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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희

수필가

한밤중 기습 공격이었다. 경쟁국보다 두 시간 먼저 출시되어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은 5G 상용화 이야기다. 누군가에겐 절체절명의 긴박한 순간이었지만 나 같은 기계치에겐 강 건너 불이요, 밤잠을 설치게 한 달밤의 체조일 뿐이었다.

"빠르고, 빠릿하고, 더 많이 품는다."라는 슬로건은 5G의 특징을 간결하게 표현한 문구다. 그중 '빠름'은 단연코 5G의 얼굴마담이다. 초월할 초자를 붙인 속도에 장단을 맞춘 통신업체는 초고속 세상을 손에 쥐어보라며 뭇사람을 부추긴다. 도대체 얼마나 빠르길래 저렇게 호들갑을 떨까. 감感이 오지 않으니 흥興도 일지 않는다.

빠른 세상에 어울리지 않게 나는 매사에 느리다. 가뜩이나 굼뜬 사람이 위급한 상황과 맞닥뜨리면 더욱더 궁싯거린다. 아니 침착해진다. 후드득거리는 마음과 달리 두 발에 힘이 들어가고 사고는 냉철해진다. 남편이 실험실 폭발 사고로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도, 엄마가 교통사고로 길바닥에 쓰러졌을 때도 나는 꼼짝 않고 서서 긴 과정을 눈에 담았다. 이런 나를 보며 냉정하다고 말하는 누군가를 향해 '아니요. 침착함은 느림의 다른 얼굴일지도 몰라요' 따위의 객쩍은 생각을 구시렁거리다 문득 무협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이 떠올랐다.

무림의 고수를 본 적 있는가. 혈기 방장한 젊은이와 맞서 싸우는 머리카락이 허옇게 센 노인 말이다. 바짝 마른 노인의 동작은 유연하고 엷은 미소를 띤 얼굴은 자못 여유롭기까지 하다. 형안의 고수는 한들한들 움직일 뿐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어느 순간, 노인은 현란하게 움직이는 상대의 빈틈을 찾아 회심의 일격을 가한다. 하수를 바라보는 고수의 거연함이란......진정 느림은 빠름의 궁극이 아니던가.

빠름은 느림이 바탕이 되고 오름은 내림이 전제가 된다. 인생의 한 지점을 롤러코스터처럼 쾌속 질주한 적이 있었다. 날수를 층층이 쌓아야 오르는 꼭대기를 타인의 속도에 빌붙어 순식간에 올랐다. 욕망의 깨춤을 추며 고공의 환희를 분수없이 즐겼다. 그야말로 오만함의 극치였다. 속도는 반드시 소멸한다. 빠르게 오른 만큼 내려오는 속도도 빨랐다. 지향점도 없이 내달리기만 했던 천박한 질주를 멈추고 맨바닥으로 내려왔다.

빠른 속도를 숭배하는 무리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하여 서사도 없다. 나도 그랬다. 옆에 있는 이가 누군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실존적 고찰 없이 그저 달리기만 했다. 계절에 맞춰 피는 형형색색의 꽃도, 흘러가는 뭉게구름도, 저무는 주톳빛 노을도 보지 못했다. 남을 의식하며 내달렸던 보폭을 내 걸음나비에 맞추니 자연이,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곁에 있는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 속도를 늦추자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살다 보면 의도치 않게 속도를 늦춰야 할 때가 있다. 얼마 전 고속 열차를 타고 가다가 아차 실수로 내릴 곳을 놓쳤다. 딱히 약속시간을 정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음 역에 내려 목적지로 되돌아가기 위해 덜커덩거리는 완행열차로 갈아탔다. 기차는 굽이굽이 돌아 정거장마다 쉬었다. 느긋해진 눈길이 머문 차창 밖 풍경은 마냥 봄이었다. 연둣빛 나무는 여릿한 빛깔로 봄을 깨우고 알록달록한 꽃은 달콤한 향기로 봄을 품었다. '봄의 향연'이라는 제목의 풍경화는 조바심 내지 않은 내게 자연이 준 선물이었다.

지금 세상은 빠르게 진화 중이다. 5G의 초고속, 초연결 시대를 맞는 신인류의 태도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얼리어답터처럼 한발 앞서 달려가는 이도 있을 테고, 나처럼 한 발 빼는 느림보도 있을 터이다. 추동하여 내달릴 것인가, 해찰하며 유유히 걸어갈 것인가. 진보된 빠름을 선택할 것인가. 익숙한 느림을 고수할 것인가. 헝클어진 생각을 간고를 때이다.

기실 빠르게 가나 느리게 가나 종착점은 누구나 같다. 한 번은 어김없이 검은 막을 내려야 하는 삶이거늘 서둘러 갈 일이 무엔가. 천천히, 느긋이 이러구러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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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