중으로 국외체험을 다녀온 결과를 소책자로 발간해 그날의 감동과 의미를 되새기도록 할 예정이다. / 김윤수기자
[충북일보 강준식기자] 독립에 가장 필요했던 '돈'. 독립자금을 구하기 위해 동북아시아를 뛰어다닌 독립운동가가 있다. 보은 출신 이중화(李重華·1880~?) 선생이다. 1880년 보은에서 태어난 이중화 선생은 3·1운동이 펼쳐지던 1919년 7월께부터 러시아 유격대장 메리코포스코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이 선생이 간도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 이동휘(李東輝)와 연락을 취하는 등 임시정부와 교류하던 것도 이때부터다. 이듬해인 1920년 12월 24일 중국 안동현(安東縣)에서 임시정부 요원 김판이(金判伊)를 만나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로 협의했다. 경성부(京城府)에 잠입한 이 선생은 1921년 5월 중순께까지 모의 폭탄을 제조하기도 했다. 또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증서 1천 원권·500원권·100원권 등 모두 7천600원 상당의 증서와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명의의 수령서 10매를 지닌 뒤 경남 밀양으로 향했다. 이 선생은 밀양에서 박수엽(朴秀燁)·박병목(朴炳穆)에게 각 2회, 이병규(李炳圭)·안종엽(安鍾燁)에게 각 1회, 손진원(孫振遠)에게 3회에 걸쳐 군자금을 모집했다. 모두 3천여 원의 군자금을 모집한 이 선생은 음력 7월께 김판이에게 전달해 임시정부로 송금하도록 했다. 이후 이 선생은 대구와 밀양을 오가며 김판이의 귀환을 기다리던 중 1921년 10월 21일 대구 대화정(大和町)에서 대구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됐다. 1922년 2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강도·폭발물벌칙 위반 등으로 징역 8년을 받고 공소했으나 같은 해 3월 3일 공소 취하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지난 2013년 이중화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충북남부보훈지청은 '8월 우리고장 독립운동가'로 이중화 선생을 선정했다. 지청은 이와 함께 보은군 내북면 봉황리의 '이승칠 지사 공적비'를 이달의 우리고장 현충시설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승칠 지사는 1910년 사헌부 감찰직 재직 중 경술국치를 당하자 자결 순국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2년 사망한 일왕의 상복착용 강요에 이를 거부, 같은 해 6월 26일 '몸이 원수의 상복을 입는다면 이는 만대의 수치다. 머리가 떨어지더라도 오랑캐는 되 수 없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보은군 내북면 봉황대에서 투신 순국했다. 내북애향동지회가 건립한 공적비는 2010년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 강준식기자 good12003@naver.com
[충북일보] "이천만 동포는 최후의 일인이 죽을 때까지 독립을 도와 이루게 할 줄로 확신하노라" 충북북부보훈지청은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동휘(1873.6.20~1935.1.31) 선생을 홍보하고 나섰다. 1873년 6월 20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한 선생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1905년 보창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운동에 헌신했다. 이후 대중을 자각시켜 구국운동에 나서게 하기 위해 교육문화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기독교야말로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라는 신념에서 기독교 전도활동에 힘썼다. 선생은 서북학회와 비밀결사 신민회의 지도자로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1911년 3월 안명근·양기탁사건에 연루돼 일제총감부에 체포돼 인천 앞 바다에 있는 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보내야했다. 1912년 6월 유배에서 해제된 선생은 1913년 2월경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로 탈출했다. 선생은 북간도 한인자치기관인 간민회를 지도했고, 북간도 각지를 순회하며 신교육 보급과 기독교 전도활동을 계속하며 동포사회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1914년에는 제2의 러일전쟁 발발에 대비해 항일광복전쟁계획을 수립했다. 이를 위해 선생은 만주와 러시아의 민족운동세력을 규합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으며, 북간도 왕청현 나자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1918년, 선생은 하바로브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 유동열, 김립, 오성묵, 오와실리, 이인섭 등 동지들과 최초의 한인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 발행, 군사학교 설립, 일본군병사들을 상대로 한 반제반전(反帝反戰)선전, 한인적위대 조직 등을 추진했다. 선생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에 취임했으며, 상해임시정부는 선생을 비롯한 주요 각원들이 취임함으로써 지지기반이 훨씬 확대됐다. 선생은 안정된 체제에서 방안을 찾는 정치가라기보다는 혁명적 방법에 의해서만이 조국광복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녔던 진보적 민족혁명가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충주 / 윤호노기자
[충북일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시작되기 직전인 2월 하순께 비밀스러운 지령이 내려온다. 지령을 내린 이는 청주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인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1861~1922) 선생, 지령을 받은 이는 보은 출신 독립운동가 윤정훈(尹鼎勳·1881~1921) 선생이다. 그 누구도 몰라야 하는 지령의 내용은 '독립만세 운동'이었다. 평소 손병희 선생과 친분이 두터웠던 윤 선생은 이 같은 비밀 지령을 받고 거사를 위한 독립선언문을 입수한다. 윤 선생은 같은 보은 출신인 이용기(李龍基·1880~1942)·최용문(崔容門·1898~1981)·안만순(安萬淳·1899~1968) 등을 규합해 본격적인 거사를 계획한다.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인쇄한 이들은 3월 15일 보은지구 3·1운동을 주동한다. 같은해 4월 8일 보은지역 면별로 당시 내북면 산성리 노고성, 외북면 관모봉, 속리산 문장대 등 거사 장소를 지정한다. 만세운동은 쉽지 않았다. 무명산(無名山)에서 같은 마을 사람 윤홍훈(尹洪勳) 등 많은 사람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윤 선생과 함께 보은지구 3·1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 모두 체포됐다. 윤 선생은 이후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3·1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충북남부보훈지청은 '7월 우리고장 독립운동가'로 윤정훈 선생을 선정했다. 이와 함께 청주시에 있는 '6·25참전유공자기념탑'은 '7월 우리고장 현충시설'로 선정됐다. 청주 진재공원 내 지난 2006년 세워진 6·25참전유공자기념탑은 지역 출신 참전유공자의 고귀한 정신과 충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 강준식기자 good12003@naver.com
[충북일보=증평]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증평군 출신의 호국인물들의 활동상이 주목받고 있다. 증평군은 6.25전쟁영웅으로 널리 알려진 연제근(1930~1950) 상사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연 상사는 도안면 노암리 출신으로, 1948년 군에 자원입대했다. 6·25전쟁이 한창인 지난 1950년 9월 17일 오전 4시 육군 3사단 22연대 1대대 분대장으로 12명의 돌격대원을 이끌고 포항을 탈환하기 위한 형산강 도하작전에 참가했다. 수류탄 10여 발을 몸에 단채 수중포복으로 돌진해 적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는 등 포항탈환의 결정적 공훈을 세웠으나 그를 포함한 8명의 특공대원은 안타깝게도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으나 이를 계기로 국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북진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정부는 고인의 전공을 기려 2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1950년 12월), 화랑무공훈장(1951년 8월), 무공포장(1956년 10월)을 각각 추서했다. 2003년 1월 전쟁기념관의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데 이어 2012년 8월에는 국가보훈처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뽑혔다. 지난 1월에는 전쟁기념관 1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됐다. 군은 연 상사를 기리기 위해 도안면 화성리에 7천838㎡ 면적의 연제근상사 공원을 조성했다. 이곳은 3m높이의 연 상사 동상과 금수강산 조형물, 잔디광장, 산책로, 파고라 등을 갖추고 있어 아이들의 교육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연 상사보다 앞선 일제강점기에는 도안면 출신 연병환, 연병호 선생 가족들이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연병환(1878~1926) 선생은 중국 용정 해관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북간도 만세운동(1919)에 큰 역할을 하는 등 그 공적을 인정받아 2008년 건국훈장 대통령표창에 추서됐다. 동생 연병호(1894~1963) 선생과 딸 연미당(1908~1981) 선생 역시 독립에 앞장섰다. 연병호 선생은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세계한인동맹회에서 활동했으며 만주에서는 독립군으로 활동했고 연미당 선생은 청년여자동맹, 애국부인회, 한인여자청년동맹에서 후방사업 지원 및 선전활동을 하고 1932년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가 일어났을때 도시락 폭탄을 싼 보자기를 직접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증평군은 이들의 행적을 기려 도안면 석곡리 연병호 생가(충북도 기념물 122호)일원에 항일역사공원을 조성했다. 3만304㎡의 면적의 이곳에는 연병호선생의 성장과정과 독립운동 등의 자료를 모아 놓은 전시실, 연병호선생 동상과 상징조형물이 있다. 관람객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과 무궁화동산 등도 만들어져 있다. 증평 / 김병학기자
[충북일보] 대한제국 육군참위(陸軍參尉) 중암(重岩) 윤병한(尹炳漢·1873~1932). 대한제국을 수호하는 군인이었던 진천 출신 윤병한 선생은 일제가 군대를 강제해산하자 의병에 투신, 일제에 항쟁했다. 가슴 아픈 역사로 기록된 경술국치(庚戌國恥)로 국권이 침탈되자 고향인 진천으로 내려와 농민계몽에 몸을 바친다. 윤 선생은 조림사업을 위해 면유림을 대여받아 서산계(西山契)를 조직, 계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시기 광혜원 동지던 정관옥(鄭寬玉)·오은영(吳殷泳) 등과 의논해 자신이 경영하는 회죽리(會竹里) 일대 면유림에 식목하는 날을 이용, 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거사일은 4월 2일이었다.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한 이들은 당일 식목작업 중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태극기를 흔들며 선두에 서자 그 뒤로 정운화(鄭雲和)·남계홍(南啓弘)·백선옥(白先玉)·이영호(李榮鎬) 등 200여명이 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윤 선생은 마을 안을 행진하다 만승면(萬升面) 사무소에 당도, 면서기에게 "같은 조선사람으로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라"고 요구했다. 면사무소에 돌을 던지고, 곡괭이 등으로 파괴하는 등 시위는 점차 격렬해졌다. 시위 행렬은 면사무소 인근 신축 중이던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건축자재 등을 폐기하고, 벽을 곡괭이로 헐어버리는 등 참지 않았다. 이튿날 열리는 광혜원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시위를 확대하기 위해 이날 저녁 면사무소에 찾아가 광신사(廣信社)에서 만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라'는 경고문 등을 김동화(金東華)를 시켜 백지에 쓰게 뒤 면사무소 소사인 박수문(朴壽文)에게 20여매를 인쇄하게 해 이날 밤 장터 요소요소에 붙여놓게 했다. 마침내 이튿날. 윤 선생은 장터에 모인 2천여명의 군중 선두에 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이어갔다. 하지만, 광혜원 헌병분견소장의 원군 요청으로 진천에서 지원된 일본 헌병 10여명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유치선(柳致先)과 그의 어머니가 적탄에 맞아 현장에서 희생된 것을 비롯해 시위대 10여명이 순국하고, 시위대는 많은 부상자를 낸 채 해산했다. 시위 다음날인 4일 증파된 일본 헌병 20명을 광혜원 독립만세시위 주동자를 색출하기 시작했다. 윤 선생과 그의 동지들은 이때 헌병에 붙잡힌다. 같은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소요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르게 된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데 투신한 대한제국의 참된 군인이자 독립운동가 윤병한 선생은 1932년 10월 4일 나라의 광복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된다. 정부는 윤병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그가 순국한 지 68년이 흐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다. 충북남부보훈지청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수많은 군인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를 '6월 우리고장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 강준식기자 good12003@naver.com
[충북일보=충주]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충북북부보훈지청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 한용운(1879.8.29.~1944.6.29.) 선생을 홍보하고 나섰다. 선생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1913년 한국불교가 새로운 문명세계에 적응할 수 있는 개혁방안을 제시한 기념비적 책인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발간했으며, 그때부터 불교의 혁신 운동을 일으킨 주역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됐다. 1919년에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 및 전국적인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도록 권했다. 당시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모두 일경에게 체포됐으며, 선생은 같은 해 7월 10일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란 논설을 집필해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의연하게 강조했다. 선생은 1921년 12월 21일 석방된 뒤에도 민족운동을 계속 이어갔다.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1923년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피선돼 활동했다. 특히 물산장려를 통한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 운동에 앞장섰다. 1927년 2월에는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의 창설이 추진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신간회가 창립되자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돼 민족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1933년 55세 되던 해 지금의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자신의 집을 짓고 입적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집을 지을 때 선생을 돕던 인사들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터를 잡을 것을 권유했지만,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고 하며 끝내 동북 방향으로 집을 틀어 버리고 말았다. 선생의 민족적 자존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생은 일제말기 총동원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 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민족적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했다. 선생은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했으며,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충주 / 윤호노기자 한용운 선생 - 한용운 선생. 충북북부보훈지청 제공 한용운 선생(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심우 -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심우장(선생이 입적할 때까지 여생은 보낸 곳). 충북북부보훈지청 제공 6월의 독립운동가 한용운 선생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저항 시인이자 승려인 독립투사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충북북부보훈지청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 한용운(1879.8.29.~1944.6.29.) 선생을 홍보하고 나섰다. 선생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1913년 한국불교가 새로운 문명세계에 적응할 수 있는 개혁방안을 제시한 기념비적 책인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발간했으며, 그때부터 불교의 혁신 운동을 일으킨 주역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됐다. 1919년에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 및 전국적인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도록 권했다. 당시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모두 일경에게 체포됐으며, 선생은 같은 해 7월 10일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란 논설을 집필해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의연하게 강조했다. 선생은 1921년 12월 21일 석방된 뒤에도 민족운동을 계속 이어갔다.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1923년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피선돼 활동했다. 특히 물산장려를 통한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 운동에 앞장섰다. 1927년 2월에는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의 창설이 추진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신간회가 창립되자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돼 민족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1933년 55세 되던 해 지금의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자신의 집을 짓고 입적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집을 지을 때 선생을 돕던 인사들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터를 잡을 것을 권유했지만,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고 하며 끝내 동북 방향으로 집을 틀어 버리고 말았다. 선생의 민족적 자존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생은 일제말기 총동원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 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민족적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했다. 선생은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했으며,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충주 / 윤호노기자
[충북일보] 6월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산화한 호국영령을 기리는 호국보훈의달이다. 이같이 지정된 이유는 현충일을 포함해 한국전쟁과 연평해전이 발발한 달이기 때문이다. '추모의 기간(1~10일)', '감사의 기간(11~20일)', '화합과 단결의 기간(21~30일)'으로 나뉘어진 호국보훈의달. 조국을 위해 무수히 스러져간,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선열을 '64회 현충일'을 맞아 기리는 시간을 가져본다.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 역사에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전쟁이 시작됐다. 우리나라 육군본부는 같은 해 7월 5일 한강 방어선을 담당한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기반으로 국군 제1군단을 창설했다. 당시 1군단의 작전지역은 진천·청주·음성·이천지역이었다. 이후 1군단은 서부전선에서 후퇴한 5개 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의 병력을 통합해 수도사단·제1사단·제2사단 등 3개 사단으로 재편되면서 수도사단은 진천 방어를, 제1사단은 음성 방어를 맡게 됐다. 전쟁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방어작전을 위해 진천으로 이동하던 수도사단은 작전지역에 도착하기도 전인 7월 6일 북한군은 이미 진천 북쪽의 이월면 일대까지 진출했다. 수도사단이 중서부지역 교통의 요충지던 진천을 북한군에 내준다면 청주부터 대전까지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진출로를 줄 뿐 아니라 미군의 퇴로마저 차단당할 위기에 처했다. 신속히 진천 북쪽으로 이동한 수도사단 1연대는 진천읍 남쪽 문안산과 방화산 일대에 주방어선을 편성, 청주와 천안 방면으로 향하는 도로를 봉쇄하겠다는 작전을 세웠다. 7월 7일 진천 이월면 중산리. 1연대는 제6사단 19연대 병력과 함께 진천으로 남하하던 북한군을 기습공격해 남하를 지연시켰다. 이튿날인 8일 진천 백곡천을 경계로 북한군 남하를 막다 방어선이 뚫리자 진천 남쪽으로 이동, 수도사단 주방어선에 합류했다. 제18연대까지 합세한 수도사단은 문안산과 봉화산 사이에 있는 잣고개를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진천중학교 출신 학생 100여명도 자신들의 고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전투에 동참했다. 한국전쟁 초기 가장 치열했던 '진천 전투'가 절정에 치닫는 순간이었다. 전쟁 발발 14일이 흐른 1950년 7월 9일. 진천읍에 집결한 북한군 2사단은 오전부터 국군 방어진지를 향해 전면전을 시도했다. 방어진지 절대사수를 목표로 맹렬히 전투에 임한 국군은 두 차례나 방어진지를 빼앗겼다가 되찾는 과정에서 수도 없이 산화했다. 하지만, 하루 뒤인 10일 제16연대가 지키던 구곡리 일대 방어선이 돌파됐다. 11일에는 북한군 전차가 국군의 방어선을 뚫고 남하하면서 봉화산 일대에 있던 제1연대의 배후를 위협하는 위기에 몰렸다. 당시 수도사단장이던 김석원 장군은 모든 부대를 청주 미호천 남쪽으로 철수시킨 뒤 미호천을 건너는 다리들을 폭파했다. 국군을 추격하던 북한군은 미군 전폭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 초기던 1950년 7월 6~13일 진천과 청주 일대에서 벌인 이 '진천 전투'는 북한군 남하 계획 저지와 국군·유엔군 방어선 재편 시간 확보 등 보이지 않는 승리로 남게 됐다. 휴전 20여년 뒤인 1978년 1월 진천읍 행정리 잣고개 마루에는 '진천 전투'에서 산화한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해 '6·25격전지비'를 건립했다. 충북남부보훈지청은 '6·25격전지비'를 '6월 우리고장 현충시설'로 선정했다. 우리 고장 충북 진천을 지키기 위해 까까머리 중학생까지 목숨을 걸고 나섰던 그날의 결의를 잊지 말아야 한다. / 강준식기자 good12003@naver.com
[충북일보]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왜색문화와 일제 잔재를 제거하자는 운동이 충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정지용(鄭芝溶·1902∼1950) 선생의 옥천 생가 앞에는 큰 돌다리 하나가 놓여 있다. 이 돌다리는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의 민족성을 말살하는 동시에 일제에 충성을 강요하는 내용의 맹세문이 적힌 '황국신민서사비'였다. 옥천군은 이를 알리기 위해 최근 자세한 설명이 담긴 표지석을 만들어 설치했다. 음성향교는 '유림독립항쟁파리장서 100주년 기념식'에서 향교 입구에 세워진 친일파 이해용의 공덕비를 철거했다. 이해용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를 보면 친일파로 기록돼있다. 이완용과는 6촌 사이다. 기념물을 철거하는 대신 단죄문을 설치한 곳도 있다.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 경계 박달재 정상에는 '울고 넘는 박달재', '소양강 처녀',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노래로 유명한 반야월의 기념비가 있다. 1988년 11월 한 봉사단체가 건립했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가 일제 침략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른 과거를 문제 삼았다. 연구소는 2016년 3월 '가수 반야월의 일제하 협력 행위'라는 제목의 '단죄판(단죄문)'을 세웠다. 교육계도 일제 잔재를 지우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충북중앙도서관은 충북교육도서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85년부터 중앙도서관으로 불렸으나 '중앙'이란 지명이 일제 잔재 느낌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충북도교육청은 역사바로세우기 추진단을 조직, 일제 잔재 청산과 새로운 학교문화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친일 음악가 작사·작곡 교가 교체가 대표적이다. 도내 초·중·고 376개교를 조사한 결과 19개교가 친일 음악가들이 만든 노래를 교가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교가는 친일 음악가로 꼽히는 현제명·김성태·김동진·이흥렬이 작곡에 참여하거나, 친독재 논란을 빚는 이은상이 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추진단은 훈화·훈시, 공람 등 친일 용어도 우리말로 순화해 사용하도록 할 예정이다. 제천 입석초등학교는 일제 잔재 철폐를 위해 교목을 향나무에서 소나무로 변경했다. 가이즈카 향나무는 일제강점기 식민정책의 하나로 각 학교에 식재됐다고 알려져 있다. 이 학교는 교정에 있던 가이즈카 향나무 10여 그루를 제거하고 대신 소나무를 심었다. 진천여자중학교도 지난 식목행사를 통해 학교나무로 지정됐던 향나무를 교목에서 해제했다. 대신 교화인 목련을 학생들이 직접 심었다. 일각에서는 학교 문화와 용어에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까지 뜯어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학교에서 아직도 쓰이고 있는 '주번', '치사' 등 일본말을 우리말로 바로잡고, 일제의 억압적 통제가 녹아있는 '애국 조회', '두발 검사', '복장 검사' 등의 관행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한국국공립유치원교원연합회 등 교원 단체들은 '유치원' 명칭이 일제 잔재 용어라며 '유아학교'로 바꿔달라고 정부에 관련 법 개정 건의서를 낸 상태다. 시민사회단체 한 관계자는 "민간뿐 아니라 지자체도 일제 잔재 청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모든 기관이 힘을 모아야 일제 잔재가 뿌리뽑힐 수 있다"고 말했다. / 유소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