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1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웹출고시간2019.09.02 11:03:24
  • 최종수정2019.09.02 11:03:24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시절의 지청천 장군.

[충북일보 윤호노기자]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는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시다"

충북북부보훈지청은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선정한 9월의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을 홍보하고 나섰다.

장군은 1888년 1월 25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1907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지만 1909년 폐교돼 일본사관학교에 유학했고, 1912년 5월 졸업할 때까지 군사학 등을 공부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으로 독립군 간부 및 병사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교포사회를 기반으로 성립한 중학과정의 독립군 양성 학교였다.

장군은 1921년 3월 한인 무장세력이 세운 '대한의용군 총사령부'의 참모부원으로 선출됐고, '대한독립단'으로 개편된 뒤 군사고문으로 추대됐다.

같은 해 6월 하순 홍범도·안무 등의 부대와 함께 장군 휘하 부대는 고려혁명군정의회 제3연대로 편성됐는데, 장군은 이 부대의 주요 간부 직책을 맡게 됐다.

1925년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조직이자 교민 자치조직인 정의부(正義府) 군사위원장과 사령관을 겸했고, 1928년 만주의 유력조직인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등 3부(府) 통합운동에 노력했다.

1930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에 취임, 중국의용군과 합세해 주로 하얼빈 부근의 북만주 일대에서 독립전쟁을 전개했다.

특히 1933년 6월 30일 중국 연변의 나자구에서 조선 회령으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기습해 거둔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이 유명하다.

1938년 임시정부 군사학편수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1939년 10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출된 뒤 군무부장을 겸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임시정부는 군사부문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장군은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1940년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한국광복군이 창건돼 장군은 총사령에 취임해 해방 직후까지 한국광복군을 총지휘했다.

또 환국할 때까지 중국대륙에서 중국, 미국 등과 힘을 합쳐 일제 타도와 조국광복을 위해 맹렬히 활동했다.

해방 이후에 정계에서 활약하던 장군은 1957년 1월 15일 69세로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충주 / 윤호노기자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