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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숙

시인·한국어 강사

이 가을, 무엇을 가을할 수 있을까?

햇볕이 귀하고 소중한 가을이다. 바람 역시 과하지 않으며 적당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햇볕 한 줌 주머니에 보관해 다니고 싶고, 바람도 어딘가에 가두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적당하게 꺼내서 쓰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계절이 비뚤어진 것처럼 기후 현상도 정상 궤도를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잦은 비가 내렸고 반갑지 않은 태풍도 여러 차례 여기저기 흠집을 내며 지나갔다. 수확을 앞두고 콧노래라도 흥얼대야 할 시기에, 여름 끝 풍성한 가을을 맞이해야 할 시기에 손에 쥐었던 것들을 놓치고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는 모습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햇볕 좋은 날은 나도 모르게 연달아 웃음이 나오고 자꾸만 하늘을 보게 된다. 다문화가족인 결혼이민자들을 만나는 소중한 시간 역시 햇볕이나 가을바람을 기다리는 만큼 나에게는 따뜻하고 귀한 시간이다.

우리들은 국적 취득을 위해 주말마다 만나 공부를 한다. 동참하는 이민자들은 거의 농사를 짓고 있다. 그래서 결혼이민자들이 만나는 시간은 누구보다도 값지고 소중한 시간이다. 여름에는 새벽에 더위를 피해서 들에 나가 일을 하고 서둘러 공부를 하러 나온다. 그리고 더위가 좀 꺾일 즈음 다시 저녁나절에 들로 나간다. 그렇게 땀 흘려 여름을 보냈기에 값진 가을을 선사받은 셈이다.

그런데 이번 가을은 그들에게도 어려움이 빗겨가지 않았다. 과수원을 하는 이민자들에게는 거친 바람의 손길이 미쳐서 가을을 앞두고 허망한 한숨을 짓게 했고, 벼농사를 짓는 이민자들에게는 비와 바람이 몰아쳐서 여름내 땀 흘린 사람들을 망연자실 주저앉게 만들었다.

나에게 결혼이민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크고 작은 감동에 목울대가 따뜻해질 때가 참 많다. 다소 서툴지만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음이 출렁일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동네에서 부녀회장을 맡고 있는 태국에서 온 학습자는 늘 책가방이 무겁다. 고구마, 우유, 바나나, 빵 등 간식을 준비해 오기 때문이다. 농사도 많이 짓는데, 부녀회장을 맡고 있어 마을 일을 도맡아 한다. 심지어 김치를 해서 나누는가 하면 된장이나 고추장 등을 직접 담가 돌리고 판매까지도 한다. 그리고 다문화가족이나 이민자들이 함께 할 때는 늘 잊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형제나 자매와 마찬가지라며 챙겨주고 격려하고 때로는 위로한다.

필리핀이 고향인 학습자는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편이라서 언제나 밝은 웃음과 목소리를 선사하며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그런데 이번 가을에는 비와 태풍 피해가 커서 얼굴이 좀 어두워졌다. 입가에 웃음도 어디론가 달아나고 걱정 가득 담긴 말을 했다.

"선생님, 어떻게 해요? 나락이 많이 쓰러졌어요. 보상도 못 받는데요!"

콤바인을 직접 운전해 벼를 수확하는 우리 학습자의 시름이 깊다. 그리고 벼가 쓰러져 콤바인으로 수확을 하면 콤바인도 쉽게 고장이 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자 라오스에서 온 학습자가 말을 받는다.

"그럼 언니가 콤바인 고쳐 줄게"

그 한마디에 함께 공부를 하던, 다소 침체되었던 강의실에 웃음꽃이 피었다. 라오스에서 온 학습자는 오래전부터 농기계 수리점을 하고 있다. 웬만한 농기계는 손수 수리를 다 하고 있다.

스르르 강의실 분위기가 조금 말랑말랑하고 따뜻해졌다. 서로 안부를 물으며 위로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래도 가을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고마움을 느끼는 시간을 마련할 수 있어 다행이다.

무엇을 가을할 수 있을까· 염려하던 마음에 과하지 않은 햇볕과 과하지 않은 가을바람이 함께 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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