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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완

한국문화창작재단 이사장

"이야, 너희 집 되게 부자다."

처음 우리 집에 놀러온 친구의 일성이었습니다. 소위 말해'달동네'에 사는 친구였지요. 사실 그 친구를 데려온 것은 그때 보통의 가정집에서 막 들여놓기 시작했던 냉장고와 그 안에 가득 찬 각종 음료수를 슬쩍 과시하기 위함도 있었어요. 그런데 음료수 잔을 건네받으며 그가 감탄하고 있는 것은 하얀 냉장고가 아니라 전집류가 빼곡히 꽂힌 아버지의 책장이었습니다. 책이 가득 진열되어 있던 유리 책장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던 그 친구 모습이 수십 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기억에 선연합니다.

이삿짐을 정리하며 그 친구를 떠올린 것은 책 때문이었죠. 이삿짐센터 직원들 말로는 무엇보다 책 많은 집의 이사가 가장 힘들다고 합니다. 책 싸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무게도 엄청나니까요. 그동안 몇 차례 옮겨 다니며 많은 책들을 정리했건만 아직도 쉽게 이별할 수 없는 책들이 많습니다. 특히나 청춘의 손때가 그대로 묻어 있는 책들은 쉬이 떠나보내기 힘들어요. 그것은 마치 나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베어내는 아픔을 수반합니다. '월부'로 샀던 세계문학전집, 철학전집 들과'현대문학''뿌리 깊은 나무'등의 월간지도 미처 아직 보지 못한 부분들이 있기에 이사 때마다 그대로 끌어안고 다녔거든요.

사실 육중한 양장본의 전집류 서적이 가득한 책장은 한때 부와 교양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죠. 하긴 저 또한 어린 시절 남의 집에 갔을 때 책에 대한 첫 인상은 부와 결부된 위압적 모습이었으니까요.

어느 날, 어머니 심부름으로 이웃 부잣집에 참기름을 가져다주게 되었지요. 넓고 커다란 정원을 지나 거실에 들어서자 삼면을 둘러싼 유리책장 속 책들이 각 잡힌 병사들의 빳빳한 옷깃처럼 늠름한 자태로 도열되어 있었죠. 우리 집의 달랑 하나 서 있던 책장과는 그 태가 달랐습니다. 그제야 친구가 우리 집 책장을 보고 부자라고 했던 것이 뭔지 알 것 같았어요. 무언가 정신적으로 압도되는 느낌, 그것을 그 친구는 그저'부자'로 표현했던가봅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요즘 패션 피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잇 아이펨'은'책'이라고 하더군요.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인증 샷을 남길 때 무심한 듯 주위 탁자에 책 한 권쯤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책덕후, 북맥, 북튜버 등 책 관련 신조어도 잇따라 나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는 유리장 속 진열된 책들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 모습과 어쩐지 오버랩 되니 말입니다.

한 포털 사이트에 연재되었던'지식인의 서재'라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저명한 작가들이나 유명 인사들이 너도나도 고상하고 화려한 자기 서재를 공개할 때, 한 배우는 집 근처 동네 도서관을 소개하는 겁니다. 상당히 인상 깊었어요. 독서활동은 한 개인의 사유와 안위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나누거나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혔어요. 노벨상 수상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에는 라디오 방송국 사장이 드라마로 제작할 소설을 구입할 때 일일이 읽어보기 힘들어 무게를 달아 소설을 구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쩐지 잰 체하는 지식인을 비틀어 보이는 것 같아 무척 흥미로운 인상으로 남았지요. 박완서 작가의 작품에도 평생 책만 읽고 집안 살림은 등한시했던 가장의 서책을 풀로 쑤며 깔깔거리는 집안 여인네들의 웃음소리에서 속 시원한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거든요. 육체노동을 천시하던 우리 양반님네에 대한 통쾌한 일격같이 느껴졌달까요.

여름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책을 만져보며 나무를 생각하죠. 이 종이는 나무에서 왔으니까요. 장 지오노의'나무를 심은 사람'에는 이런 구절이 있지요.

'나무를 심는 사람은 지구를 만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나무를 심는 육신의 활동에서 지적 저작물이 나옵니다. 이 여름, 독서하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이 불볕더위 속, 모든 생산 현장의 땀방울 또한 경이롭고 위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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