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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희

수필가

다시 부르다

책 표지에 실린 사진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단발머리를 한 세 여자가 개울물에 발을 담근 채 웃고 있다. '20세기의 봄'이라는 부제만 아니라면 한 세기 전이라는 시대 배경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밝고 화사한 풍경이다.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그녀들을 몰랐다. 그네들이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무엇보다 무슨 일을 한 여자들이기에 장편 소설 앞장에 턱 하니 사진이 실렸는지 더 궁금했다.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들은 조선 독립과 조국 해방을 위해 불꽃처럼 몸을 던진 여성 혁명가였다. '그들 부류의 삶 전체가 하나의 실수로 취급되었고, 뒷날의 사람들은 그 얼룩을 지우고 싶어 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세 여자의 이름은 어두운 과거 어디쯤에 오랫동안 묻혀있었다.

그녀들이 부활했다. 붉은 깃발 아래 있던 세 여자는 부르면 안 되는 금단의 이름이었다. 하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던 이유가 비단 불온한 사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의 역사에 그녀들의 이름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네들의 남편 혹은 연인이었던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의 거창한 이름과 스펙터클한 투쟁사에 그녀들의 활약상은 적히지 않았다. 생사를 함께한 혁명 동지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거다. 긴 세월 잊혔지만 동토를 뚫고 나오는 봄꽃처럼 작금 다시 피어난 것이다.

존재했지만 부재했던 세 여자. 암울한 역사와 함께 순장되었던 이름을 되찾자 그녀들은 자유 세상으로 훨훨 날아올랐다. 이제 그녀들은 이름 석 자를 역사의 한 페이지에 올려놓고 부재의 연유를 후대에 떳떳이 밝히고 있다.

스스로 숨기다

이름이 없는 곳에는 존재도 없다. 스스로 이름을 숨기고 산 여자가 있다. '더 와이프'라는 영화 속 조안이 그녀다. 1950년대 미국도 우리네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자는 능력이 출중해도 성공하거나 그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글쓰기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조안은 그녀의 이름대신 남편의 이름으로 문 뒤에 숨어 글을 쓴다. 그녀가 쓴 작품으로 남편이 노벨 문학상을 받던 날. 그날의 주인공은 당연히 남편이었다. 조안은 남편의 명예를 위해, 스스로를 위해 진실의 입을 닫은 채 영화는 끝이 난다. 평생을 남편의 그림자로 산 그녀는 행복했을까. 그녀의 이름이 없는 곳에 그녀는 없었다. 당연히 행복도 없었으리라.

되찾다

60여 년 전, 아버지가 이름 석 자를 지으며 나도 세상에 존재했다. 아니 내가 먼저고 이름이 나중이었던가. 이름과 나는 한 몸처럼 자라 함께 어른이 되었다. 아버지의 호적에서 이름을 옮기던 순간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짧은 시간이었다. 서류에 몇 글자 쓰고 나니 내 역할이 달라졌다.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아내로 이름이 바뀌었다. 바뀐 이름이 누군가에게는 눈물겹도록 소중했고 누군가에게는 지우고 싶을 만큼 버거웠을 터이다. 현실과 꿈 사이가 버름해질수록 희망은 멀어졌고 나는 이름을 지키고자 몸을 낮추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가. '여성의 용기는 순종이라'고. 납작 엎드린 나의 자발적 복종을 누군가는 순종이라고 곡해했다. 순종이 용기라면 나는 용기 내지 않으리. 더는 숨지 않으리. 바람이 선선히 불던 날, 고매한 철학자가 말한 박제된 순종을, 용기라는 허울을 나는 단호히 벗어던졌다. 어둠 속에 있던 이름 석 자를 꺼내 순한 바람에 거풍시켰다. 퍽이나 개운했다. 글이라는 받침대가 바닥에 있던 이름을 당당히 세워주었고 뭇사람들이 내 이름을 기꺼이 불러 주었다. 나는 본연의 내 이름을 되찾았다. 그예 나로 돌아왔다.

여기, 오늘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고대 이래 여자는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정물처럼 살아가길 강요당했다. 유구한 세월 동안 여자들의 피맺힌 외침은 인습에 젖은 사람들 귀에 가닿지 않았다. 1908년 3월 8일, 여자들이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며 깃발을 들고 루트커스광장에 모였다. 모순의 영어에 갇혀있던 본연의 이름을, 본질의 존재를 찾으러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여기, 헤쳐 있던 무명의 여자들이 다시 깃발을 들었다. 오늘, 느슨해진 신들메를 묶으며 질끈 내 마음도 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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