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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옥

청주시1인1책 프로그램 강사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약속들은 대부분 언약으로 이루어진다. 그 언약들은 가볍게 오가는 대화 속에서 하기도 하지만, 때론 계약서 못지않은 무게를 담고 예를 갖추어 말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 나는 어떤 일을 부탁받았다. 돈 되는 일은 아니지만, 한 행사를 좌우하는 부담이 따르는지라 처음엔 망설였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였기에 수락했다. 세상에 거저 되는 일이 어디 있나. 이왕 맡았으므로 시간을 투자하고 머리를 짜내 준비했다. 그리고 시행 일자가 다가와서 추가 자료수집 등으로 연락했다. 그랬더니 다른 이가 진행하기로 했다는 거다. 그런데 그 말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한다. '알겠습니다.' 나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여행 중에 수북이 쌓인 자물쇠 더미를 본적이 있다. 자물쇠들에는 알록달록한 하트모양 메모지들이 달려있었다. 코팅까지 입힌 메모지들에는 변치 않는 사랑이나 우정을 맹세한 글들이 쓰여 있었다. 연인들이나 친구들이 메모지를 자물쇠에 매달고 고리에 굳게 채워버린 거다. 사람들은 이곳이 약속의 성지라도 되는 양 그 앞에서 언약을 하며 자물쇠 숫자를 보태고 있다. '저 자물통에 묶인 사랑과 우정들이 지금도 변치 않고 있을까. 열쇠들은 어디 있을까. 누구도 풀지 못하는 영원을 기원하며 깊은 강이나 계곡에 던져버렸을까. 장난이라기엔 너무 진지한 저런 이벤트를 사람들은 왜 하는 것일까.' 높이 쌓여가는 자물쇠들을 보며 이런 생각들을 했었다.

의식을 행하는 건 마음이나 정신을 믿지 못해서 일게다. 사랑, 약속, 그런 건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성경은 인류이전부터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인간들은 늘 자유를 갈망한다. 오죽하면 검은머리 가진 동물은 믿지를 말라는 말이 있겠나. 약속 그딴 것 정도야 뭐, 하고 아무렇지 않게 파기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인간사회 최상금인 인륜도 변하고 미쳐가는 마당에 인류이전에 있었던, 보이지 않는 사랑이나 마음을 물질적 상징에 지나지 않는 의식으로 어찌 구속할 수 있겠나.

고대히브리인들은 약속에 대한 의식이 심오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언약 베리트(beriyth)어원은 '제물을 자르다'에서 유래된다. 이 말은 '구속력을 지닌 협정'을 뜻한다. 그들은 언약을 할 때 짐승을 잡아 배를 갈라 가운데에 놓고는 당사자들이 지나가며 맹세를 했다고 한다. 이는 언약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이런 죽음을 각오하라는 살벌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시대적 문화적 상황적 거리감은 있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네에게 적용한다면 진즉 죽어 마땅한 사람 참 많을 게다.

계약과 언약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계약은 대부분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하여 믿을 수 없으므로 내용을 기록하고 서명날인 한다. 하지만 언약은 대부분 잘 아는 사람끼리 한다. 마음만 믿고 법적효력이 발생하는 형식이나 절차를 요구하지 않는다. 하여 언약은 사무적인 계약과 달리 쌍방 간에 다소 포용적이다. 계약은 이일을 통하여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먼저 따지게 되지만, 언약은 이일을 하므로 내가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계약은 법과 공권력으로 유지되지만 언약은 사랑과 신뢰와 충절로 유지된다. 계약은 의무에 근거하지만 언약은 조건 없는 헌신이 요구된다. 계약은 깨어질 경우 물질적 손실이 있지만, 언약파기는 관계가 손상되며 사람을 잃게 된다.

세상에 뒤끝 없는 사람도 있나.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건 자존감 문제다. 살면서 누구도 사람을 하찮게 여길 자격은 없다. 나는 설명 한마디 없이 일방적으로 언약을 파기해도 괜찮은 존재인가. 나를 그리 대했으니 나도 그를 추방시킬까. 다시 고민한다. 정녕 내게 머물렀던 한 우주를 내보내는 게 맞을까. 따질 수도 없고, 쿨 하게 잊기엔 자존심이 상하고…. 이럴 때 상대방에게 적용할 페널티 같은 거 있으면 좋겠다. 그에게 적용하고 나면 내 마음이 눈처럼 하얘지는 그런 페널티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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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김진현 ㈜금진 대표이사

[충북일보] 독일의 생리학자 프리드리히 골츠의 실험에서 유래한 '삶은 개구리 증후군(Boiled frog syndrome)'이라는 법칙이 있다. 끓는 물에 집어넣은 개구리는 바로 뛰쳐나오지만, 물을 서서히 데우는 찬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온도 변화를 인지하지 못해 결국 죽는다는 뜻이다. 올해 창업 20주년을 맞은 벽지·장판지 제조업체 ㈜금진의 김진현 대표이사는 현재 국내 중소기업을 이에 비유했다. 서서히 악화되는 경기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결국 도산에 직면한다는 경고다. 충북에서는 유일하게 지난해 중기부의 '존경받는 기업인 10인'에 선정된 김 대표를 만나 현재 중소기업이 처한 상황을 들었다. ◇청주에 자리 잡은 계기는 "부천에서 8남매 중 7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부를 하고 있으면 선친께서는 농사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되고 싶었다. 슈바이처를 존경했고 봉사활동을 좋아했다. 인천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인하대학교가 어디에 있는 지도 몰랐다. 의대에 원서를 넣었지만 떨어졌고, 평소 수학과 화학 과목에 소질이 있는 것을 알고 계셨던 담임선생님께서 인하대에 원서를 써 넣어 주셨다. 인하대 화공과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뒤에도 의대 진학에 대한 미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