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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의 스타, 홍기호 아시안게임 복싱 금메달리스트

친구 권유로 도장 찾은 게 인연.
1980년대 중량급 복싱간판으로 활약
선수 은퇴 후 서원대 코치로 일해

  • 웹출고시간2018.12.30 20:09:49
  • 최종수정2018.12.30 20:09:49

인도 뉴델리 아시안게임 라이트헤비급 복싱 결승전에서 심판이 홍기호 선수의 손을 들어올리고 있다.

[충북일보=보은] 1982년 11월 25일, 국민들의 귀와 눈은 아시안게임 복싱경기장에 쏠려 있었다.

그 곳에서 라이트헤비급(81㎏) 복싱 결승전이 열리고 있었다.

한국의 홍기호와 인도의 싱이 결승에서 맞붙었다.

홍기호는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판정까지 갈 경우 싱은 홈 어드밴티지가 충분히 예상되는 개최국 선수였다.

더구나 홍기호는 바로 앞서 치러진 우승후보 북한 이운용과의 준결승에서 고전해 체력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변정일 KBS 해설위원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홍기호(오른쪽) 선수의 모습.

하지만 이런 우려는 시합이 시작되자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홍기호는 싱에게서 2차례 다운을 빼앗는 등 일방적인 경기를 펼쳤다.

3회전이 끝나고 채점 결과가 발표됐다.

홍기호의 5대 0, 심판 전원 판정승이었다.

경기를 지켜보던 한국의 관중석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9회 인도 뉴델리 아시안게임 복싱종목에서 금메달이 탄생한 것이다.

홍기호

충북복싱협회 실무부회장

그로부터 36년의 시간이 흘렀다.

당시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홍기호(57·서원대 학생지원과장) 충북복싱협회 실무부회장을 만났다.

홍 부회장은 1980년대 한국복싱의 중량급 간판으로 활약했다.

1980년 5월 고교 2학년 때 그는 처음으로 복싱과 인연을 맺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무료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을 찾다가 친구의 권유로 청주복싱도장을 찾은 게 인연이 됐다"고 홍 부회장은 회고했다.

모교인 괴산 연풍중학교가 인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홍기호(맨앞 오른쪽 두번째)선수를 맞아 성대하게 환영식을 개최하고 있다.

당시 청주복싱도장은 충북 복싱계 대부였던 고 전재완 서원대 교수가 관장으로 일하던 곳이었다.

전 교수는 그의 대성 가능성을 한 눈에 알아보았고 다음날 열리는 시합에 출전할 것을 권유했다.

홍 부회장은 당시 만해도 복싱에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예상대로 그는 첫 시합에 나가 1, 2회전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며 패색이 짙었다.

하지만 이변이 생겼다.

3회 들어 그는 단 한방에 상대를 쓰러뜨리고 첫 시합에서 당당히 KO승을 거뒀다.

초·중학교 시절 태권도와 육상선수로 뛰면서 운동신경이 남다른 덕분이었다.

그는 내친김에 그 해 학생선수권대회와 전국체전 라이트 헤비급(81㎏)에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하며 복싱계를 놀라게 했다.

이 같은 성적에 힘입어 그는 복싱에 발을 들여놓은 지 불과 1년 만인 고교 3학년 때 첫 태극마크를 달았다.

인천에서 열린 전국체전에 출전해 금4개, 은1개, 동2개를 따내 단일팀으로는 최다 메달 획득을 기록한 서원대 복싱부 선수들의 모습

그의 파란만장한 복싱인생은 태능선수촌에 입촌하면서 시작됐다.

1982년 4월 태국 킹스컵 복싱대회에 처녀 출전해 동메달을 차지하고 같은 해 11월 인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때까지 승승장구했다.

남들은 10년을 해도 못 이룰 일을 홍 부회장은 복싱을 시작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아시아 정상에 우뚝 섰다.

이후 올림픽 선발전에 도전했지만 심판의 편파 판정으로 끝내 올림픽 출전의 꿈이 좌절됐다.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그는 그해 충북에서 열린 전국체전을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접었다.

홍 부회장은 10년 간 국가대표 선수로 뛰면서 아시아선수권대회 등 각종 국제대회에 나가 12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홍기호(사진 왼쪽) 충북복싱협회 부회장이 인천에서 열린 전국체전 복싱경기에서 선수에게 작전지시를 하고 있다.

은퇴 이후 그는 1991년 1월 서원대 복싱부 코치로 변신해 충북복싱을 전국 최강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1999년까지 9년간 서원대 코치로 일하면서 아테네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조석환 등 국가대표 10여 명을 배출하며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홍 부회장은 선수와 코치로 학교를 빛낸 공을 인정받아 서원대에 특채로 채용됐다.

현재 그는 소년체전과 전국체전 충북선수단을 인솔하며 후배 선수들을 지원하는 일로 바쁘다.

홍 부회장은"26년간 최장수 복싱협회 전무이사를 지냈다. 현재는 소년체전과 전국체전에 참가하는 충북선수단을 지원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그는 후배선수들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운동을 시작했으면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면 선수로 성공하거나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며 후배선수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줬다.

/ 주진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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