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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비

시인, 주성초등학교병설유교사

비의 칼날이 허공을 긋는다. 허공이 수많은 세로 조각으로 분할된다. 허공을 쪼개며 혹은 합치며 울고 있는 빗소리를 귀에 담는다. 창밖에 눈을 던져 운동장을 포획한다. 왕도 비를 보고 있는 걸까. 세종대왕 동상이 먼 하늘에 굳은 표정을 걸고 있다. 한 손은 하늘을 향해 책을 펼쳐 들고, 한 손은 땅을 쓰다듬듯 아래를 향해 펼친 채. 조회대 위에도 축구 골대 위에도 삼삼오오 걸어가는 아이들의 우산 위에도 비가 꽂힌다. 느티나무에 숨어 있던 까치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꺾으며 잎이 무성한 목련 가지 속으로 숨어든다. 빗소리가 날개도 없이 귓속으로 날아든다. 그날 내리던 빗소리가 기억의 배를 타고 시간을 거슬러 내 머릿속에 정박한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세차게 내렸었다. 비를 맞으며 윤동주 생가에 갔었다. 신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한 평도 안 돼 보이는 방이었다. 초라한 화환이 선 채로 바짝 말라 있었다. 그 옆 흑백 사진 속의 동주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영정사진을 향해 절을 했다. 생각보다 작은 생가의 모습에 뾰족한 꼬챙이로 가슴이 쿡쿡 찔리는 것 같았다. 누구를 탓하랴. 우리가 힘없는 민족으로 산 결과인 것을. 나와 우리 민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대성중학교로 발길을 옮겼다. 발이 비에 젖은 볏짐처럼 무거웠다. 2층 전시관에서 그의 생애를 해설사에게 들었다. 29살의 짧은 날을 살다간 그의 얼굴이 액자 속에서 애련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독립운동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는 동주. 생체실험을 받다가 해방을 몇 달 남기고 숨을 놓았다는 동주. 여리디 여려 보이는 눈빛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차갑고 깜깜한 감옥 안에서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생체 실험을 당하며, 이름 모를 주사를 맞으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가슴에서 서늘함 한 덩이가 올라왔다.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사람에겐 죽음이 휴식이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겐 죽음이 공포가 된다는데. 과연 동주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어쩌면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공포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모진 고문 속에 맞는 죽음은 어쩌면 휴식이 아니었을까.

만약 내게 불현듯 죽음이 노크한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것은 휴식일까 두려움일까. 이제 아이도 제법 자라서 나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이고, 정리해야 할 재산도 없으니 휴식으로 다가올까. 그래도 아직 아이가 홀로 우뚝 선 것이 아니니 두려움으로 다가올까. 웃으며 죽음에게 문을 열어줄까. 문고리를 안에서 단단히 잡고 놓아주지 않을까.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하늘과 땅을 그으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차단해 주고 있다. 세상사 모두 잊고 생각의 노를 젓는다. 내게 죽음이 온다면 두려움에 떨지 말고 활짝 문을 열어 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함박꽃처럼 하얗게 웃으며 그를 맞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를 거실에 들이고 찻물을 끓이고 싶다. 철관음을 내리고 금준미를 내려 함께 마시리라. 입안에 가득 피어나는 시간의 향기를 목으로 넘기며 지난날을 음미하리라. 남들이 보기에 성공한 삶은 아니라도 이만하면 열심히 살았다고 그에게 말하며 초의 선사에 관해 이야기 하리라. 그의 눈을 보며, 어차피 떠날 길인데 서두르지 말자고 말하련다. 잠시 비가 그친 틈을 타서 나서자고 다독다독 말할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비가 오후 내내 허공의 살을 가르고 있다. 세종대왕이 단단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한 채 젖고 있다. 왕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휴식이었을까 혹은 공포였을까. 발칙한 상상을 해 본다. 오늘은 생각에 발 담그기 딱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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