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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완

한국문화창작재단 이사장

 국향 그윽한 가을이 깊어갑니다. 지난여름이 워낙 무더워서인지 조석으로 서늘하게 닿는 바람도 알싸한 향취로 느껴질 만큼 반갑습니다. 근래 지구상에 폭염과 혹한이 반복되는 이상기후라지만 아직은 계절이 어김없이 순환되고 있는 것이 고맙기도 합니다. 저녁을 먹고 나니, 아내가 과일을 내어옵니다. 알알이 맺힌 포도 한 알을 입안에 넣으니 단맛과 햇빛의 향기가 가득 피어나며 저절로 이육사의 시 '청포도'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이육사는 포도 한 알에 이런 혜안을 담았지요.

 "먼 데 하늘이 알알이 꿈꾸며 들어와 박혀"

 그러고 보면 이 포도 한 알에 하늘의 맑은 꿈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하고 고마운 포도 한 알입니다. 자연이 베풀어준 성찬을 힘들이지 않고 입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감사합니다.

 맛있는 포도를 먹다보니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떠오릅니다. 인민군 장교가 동막골 촌장에게 물어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 주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죠?"

 촌장은 무덤덤하게 대답합니다.

 "뭘 좀 잘 멕이면 되는 기라."

 듣고 보니 참 단순하면서도 명쾌합니다. 사람에게 먹고 사는 문제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생사를 가름 하는 중요한 행위죠. 그러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나왔겠지요. 배가 고프면 아무것도 좋은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잘 먹고 잘 싸면 다 무탈한 겨."

 학창시절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시골에서 해 온 음식을 풀어놓으며 어머니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셨죠. 습관처럼 무심코 던지는 그 말이 친구들 앞에서 어찌나 창피했던지 모릅니다. 마음속으로 '어머니는 왜 저렇게 무식하게 말씀을 하실까?'하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잘 몰랐던 겁니다. 그 말에 담긴 삶의 오묘한 진리를요. 지천명(知天命)에 이르는 나이 50세를 훌쩍 넘기니 새삼 어머니의 그 말이 가슴에 콕콕 와서 박힙니다. 생각해보면 먹고 배설하는 것은 우리 일상의 처음과 끝인 것을요.

 '잘 먹고 잘 싼다.'라는 그 말에 마치 세상의 진리가 듬뿍 담긴 것 같습니다. 포도가 여름 햇살을 먹고 단맛을 저장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쓰임 받고 있는 것처럼 잘 먹고, 잘 싸야 우리 몸이 건강해지니까요. 아이는 성장시켜 어른으로 만들고, 어른은 그 에너지로 삶을 이어가는 거죠. 섭취와 배설의 행위는 절묘한 균형의 바탕 위에 이뤄집니다. 지나치게 과식하게 되면 우리 몸은 견디지 못하고 설사로 급히 배출해 버립니다. 모든 영양분을 흡수할 수 없거니와 설령 받아들인다 해도 이로울 것이 없기 때문에 몸이 알아서 행한 것이죠. 그 만큼 몸은 지혜롭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조정을 받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몸은 그대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죠.

 먹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지만, 배설은 자연의 섭리인 거죠. 식욕은 과식을 불러오지만, 자연인 몸은 지나친 욕구를 경계해 무심히 배설해버리는 겁니다. 몸이 불편하니, 반복되다보면 욕망을 절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용 사람들은 생각이 몸을 지배한다고 여기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거꾸로 몸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어머니의 말씀 그대로 '잘 먹고 잘 싸는 일'이야말로 세상에 잘 순응하며 살라는 금과옥조인 것이죠.

 며칠 전 지인이 푸념을 늘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일 년 전 큰 수술을 받고 아직도 그 후유증을 관찰 중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전화할 때마다 "밥 잘 먹으면 다 낫는다."라고 무심한 소리를 한다며 서운해 하더군요. 그런데 '잘 먹는다'라는 말에는 원활한 배설의 의미와 함께 몸의 순환과 대사가 잘 이뤄지고 있으니 건강하다는 것을 뜻하지요.

 볕 좋은 가을 오후, 그 지인과 더불어 국화차 한 잔 나누며, 아버지 말씀의 깊은 뜻을 같이 헤아리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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