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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순

충북도여성정책관

첫눈이 올 때까지 손톱에 봉숭아물이 남아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었다. 사귀는 사람도 없으면서 손톱을 길게 기르면서 서로의 손톱을 재어보며 첫 눈을 기다리던 청춘시절이 생각나게 하는 영화로는 단연 건축학개론이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이들은 "첫사랑을 다시 만났다. 가장 마음에 남는 청춘영화로 몇 번을 봐도 볼 때마다 마음 한 켠이 아린다"라는 등 추억이 서린 영화로 기억하며 SNS에 감상평들을 올렸다.

영화에 대한 소개를 옮겨보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어쩌면… 사랑할 수 있을까? 수업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생기 넘치지만 숫기 없던 스무 살, 건축학과 승민은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난 음대생 서연(수지)에게 반한다. 함께 숙제를 하게 되면서 차츰 마음을 열고 친해지지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툰 순진한 승민은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고백을 마음속에 품은 채 작은 오해(?)로 인해 서연(수지)과 멀어지게 된다."

남자주인공은 선배가 성폭력을 연애의 스킬처럼 자랑스럽게 말하고 주인공이 좋아하는 여성을 대상으로 성폭력을 시도하겠다는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옆 친구에게 괜시리 화풀이을 해댔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반한 그녀가 선배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제지하지 않은 채 집밖에서 서성이다 피해자인 여성을 비난한다는 점이다. "지랄"이라고.

그동안 우리는 흔하게 영화와 드라마에서 연애, 혹은 사랑이라고 호도된 성폭력 장면을 무수히 봐왔다. 남성이 사랑을 고백하거나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는 방식은 여성의 손목을 낚아 채거나 벽으로 몰아세우거나 갑자기 끌어안는 것 등 일방적으로 하는 행동들이 태반이었다. 그리고 환호했다. 남성답다고. 더구나 그런 행동 이후에 이어질 강력한 행동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여성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일방적인 애정고백이 상대를 얼마나 힘들게 했을까를 묻는 대사는 본적이 없다.

<한국여성민우회>에서 발간한 '함께 가는 여성' 에서는 드라마의 여성캐릭터를 수동적으로 만들고 사랑으로 포장된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최근 1년 동안 방영된 총 294편의 드라마를 모니터링한 결과 강제적 신체접촉 425건, 손목 및 팔목잡기와 낚아채기 179건으로 남성의 이런 행위를 로맨스의 정점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손목을 비틀어 잡지 않고도 의사를 전달할 수 있고, 일방적으로 좋아한다고 강요하지 않아도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음에도 이러한 방식이 통용되고 있는 현실은 문제적이다.

폭력을 로맨스로 정당화하는 인식이 미디어를 통해 확산되고 재생산되면서 피해자가 정당성을 증명해야하는 기막힌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디지털성폭력과 데이트폭력 등이 사회 문제화 되고 수면위로 올라오면서 여성들이 이전과 다르게 문제를 인식하고 스스로 주체화되어 가려는 움직임들이 포착된다는 점이다.

직장 내 성희롱을 개인 간의 연애라 치부하고 쉬쉬했다면 이제는 '성폭력'이라고 고발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친밀한 관계 속에서 모호하게 벌어지던 폭력을 이제는 '성폭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적자기결정권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우리사회에 만연된 성차에 의한 차별이 성희롱, 성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각하는 것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말하는 것을 우리는 혜화역에서, 광화문에서 목격하고 있다.

차별의 현실을 깨닫고 가부장제의 테두리 안에서 피해임을 인식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차별이 보여야 평등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편하지 않아 현재에 머무르려는 자, 혹은 과거를 회상하며 '그 때가 좋았다'라고 말하는 자들은 새롭게 변화하는 여성들과 대화가 힘들어질 것이다. 더 이상 성폭력을 연애로 호도하지 말라. 말하지 않았다고 YES가 아니다. 그녀가 '좋아'라고 말할 때, 그 때가 동의다. 눈이 내리고 거리에서 즐거운 음악이 들리는 연말이다. 새해는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포용의 사회,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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