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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윤병운 선생의 숭고한 뜻 기리다

20일 청주시 옥산면 장도리 마을회관에서 윤병운 선생 공적비 제막식 열려
지난 8월 15일 작고 74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

  • 웹출고시간2018.09.20 16:51:03
  • 최종수정2018.09.20 17:27:57

20일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장동리 마을회관 앞에서 열린 독립운동가 윤병운 선생 공적비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제막을 하고 있다.

ⓒ 신민수기자
[충북일보] 20일 오전 찾은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장동리 마을회관. 조용했던 시골 마을이 오랜만에 떠들썩했다.

이곳에 모인 마을 주민들의 얼굴에는 설렘과 떨림이 가득했다.

이날 오전 11시 장도리 마을회관 앞에서는 이 마을 출신인 독립운동가 윤병운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공적비 제막식이 열렸다.

1927년생인 고 윤병운 선생은 중학교 1학년이던 1941년 일찍이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

서울 성남중학교에 진학한 윤 선생은 방학이 되면 고향에 내려와 후배들에게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학생 독립단체인 신진당을 조직하고, 일본 총독 저격을 모의한 것으로 알려진다.

1942년 12월 겨울방학을 맞아 고향집에 내려온 윤 선생은 일본 형사에게 체포됐다.

여동생 윤순분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미성년자였던 윤 선생은 재판정에서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풀려날 수 있었지만, 오히려 더욱 강하게 항일 독립의 뜻을 밝혀 결국 형을 받았다.

인천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윤 선생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18세의 어린 나이에 숨을 거뒀다.

그의 의로운 삶은 잊힌 듯 했으나 유가족과 후배들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정부는 지난 8월 15일 광복절 70주년을 맞아 윤병운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했다.

이로써 그는 작고 74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이날 제막식에서는 6촌 동생 윤병두씨와 후배 윤병희씨가 윤병운 선생의 공적을 직접 전해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또한 이장섭 충북도 정무부지사를 비롯한 사회 각계 인사들이 참여해 윤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렸다.

윤해철 장동리 이장은 "윤병운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유가족과 마을 주민들이 함께 성금을 모아 공덕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마련했다"며 "오늘은 자랑스러운 날이다. 윤병운 선생의 애국정신을 알리는데 마을 주민 모두가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 신민수기자 0724sm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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