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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이 빚은 세월음식 '석이버섯'

대장경 속의 음식이야기

  • 웹출고시간2018.11.26 17:38:13
  • 최종수정2018.11.26 17:38:13

자영스님

자연음식요리가, 화림전통음식연구원장

 석이는 "바위에 붙어있는 귀(耳)와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특이한 모양의 석이버섯은 해발 700m 이상의 바위틈에 붙어서 수십 년 동안 거센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을 적마다 바위의 기운을 조금씩 먹고 자란다. 비가 오지 않거나 물기가 없으면 생장을 멈추고 바싹 마른 채로 척박한 바윗돌에 붙어산다. 그래서 석이를 화강암 벼랑의 검은 꽃이라 한다.

 석이는 사실상 버섯이 아니라 잎 모양의 지의류(地衣類)이다. 바람과 이슬을 머금은 석이는 공해를 가늠하는 지표식물의 표본이자 매력을 가진 고결한 식물이다. 아무리 생장조건이 좋더라도 1년에 평균 1~2㎜ 밖에 자라지 않는다. 외밧줄에 의지해서 석이를 채취하는 헌터에게 한 번 얻으려면 30~40년의 기다림이 필수요건이다. 사계절 채취가 가능하지만 인공재배는 되지 않는다.

 고혈압 등 약재로 식재료에 쓰이던 석이는 예로부터 궁중요리나 임금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다. 고사리, 고비 등 검정빛깔의 음식을 담는 구절판에 들어가는 검은색 빛깔의 대표음식이 석이버섯이다.

 석이(石茸)는 기원전 239년에 쓰인 중국의 '여씨춘추'에 처음 나온다. 이 책에는 "기산 동쪽에 청조산의 감로가 있는데 장강 강가의 귤, 운몽택의 유자 그리고 이밖에 석이버섯이 있다.(漢上石耳)"고 했다. 동진시대 갈홍의 '포박자'에는 석지(石芝)로 기록했다. 원나라 때 가명의 '음식수지'와 명나라 때의 '본초강목'에서도 석이가 소개됐다.

 삼국시대부터 식용해온 석이는 1236년 고려의 의학서 '향약구급방'에 석심(石蕈)으로 기록됐다. 특히 1268년에 반역자 김유가 금강산 석이 60근 등 희귀한 재료들을 요구하며 고려 조정을 괴롭혔다. 이 사실은 '고려사 열전'에 기록됐으며, 조선의 실학자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는 '고려사'의 기록을 인용해 '금강산에서 나는 석이버섯(石茸)'이 중국에도 널리 알려졌음을 기록했다.

 조선시대의 석이는 왕실과 조정의 진상품이었다. 145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경상, 충청, 전라도의 공물로 석이(石茸) 등을 꼽았다. '성종실록'에는 일상의 음식과 제찬음식의 재료로 사용되었다고 했다. 이 시기에는 중국과 일본과의 교역품에도 빠지지 않는 물목이었다.

 매월당 김시습은 '균심'이란 시에서 "기름에 절여 달이면 달고 또 향기롭고 입에 맞는 좋은 음식 오로지 편안히 즐기네. 씹고 나니 속마음 서늘한 것 깨닫지 못해도 거친 돌 속에서 움터 자란 그를 알겠구나."라며 석이를 넣어 잘 차린 음식을 노래했다. 학봉 김성일이 본가의 아내에게 보낸 '언문 편지'에도 석이버섯(石耳), 석류, 조기 두 마리 보낸 것을 겉봉투에 적어 놓았다.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석이는 차고 평한 성질이 있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며 배고프지 않게 하고 장수할 수 있는 식품이라 했다. 허목은 '기언'에서 금강산 유점사에서 먹었던 석이떡(石茸餠)을 적었는데, 이를 그의 동생 허균이 다시 이야기했다. 1753년 권두인의 '하당집'에는 단양 영춘현의 백성들이 석이버섯 채취에 고생하는 것(石茸說)에 대해 기록했다. 1766년 유중림은 '증보산림경제'에서 "풍악 석이병을 만든다."고 했다. 1808년 서영보가 지은 '만기요람'에 진상품목으로 석이버섯의 양과 금액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일상식과 제찬에 이용됐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규합총서', '이씨음식법' 등 음식조리서에도 석이가루를 찹쌀가루와 섞어 찐 석이떡이나 석이단자가 기록됐다.

 이처럼 석이는 약재로 궁중요리와 절기 제찬의 주요한 재료였다. 수십 년 세월에 이뤄진 이파리는 얇고 불규칙할 뿐만 아니라 먼지나 돌과 같은 이물질이 묻어있다. 석이에 있는 오돌토돌한 돌기부분(배꼽)을 따내고 살짝 데친 후에 쥐고 비벼 문질러 씻어내는 것이 요리의 시작이다. 비록 옴짝달짝없이 첩첩산중의 바위틈에 사는 석이의 일생이지만 구절판 음식과 검정빛깔 고명으로 맛과 향기를 천리만리에 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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